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46
246화.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그만두고 싶어요. 피디님들이 하려는 거 도박입니다. 엄대진, 남제선, 위험한 사람들이죠. 목숨 걸고 도박하기에 두 분 너무 젊지 않습니까.”
목소리 끝이 갈라졌지만 정언은 대답 대신 물었다.
“임 기자님 때문에 마음 바꾸신 겁니까?”
창묵의 입매에 희미한 웃음이 물렸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입가를 매만지던 창묵이 어깨를 으쓱했다.
“네, 뭐, 아니…… 어느 정도는, 어느 정도는요. 우리 애가 시현이하고 동갑입니다. 마지막으로 얼굴 본 게 한 일 년 반, 대학 들어가기 전에. 일이 그렇게 되고 나서 가족들이 다 지방으로 내려갔었죠. 저는 가족들 볼 낯이 없으니까 돈만 보냈고. 애가 대학 면접 본다고 서울 올라왔을 때, 그때 마지막으로 봤어요. 애비라고 낯짝 들 수가 있습니까.”
말투는 담담했으나 그가 느꼈을 고통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수감이나 다름없이 이 좁은 공간에서 오로지 글만 쓰며 사람과의 접촉을 거의 끊은 채, 가족과도 만날 수 없는 생활을 유지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창묵이 두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우리 애가 저 교도소 있을 때 면회를 온 적이 있습니다. 다시는 오지 말라고 혼을 내서 보냈어요. 그 어린 게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가던 게 아직도 생각납니다. 시현이가 혼자 그렇게 앉아 있는 거 보는데, 마음이 참…… 모르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창묵의 모습은 쓸쓸했다. 창묵이 손을 깍지 끼어 입가에 댔다. 몇 초 정도의 정적이 흘렀다. 먼저 그 정적을 깬 건 창묵이었다.
“전 모험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제가 제 인생에서 유일하게 후회하는 일, 그게 정치판 멋모르고 뛰어든 거죠. 기자 생활하면서 엄대진 가까이서 자주 봤고, 제가 그 사람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창묵은 말하던 도중 무심결에 손을 뻗어 구겨진 재킷 주머니를 몇 번이나 더듬었다.
“담배가, 이런…… 잠깐 사러 갔다 와도 될까요?”
“이거라도 괜찮으시면 드리죠.”
정언이 자기 주머니에 있던 담뱃갑을 밀어 놓자, 창묵이 고맙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까딱였다.
“아, 감사합니다. 불편하지 않으시면 한 대 피우겠습니다.”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문 창묵이 몸을 일으켜 창을 열고는 불을 붙였다. 정언은 창가에 서 잠시 담배를 피우는 그의 손이 심하게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담배가 절반쯤 타들어 갈 때까지 말없이 서 있던 창묵은 근처에 놓인 종이컵 안에 담배를 눌러 끄고는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정언이 묻자 창묵이 머쓱하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아직 안정제를 안 먹어서요.”
안정제라는 말에 정언이 멈칫하는 것을 느꼈는지, 창묵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 일 있고 나서 정신과 오래 다녔습니다.”
그 일이라면 서온건설 게이트를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창묵은 선뜻 말을 시작하지 못했다. 연신 손끝을 만지작거리는가 하면 긴 한숨을 쉬기도 하고, 입을 열려다가도 아니, 하고 중얼거리며 다시 침묵하기를 반복하는 창묵을 보고 있던 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얘기하기 힘드시겠어요?”
“아, 아닙니다. 잠시만요.”
퍼뜩 손사래를 친 창묵이 마침내 결심한 듯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형원이가, 임 기자가 피디님들 얘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그런 친구들 드물다. 자기가 그런 사람들 아주 오랜만에 봤다. 진짜 살아 있는 사람들이다…… 굉장히 칭찬을 많이 했어요. 믿어도 된다. 우리한테 이거 정말 마지막 기회다. 그러면서 설득했죠.”
목소리가 불안한 듯 흔들렸다. 느릿느릿한 말투는 말을 하는 동안 조금씩 빨라졌다. 잠깐 사이를 둔 창묵이 바람 새는 소리로 웃었다.
