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48
248화.
창묵은 그 말이 약간 불편하다는 표정으로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속였다기보다는, 뭐 그런 목적이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특히 금액이 어느 정도 하한선이면 기업에서 기부금 명목으로 받아서 세탁하기 굉장히 편리해요.”
동료를 일부러 기만했다는 말이 마음에 걸리는 듯, 창묵은 처음으로 다소 변명 같은 대답을 늘어놓았다.
“어쨌든 아까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서온건설 게이트 뒤집어쓰고 제가 대가로 받은 게 그 계좌 중에 하나였어요. 원래는 기부금 세탁 용도로 쓰던 계좌인데, 사건 터진 이후로 그 용도로는 사용 안 하게 됐습니다. 계좌 내역은 제가 따로 보내드리죠. 제가 수감돼 있는 동안 여기로 매달 생활비가 들어왔습니다. 한 달에 딱 백만 원. 언제 끊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계속 들어오고 있고요. 그게 엄대진하고 저 사이의 딜이었습니다.”
백만 원, 정언은 그 숫자를 입 안으로 되풀이했다. 잘나가던 언론인이자 신인 정치인이 자신의 모든 커리어를 다 무너뜨리고 침묵하는 대가로 받기에 많은 돈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창묵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제가 왜 대화 거절했는지 아시겠습니까?”
정언은 대답 대신 그를 마주 보았다.
“저 가장입니다. 일 끊기고, 동료들이 옛정이 있어서 다시 일하고는 있지만 그 돈 가지고 애들 등록금 내고 생활비 대기엔 빠듯하죠. 백이 아니라 단돈 십만 원도 아쉽습니다. 그거 다 포기한다는 게 쉽지 않아요. 물론 제가 남 탓을 할 일이 아닌 건 압니다. 비겁하다고 생각하시는 것도 이해합니다.”
초면인, 그것도 본인보다 한참 어린 사람들 앞에서 자존심을 구기는 말을 하기가 힘든 듯 창묵은 말하는 내내 몇 번을 주저하는 기색이었다. 창묵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짧게 침묵하던 창묵은 다시 형원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어쨌든 임 기자 집요한 사람입니다. 정보현 의심하기 시작하니까 제가 어쩔 수 없이 그 계좌 던져 준 겁니다. 다른 계좌들도 그 명단에만 올라 있는 발기인들 이름으로 된 계좌입니다. 예전 내역은 살아 있겠지만, 임 기자가 뒤졌어도 최근 자금 흐름은 나오는 게 없었을 겁니다.”
“엄대진에게 어떤 피해도 가지 않게 하기로 약속이 돼 있었습니까?”
“명시적인 약속은 아니죠. 그런데 제가 아니까. 엄대진이 어떤 사람이라는 걸.”
그 말에서 순간적으로 희미한 두려움이 묻어났다.
“임 기자가 정보현에서 안영균으로 가면 당연히 엄대진 나오는 거 아닙니까. 변명 같지만, 지키려면 정보현에 대한 의심을 끊어야 했던 거죠.”
“그런 식으로 어게인라이프 이용할 수 있도록 아이디어 낸 게 누굽니까?”
“정보현입니다.”
창묵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이름을 발음했다.
“초반에는 차명계좌 브로커를 끼고 했었는데, 위험한 일이 한 번 있었던 모양이에요. 브로커가 언론에 엄대진 차명계좌 건을 폭로하겠다고 돈을 요구했답니다.”
“그래서요?”
“그 사람 죽었습니다. 뭐, 정확히는 죽였습니다, 이래야 맞겠네요. 브로커가 엄대진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던 거죠.”
방해가 된다면 무조건 제거하는 건 상대를 불문한 법칙인 모양이었다. 창묵이 말을 이었다.
“그 뒤에 엄대진이 추적 불가능한, 자기하고 무관한 계좌 얻는 방법 생각해 보라고 안영균한테 지시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아이디어는 정보현한테 나왔고요. 그 작업 메인은 정보현이었죠.”
“의심을 덜 받기 위해서?”
“그렇죠. 나중에 걸려도…… 이게 참 재미있어요. 경찰, 검찰이야 그렇다 치고 대중들한테 고정관념이 있어요. 여자는 그렇게 큰일에 끼어들 수 없다. 몇백 억이 왔다 갔다 하는 판입니다. 여자가, 그것도 너무 천사 같은 여자가 명의 도용에 관여하면서 그런 대형 로비의 밑작업을 친다? 대중들은 이거 잘 못 받아들입니다. 언론에서 불쌍하고 순결한 피해자로 프레이밍하면 더 그래요. 엄대진이 그 부분까지 생각해서 정보현한테 이 일 맡겼다고 봐야죠. 만약에 어게인라이프 건이 언론에서 먼저 공개됐다면 이현교 대표한테 다 덮어씌우고 끝냈을 겁니다.”
창묵이 다시 물을 마셨다. 길게 이야기하는 것이 힘든 듯, 소파에 등을 묻은 창묵은 잠깐 기다려 달라는 손짓을 했다. 숨을 고르던 창묵이 곧 입을 열었다.
“어쨌든 정보현으로 이어지면 안 되니까, 제가 절대 아니라고 계속 설득을 했습니다. 차라리 이 계좌 조사해 보라고 이미 죽은 차명계좌 몇 개를 알려 준 거고요. 당시에 엄대진이 어게인라이프 이용해 개설한 차명계좌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정작 발기인들 명의로 된 계좌를 정리할 생각은 안 한 겁니다. 제가 뒤집어쓰는 대가로 꼬박꼬박 생활비 받을 목적으로는 그 계좌가 적격이기도 하고요. 나중에 걸려도 엄대진은 기부금이다, 이래 버리면 그만이니까.”
