On Air RAW novel - Chapter 245
245화.
윤의 목소리에 창묵의 발이 뚝 멈췄다. 창묵이 사방을 경계하는 초식동물 같은 표정으로 뒤를 홱 돌아보았다. 계단을 내려온 윤은 명함을 꺼내 건넸다.
“저 김윤 피디입니다.”
창묵은 그 명함을 받는 대신 윤을 빤히 보았다. 지쳤다고 해야 할까, 무기력하다고 해야 할까.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그 눈이 제대로 닦이지 않은 안경 너머에서 순간 짧게 빛났다. 윤은 창묵을 마주 보았다.
“아직 저희하고 얘기할 의사 없으신 겁니까?”
창묵이 짧은 숨을 내쉬며 덥수룩한 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담배 냄새가 흩어졌다. 거의 온몸 구석구석마다 담배 냄새가 배어 있는 것 같았다.
“피디님,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윤은 창묵의 말을 끊었다.
“임 기자님이 주필님 설득하시겠다고 저한테 말씀하셨거든요.”
창묵이 그 말에 버석거리는 입술을 손끝으로 문지르다 입을 열었다.
“내가 몇 번이나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임 기자한테 말을 했습니다.”
“정보현에 대해서 알고 계셨죠?”
윤은 대답 대신 물었다. 이마를 덮은 머리칼 아래로 창묵이 눈썹을 좁혔다.
“왜 숨기셨던 겁니까? 계좌 정보까지 줘 가면서 정보현 숨기신 목적이 있으실 거 아닙니까.”
답이 돌아오지 않자 윤은 그를 다시 한 번 다그쳤다.
“그 계좌도 다 차명이죠? 누가 사용하는 계좌입니까?”
사실 대답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잠깐 숨을 고른 윤은 창묵을 응시했다.
“최 주필님.”
윤과 시선을 맞추던 창묵이 곧 어슷하게 눈을 비껴 피했다. 그를 더 이상 몰아붙여 봐야 나올 것이 없을 듯했다. 애초에 형원이 계속해서 설득을 했고, 상황이 이렇게까지 됐는데도 계속해서 숨고 싶은 거라면 자신이 강요할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말씀 안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윤이 순순히 물러나자, 다시 계단을 내려가려던 창묵이 등을 돌린 채 걸음을 멈췄다.
“…… 정말 방송 내보내려고 그럽니까?”
윤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 창묵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피디님은 엄대진을 몰라요.”
그건 뜻밖에도 걱정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그게 도리어 약간의 오기를 불러일으켰다.
“저도 엄대진 몇 달 동안 취재했고 직접 만나 봤습니다.”
“임 기자 저렇게 된 거 엄대진이 시켰을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아닙니까?”
윤은 순간 멈칫했다. 창묵이 계단 난간을 움켜쥐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피디님들 목숨 걸고 한다고 임 기자가 저한테 얘기하더라고요. 그런데 진짜 목숨 건다는 게 뭔지 알아요?”
조소하는 듯한 말투였으나 그건 자조에 가까웠다. 윤은 그의 의도를 바로 파악하지 못했다. 창묵이 다시 물었다.
“죽기 직전까지 가 본 적 있습니까?”
“죽기 직전에 몰린 게 아니면 저희한테 이 방송 내보낼 자격 없는 겁니까?”
윤이 되물은 말에 창묵이 희미하게 웃었다.
“청와대, 검찰, 경찰, 엄대진이 자기 마음대로 못 하는 데 하나도 없어요. 피디님들은 절대 엄대진 못 잡습니다.”
퀭한 얼굴에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한 사람 특유의 무력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존경받던 언론인, 신인 정치가로서의 커리어가 한순간에 박살 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게 패배감뿐이라는 걸 이해할 수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윤은 그 무력함에 휩쓸려 들어갈 마음 따위는 없었다.
“임 기자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던데요. 확신 같은 건 없다고, 이건 최후의 발악이라고. 우리는 운에 거는 거라고요.”
창묵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윤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주필님 꼭 만나 뵙고 싶었던 겁니다. 저희가 쓸 수 있는 무기는 팩트밖에 없잖아요. 이게 정말 소용없는 일이라고 해도, 한 사람이라도 더 진실을 알게 되면 거기 의미가 있는 것 아닙니까?”
난간을 움켜쥔 창묵의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윤은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잠시 창묵과 대치하던 윤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창묵이 대답하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뒤에야 윤은 다시 보호자 대기실로 돌아왔다. 그새 시현의 곁에 앉아 있던 정언이 윤을 보고는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다.
“어디 갔다 온 거야?”
“최창묵 주필이 왔더라고요.”
“여기?”
정언이 멈칫하며 묻는 말에 윤이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얘기 안 할 것 같아서 알겠다고 했어요. 스튜디오는 어떻게 됐대요?”