“저는 솔직히 그 말 안 믿었습니다. 지금도 안 믿어요.”
“그런데 왜 저희 만나 주기로 하신 겁니까?”
정언은 그를 마주 보았다. 얼굴의 윤곽을 굴절시킬 정도로 도수 높은 안경 렌즈 너머로 새까만 눈동자가 일순간 빛을 품었다. 창묵이 천천히 대답했다.
“김윤 피디님이 아까 저한테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한 사람이라도 더 진실을 알게 되면 의미가 있는 것 아니냐.”
정언은 곁에 앉은 윤에게 시선을 주었다. 자신이 한 말을 남의 입으로 듣기가 조금 민망했는지, 윤이 순식간에 빨개진 귀 끝을 만졌다. 창묵이 그런 윤을 흘끗 보더니 픽 웃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어쩌면…… 만에 하나. 이건 제 인생에서 두 번째 도박입니다. 첫 번째가 정치판 들어간 거였고, 전부 다 잃었죠. 제가 아까 김 피디님한테 그랬습니다. 피디님들은 절대 엄대진 못 잡는다고. 솔직히 제가 이 말 한다고 해서 잡을 수 있을까, 그것도 회의적입니다.”
강한 자조를 품은 말투였다. 이 일에 대한 확신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몰려 본 사람이라야 알 수 있는 그 절망감을 정언은 쉽게 가늠하지 못했다.
잠시 말이 없던 창묵이 정언을 응시했다.
“제가 조건 하나 걸겠습니다.”
“뭐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방송 내보내 주십시오. 방송이 안 되면 저도 죽고 피디님들도 죽습니다. 관용어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죽는다는 겁니다. 이번 폭로가 정말 마지막 기회예요.”
문자 그대로의 죽음. 그 말은 먼 동시에 너무나 가까이 있었다. 경고는 끝났다는 걸 정언 역시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이다음이라면, 경고 따위는 없다…… 엄대진은 무조건 결판을 보려고 할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알겠습니다.”
정언이 대답하자 창묵이 몸을 일으켜 자기 노트북을 가져왔다. 메일함을 연 창묵은 정언의 명함에 적힌 메일 주소를 쓰고는 수십 개의 파일을 첨부해 전송했다. 정언의 핸드폰에서 곧 메일 알림창이 떴다. 창묵이 노트북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제가 우선 피디님 메일로 지금 가지고 있는 녹취 파일 전부 보내드렸습니다. 서온건설 게이트 당시에 엄대진하고 엄대진계 의원들이 저한테 혼자 덮어쓰라고 한 내용들입니다. 이건 나중에 확인해 보시고요.”
창묵의 말에 정언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창묵이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썼다.
“마지막 기회, 이 말 지금까지 여러 사람한테 들었습니다. 엄대진하고 서온건설 커넥션 추적하던 사람들 오래 전부터 있었어요. 그런데 전부 다 실패했습니다. 엄대진이 왜 난공불락인지 아십니까?”
창묵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손끝으로 허공에 삼각형을 그려 보였다.
“엄대진한테 정, 경, 언론, 이 세 가지가 완전히 밀착돼 있어요. 정치판 들어왔을 때부터 스타였던 거 다 이유 있습니다. 엄청나게 철저히 기획된 상품이에요. 본인 자신도, 젊을 때부터 아주 노회한 스타일이었죠. 노회한…… 이 말이 딱 붙진 않네요. 요즘 말로 한다면 소시오패스에 더 가까울 수도 있겠습니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담뱃갑으로 손을 가져간 창묵은 담배 한 개비를 다시 꺼냈으나 입에 물지는 않았다. 빈 담배를 떨리는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까딱이며 창묵이 말을 이었다.
“ 변순철 회장은 야심 있는 사람이죠. 그런데 천생 언론인입니다. 무슨 뜻이냐, 자기 손에는 피 묻히기 싫어해요. 뒤에서 조종하는 게 자기 스타일인 겁니다. 내 얼굴에 침 뱉는 소리긴 하지만, 그게 소위 권력 있는 언론인들 마인드잖아요. 펜이 칼보다 강하다, 그 격언을 몸소 실천합니다. 펜을 칼처럼 쓰는 거죠.”