“엄대진이 뭘 노리고 임 기자님을 공격한 걸까요?”
“, , 그리고 이 공조한다는 걸 이미 알지 않습니까. 임 기자가 비자금 계속 추적해 왔잖아요. 그리스 SO 컴퍼니까지 까발리면서. 그런데 지금 YBS 막는 게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가 이미 터져 버렸으니까.”
창묵의 표정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이 공간에 마치 듣는 귀가 있기라도 한 듯, 창묵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엄대진은 지는 거 못 참는 성격이에요. 하다못해 의원들끼리 술자리에서 게임을 할 때도 암묵적으로 엄대진한테는 무조건 져 주는 걸로 합의가 돼 있을 정도입니다. 안 그러면 어떻게 될지 아니까.”
창묵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긴 숨을 내쉬더니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임 기자 저렇게 만든 겁니다. 죽일 생각이었을 텐데 임 기자가 운 좋게 목숨 부지했다고 봐요. 엄대진 패턴은 대부분 비슷합니다. 먼저 돈이나 권력으로 포섭. 여기서 보통 다 성공하기는 하죠. 그런데 포섭도 안 되고 자기가 막지도 못하면 방법 없습니다. 그냥 죽여야지.”
무감한 단어들은 싸늘했다. 창묵은 소파에 등을 기댔다. 퀭한 얼굴 위로 창백한 형광등 빛이 떨어져, 그렇지 않아도 나쁜 안색이 한층 심각하게 보였다.
“그게 엄대진 방식입니다, 오래 전부터. 제가 서온건설 수도권 진출했을 때부터 엄대진 뒤 캐던 기자들 여럿 있었다고 얘기했죠. 이 사람들 거의 변절했어요. 변절 안 한 사람은 죽었고요. 살해당한 겁니다.”
“그렇게 죽은 기자들이 누구죠?”
정언의 물음에 창묵은 잠깐 기억을 더듬는 듯 사이를 두었다가 대답했다.
“제일 유명한 건 YBS 서현국 기자겠네요.”
YBS 서현국 기자.
메모를 하던 정언은 눈을 들었다.
누구라고?
그 이름이 머릿속에 바로 입력되지 않았다. 일순간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YBS, 서현국, 기자. 방금 창묵이 한 말을 다시 한 번 입 안으로 뇌었으나, 그 이름이 왜 이 자리에서 나오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다이어리 위를 달리던 펜이 중간에서 멈췄다. 그러나 정언은 그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머릿속이 그 찰나에 완전히 지워졌다. 단 한 글자조차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한 윤이 먼저 되물었다.
“방금 누구라고 하셨죠?”
창묵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서현국 기자, 유명하잖아요. YBS 보도국 전설 아닙니까. 백선경, 전한동, 서현국, 최영직. 서현국하고 최영직 알아주는 콤비였죠. 그런데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변절합니다.”
동명이인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YBS 보도국의 전설, 서현국 기자. 백선경, 전한동과 이름을 나란히 할 수 있는, 최영직과 동료였던…… 거대한 광원 앞에 선 것처럼 일순간 시야가 하얗게 바랬다. 펜을 쥔 손이 떨렸다. 분명 자신의 귀로 듣고 있는 이야기였으나 단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충격을 받은 정언의 얼굴을 응시하던 창묵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이 얘기 잘 모르십니까?”
정언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을 긍정이라고 생각한 듯, 창묵이 말을 이었다.
“정치에서 제일 중요한 게 언론 포섭하는 겁니다. 보수 언론이야 문제가 아니었죠. 제일 큰 스피커인 가 있으니까. 그런데 진보 언론이 문제였습니다. 엄대진이 당시에 젊은 피로 이미지메이킹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보 스피커가 반드시 필요했어요. 그 과정에서 제일 먼저 리스트업 된 사람들이 YBS 서현국하고 최영직입니다. 기자들 사이에서는 그때 무슨 언론상 있다, 그러면 아 그거 서현국하고 최영직 거네, 그런 농담 할 정도였으니까.”
엄대진, 진보 스피커, 서현국, 최영직, 리스트업. 단어들이 토막토막 분절해 떠돌았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그때 서온건설이 신도시 사업 모조리 쓸어간 부분에 대해 취재하고 있었어요. 종착점이 어디였겠습니까? 결국 엄대진이에요. 그거 캐다 보면 엄대진이 미리 부지 찍어 놓고 개발 사업 푸시해서 부동산 차익으로 재미 엄청나게 봤다, 여기까지 갈 수밖에 없었단 말입니다. 엄대진이 그거 알고 바로 서현국을 한선당으로 영입하려고 했습니다. 당시에 20억 이상 제시했다는 소문 있었죠. 영입만 된다면 그 돈 이상의 가치를 할 사람이었고요.”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현국은 본래 집 밖의 일을 집 안에서 잘 얘기하지 않는 사람이기는 했다. 하지만 정말 엄대진이라든지, 한선당 영입이라든지, 20억이라든지, 신도시 사업 따위에 대한 건 지나가다 들어 본 기억조차 없었다.
“서현국은 제안 거절했습니다. 엄대진한테 방법 있었겠습니까? 이제 뜨려는 참인데 발목 잡힐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자동차 사고였던 걸로 아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