주위를 슬쩍 본 정언이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현의 곁에서 조금 떨어져 앉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다른 부서에도 부탁해 봤다는데 우리한테 스튜디오 주지 말라고 한 거 맞는 것 같아. 다들 엄청 난감해하면서 사정은 알겠는데 곤란하다고 한대. 선배가 일단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먼저 나머지 작업 들어가겠다고, 여기서 상황 보고 연락 달라고 하더라고.”
“다른 건요?”
“사장님하고 국장님 빠르면 오늘 오후에 바로 검찰 소환 들어갈 수도 있대.”
윤은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빨리요?”
“엄대진 지지율 급락했다며. 그저께보다 어제 시청률 더 올랐어. 계속 오를 가능성 높고. 인터넷 여론도 장난 아냐. 오늘은 어린애들 아토피나 알레르기 발병한 내용하고 전 주민 전수 조사한 내용 나갈 거야. 사진 봤는데 보도 나갈 애들 상태가 너무 심각해. 하청업체 증언도 방송될 거라 엄대진 입장에서는 지금 불법이고 뭐고 우리 못 막으면 죽는다고 생각할걸. 우선 임 기자님 상태 좀 보고 결정하자고.”
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란히 앉은 정언과 윤 사이에서 지루한 기다림이 이어졌다.
정오 면회 시간에도 의사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마취는 풀렸지만 의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며칠 정도 더 중환자실에 있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답변에 형원의 부인은 거의 쓰러질 기세였다.
결국 시현의 성화에 정민은 제 엄마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동료들도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점심을 먹고 돌아온 뒤 늦은 오후가 되자 남은 사람은 서너 명 정도였다. 윤은 손목에 찬 시계를 보고는 정언에게 물었다.
“어떡하죠?”
이대로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었다. 당장 방송이 될지 안 될지가 문제인 판이었다. 정언이 잠시 생각하더니 구겨진 미간을 누르며 나직이 대답했다.
“만약에 오늘 중으로 상태 호전될 것 같지 않으면 사무실로 넘어가자. 거기서 어떻게 할지 얘기해 봐야 될 것 같아.”
“아무래도 오늘은 안 될 것 같죠?”
“그러게. 걱정되네. 계속 기다릴 수는 없으니까…….”
전화 좀, 하고 자리를 뜬 정언이 돌아온 건 십 분쯤 뒤였다.
“선배가 아까 종편 들어갔다고, 와서 얘기하자고 하네.”
“알았어요.”
윤이 몸을 일으키자, 정언은 남아 있던 시현에게 자기 명함을 건넸다.
“무슨 일 생기거나 도움 필요하시면 이쪽으로 연락 주세요.”
명함을 받아 들어 뚫어지게 보던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걱정 마시고요, 하고 한마디를 덧붙인 정언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내려가는 버튼을 누른 정언은 피곤하다는 얼굴로 층수 표시창을 쳐다보았다. 마침내 알림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윤은 먼저 안으로 들어선 정언의 뒤를 따랐다.
막 문이 닫히려는 순간이었다. 그때 누군가 급히 달려와 사이로 갑자기 몸을 끼워 넣었다. 시각보다 먼저 낯선 존재를 인식한 건 후각이었다. 그새 익숙해진 짙은 담배 냄새가 좁은 공간 안으로 훅 밀려들었다.
윤은 거의 본능적으로 정언의 앞을 막아섰다. 예상하지 못한 불청객이 얼굴을 들었다. 그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저, 피디님.”
창묵이었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겠습니까?”
안경 너머의 눈은 절박했다.
* * *
창묵의 원룸 오피스텔은 휑했다. 창을 무겁게 내리덮은 검은색 암막 커튼을 걷어도 방 안의 묘한 싸늘함은 가시지 않았다.
환기는 자주 하는 듯 방 안의 공기는 선선했으나, 희미하게 집 안 전체에 밴 담배 냄새는 숨길 수 없었다. 작은 책상 위의 노트북 한 대와 휴지통 속의 구겨진 담뱃갑 따위를 제외한다면 생활감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차에 개인용 캠코더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 다행이었다. 윤이 곁에서 미니 삼각대와 캠코더를 세팅하는 사이, 창묵은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놓고 두 사람과 마주 앉았다.
정언은 창묵의 안색이 몹시 나쁜 것을 곧 알아차렸다. 자신들이라고 썩 나은 상태는 아닐 것 같았으나, 손목에 찬 시계에 흘끗 눈을 준 정언은 창묵에게 물었다.
“저녁 안 드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창묵이 그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 원래 식사를 자주 하는 편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말마따나 집 안 어디에도 뭔가 음식을 해 먹는 듯한 흔적은 없었다. 정언은 윤이 세팅을 마친 것을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우선 저희하고 만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짧은 침묵이 지났다. 창묵은 잠깐 현관으로 시선을 주었다.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표정이 얼핏 지났다가 사라졌다. 창묵이 거기 시선을 둔 채 나지막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