“엄대진은 변순철 회장의 기획작이라는 겁니까?”
정언이 묻자 창묵은 순순히 수긍했다.
“그렇죠. 엄대진 집안이 어떤 집안입니까. 사학 재벌이에요. 명문 사립고 만들어 놓고, 남정건설 끌어들여 간부들 돈으로 배 불리고 일부를 지역 정계에 줄 댔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자연스럽게 커넥션이 생겼어요. 한선당 기반은 TK니까, TK 의원들 통해서 변순철 귀에 엄대진 얘기가 들어갔습니다. 건설업체하고 지역 정계 낀 사학 재벌 후계자, 거기서 멈췄으면 됐는데 변순철이 엄대진을 거기 놔두기엔 아깝다고 생각한 거죠.”
의 박창도 국장과 만나 들었던 이야기가 스쳤다. 이미 오래 전부터 알음알음 퍼져 있던 이 이야기들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은 까닭은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창묵이 담배 끝을 탁자 위에 톡톡 두드렸다.
“TK 출신, 인물 좋고 달변이고 머리가 잘 돌아가고 결정적으로 죄책감이 없고. 완벽하죠. 엄대진 부친 엄중길하고 변순철이 딜을 합니다. 내가 너희 아들 사위로 맞아 대통령 만들겠다. 앞길 막기 전에 재단 싸그리 정리해라. 상대는 회장입니다. 말 안 들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엄대진이 정계 입성하기 직전 부친이 운영하던 정화재단이 모두 정리된 것을 놓고, 민혜가 누구의 작품일까 고민하던 것이 떠올랐다. 창묵의 말을 들어 보니 그건 자신이 조종할 수 있는, 아주 그럴듯한 마네킹을 대신 세우기 위한 변순철의 판단이었던 듯했다.
물론 정언은 그 마네킹이 실은 얼마나 무서운 존재였는지 이제 잘 알고 있었다. 병원에서 생명 유지 장치를 붙인 채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누워 있는 변순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지 불현듯 궁금해졌다.
“엄대진이 재단 정리하면서 남정건설 끼고 수도권으로 진출합니다. 수도권에서 남정건설이 서온건설로 사명 변경하고, 엄대진이 신도시 사업을 죄다 몰아줍니다. 서온건설 성장세가 어마어마해지고, 순식간에 지방 건설사가 한국 톱5 건설사 규모로 올라와요. 확실한 돈줄 쥐려고 밑에서 작업을 먼저 한 거죠. 원래 건설업은 유착 심한 곳인 건 당연히 아실 테고. 서온건설이 제일 강하게 본딩돼 있지만 나머지 건설사들이 깨끗하다, 그런 얘기는 아닙니다.”
창묵이 마른기침을 몇 번 뱉었다. 잠시만요, 하며 냉장고에서 반쯤 마시다 만 생수병을 가져와 한 모금을 마신 창묵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엄대진이 국토위 쪽도 접수하면서 무소불위가 됐죠. 가 엄대진 띄워 주기 위해 몇 년에 걸쳐 총공세 쏟아부었고요. 마르지 않는 자금줄, 당권 장악, 위시한 보수 언론들 가드. 세 박자가 완전히 딱 맞아떨어집니다. 지금은 청와대도 엄대진한테 밉보일까 조심하고 있죠. 힘이 그 정도입니다.”
엄대진은 정치와 대기업과 언론이 만들어 낸 거대한 괴물이었다. 이제 누구도 그 괴물을 통제할 수 없었다. 자신들이 하려는 일은 정말 불가능한 게 아닐까. 정언은 퍼뜩 뇌리를 지난 생각을 바로 떨어 버렸다. 그렇다 한들 이제는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서온건설하고의 관계를, 여러 사람이 남제선이 처음 수도권에 진출하던 시점부터 쭉 조사해 왔어요. 서온건설 게이트 터졌을 때 제일 유력한 증인, 제가 기억하기로는 이름이 윤대석. 이 사람이 소위, 그쪽에서는 짱개라고 불렀죠. 배달부라서.”
“윤대석 씨에 대해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