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5
25화.
순간 정언의 표정이 굳어졌다. 재희는 정언이 가끔 지금처럼 의외로 알기 쉽게 굴 때가 있다는 걸 아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왜 하고 싶은 거냐고. 내가 들어서 이해 가면 승인할게.”
그러나 역시 정언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정언이 팔짱을 끼며 내뱉었다.
“장난해요? 선배가 먼저 까 봐요, 그럼. 이거 못 하게 하는 이유 내가 듣고 이해하면 포기할 테니까.”
“한마디를 안 지냐?”
“선배가 후배한테 꼭 이겨 먹어야 속이 시원해요?”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지,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 재희는 손을 내저었다.
“말을 말자, 말아.”
“말을 말 거면 뭐하려고 왔어요?”
“서 피디.”
재희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정언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재희를 빤히 보았다. 재희는 잠시 갈등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방송국 상황만 이 꼴이 아니라도 이런 아이템을 막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정언이 납득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서 잘 설득하려고 불렀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포기할 생각이라고는 요만큼도 없어 보여 머리가 지끈거렸다. 재희는 손을 깍지 끼어 입가에 대며 낮은 한숨을 쉬었다.
“아직 팩트가 없잖아. 심증만 가지고 증거 찾는 거 시간 많이 필요한 일이야.”
“그걸 누가 몰라요?”
“그런데 우리한테 시간이 없다고.”
단정적으로 뱉은 말에 정언이 멈칫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마음 편할 리 없었다. 그러나 재희의 입장에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애초에 윗선에서 이사진을 교체한 게 를 위시한 시사보도국 전체에 손을 대려는 의도라는 건 거의 명백했다.
그들의 목표는 다음 개편 전까지 어떻게든 를 폐지하는 것이었다. 그건 그 후에 다가올 선거를 대비하기 위한 밑 공작이라는 것을 대부분 짐작하고 있었다.
재희는 몇 달도 채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이 프로그램을 지킬 수 있을지, 만일 지킨다 해도 그게 지금의 모습과 같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최근 재희를 가장 괴롭게 하는 것은 자신이 생각보다 더 무력한 존재라는 사실이었다.
재희는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단순히 과로 자살 같은 케이스라면 얼마든지 시작해도 돼. 한 달이면 하고도 남을 거고. 그런데 서 피디 생각대로 이게 더 큰 건하고 관련이 있다면 내가 하라고 말하기가 힘들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방송도 못 하게 될 수 있는 거야. 무슨 얘긴지 알겠어?”
정언이 대답 대신 컵에 꽂아 놓은 스트로를 휘적거렸다. 휘핑크림이 소용돌이치며 초콜릿 프라페에 섞여 기하학적인 무늬를 그렸다. 그 궤적을 눈으로 따라가던 재희는 정언이 툭 내뱉은 말에 시선을 멈췄다.
“아, 나 이런 거 진짜 완전 싫은데.”
뭐가, 하고 묻는 얼굴로 보자 정언이 머리칼을 흩었다.
“선배가 약한 소리 하는 거 짜증난다고요. 딴 데 가서는 안 그러면서 나한테만 그러는 것도 속 보이고, 선배가 약한 소리 하게 만드는 상황도 열 받고.”
예리한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기실 상대가 정언이 아니라면 이렇게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도 없기는 했다. 다른 팀원들은 자신이 하지 말라고 하면 대개 별말 없이 받아들이곤 했다. 강재희가 하지 말라니 이유가 있겠지, 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정언에게 그런 것은 통하지 않았다. 정언은 본인이 납득하지 못하면 곧 죽어도 아닌 건 아니었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언 앞에서 아쉬운 소리를 자주 하게 되는 건 사실이었다.
물론 정언에게는 자신이 그런 모습을 보여도 된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는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정언이 운을 떼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고, 선배가 나 생각해서 하는 말인 것도 알겠어요. 아, 내 생각 하는 게 아니라 프로그램 생각하는 건가?”
“내가 서 피디 생각 안 하면 누가 하는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던진 말에 정언이 피식 웃고는 곧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나 이거 해야겠는데요.”
“되게 고집이네.”
“내가 꼭 하고 싶은 거 눈치 깠잖아요. 나 선배 못 말리고, 선배도 나 못 말리고. 그러니까 서로 말리지 말자고요, 공평하게.”
정언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상 더 설득하는 건 무의미했다. 재희는 침묵하며 커피 몇 모금을 마셨다. 정언이 팔짱을 끼었다.
“오늘 당장 시작할게요. 리서처 붙여 줘요. 페이 못 나간다고 하면 내가 사비로라도 쓸게. 바로 사이즈 파악 들어갈 거니까 선배는 오케이만 해요.”
“서 피디.”
“오케이만 하라니까요. 말 보태지 말고. 선배 나 못 믿어요?”
재희는 바람 빠지는 소리로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뭐 말만 후배지, 지가 선배야 아주.”
“그러니까 어릴 때 예의 바르게 잘 좀 키우지 그랬어요. 아무한테나 계급장 떼고 붙으라고 가르치니까 기어오르는 거 아냐.”
“그래 놓고 김 피디는 쥐 잡듯 잡지?”
“절대 아니거든요?”
윤의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정언이 발끈했다. 뜻밖의 격렬한 반응에 재미있다는 표정을 한 재희는 정언을 빤히 보았다. 정언이 잔뜩 휘저어 놓은 휘핑크림을 한 스푼 떠먹더니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그 얼굴 뭔데요?”
“김 피디 얘기 하자마자 엄청 예민하네.”
“예민한 사람 본 적 없어요? 이게 예민하게?”
“지금 되게 예민한 거 몰라?”
놀리는 게 뻔한 말투인 걸 모를 리 없었다. 정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말은 잘 듣는 거 같던데.”
넌지시 떠보는 말에 정언이 모호한 표정을 했다. 재희에게는 드물게도 읽기 힘든 얼굴이었다. 무슨 뜻일까, 하고 생각하기 무섭게 그 표정은 곧 사라졌다.
“잘 듣는다고 해야 되나, 그걸.”
정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프라페를 먹다 말고 불현듯 웃는 소리를 냈다. 윤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정언이 누군가를 생각하며 저런 표정을 한다는 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약간 흥미가 생긴 재희는 손끝으로 턱을 받치며 정언을 물끄러미 보았다.
“왜, 뭐가 어떤데.”
“그냥, 뭐.”
“그냥 뭐가 뭐야. 괜찮으면 괜찮은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그만 가죠. 시간 아깝네. 아, 주 피디한테 이번 주 방송부터 박규형 씨 사건 제보 자막 넣어 달라고 얘기 좀 해 줘요.”
공연히 시계를 보고는 말을 돌린 정언이 아직 절반도 넘게 남은 프라페 컵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마실게요, 하고 뒤늦은 인사를 한 정언이 빠른 걸음으로 먼저 카페를 나갔다. 뒤따라 일어난 재희는 흠,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확실히 평소와는 다른 태도였다.
문득 윤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자 윤이 그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한 까닭이 궁금해졌다. 그때는 순간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지만, 까마득한 선배들 앞에서 겁도 없이 끼어들어 그런 말을 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커피를 들고 카페를 나선 재희는 느린 걸음으로 거리를 걸었다. 아직 아이스커피를 마시기에는 쌀쌀한 날씨였으나, 어쩐지 스산하다는 말이 어울릴 살풍경한 거리에서 마시는 차가운 커피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저만치 앞서 작아지는 정언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언이 이 사건을 꼭 취재하고 싶어 한다는 걸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지났다.
다음 순간 재희는 발을 멈췄다.
「팩트 가져오겠습니다. 승인해 주십시오.」
윤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정언은 사적인 부분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타입이었다. 재희는 정언이 이 사건을 방송하고 싶어 하는 것이 어떤 개인적인 사유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만약 그런 게 아니었다면 자신이 까닭을 물었을 때 대답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 정언이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는 후배 앞에서 자기 입으로 이거 꼭 하고 싶다는 말 따위를 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니 어쩌면, 윤 역시 정언의 속내를 알아차렸던 건 아닐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놀랄 만한 일이었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정언을 쉽게 파악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를 거쳐 간 피디들 중, 재희에게 정언과 함께 일하기 어렵다고 토로하는 피디들이 종종 있었다. 정언의 부사수 자리에 들어간 후배들이 특히 더 그랬다. 물론 같은 기간에 다른 팀에서 일하는 것보다 배우는 게 몇 배로 많다는 평은 공통적이었으나, 엄격한 데다 곁을 주지 않는 사수인 정언 밑에서 쉽게 버티는 후배는 거의 없었다.
윤 앞에서 개망신을 줬다며 화를 내던 정언의 얼굴을 떠올린 재희는 쿡 웃었다. 아침부터 기제국에서 자료 가져온 애한테 무안 주지 말라며 편을 드는 모습은 재희에게도 생경한 것이었다.
정언의 기분이 상한 까닭 중 하나는 어쩌면 윤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자 묘한 기분이 되었다. 재희는 차가운 커피를 마시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애가 괜찮으면 괜찮다고 하지, 솔직하질 못해.”
이미 정언의 뒷모습은 방송국 유리문 안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재희는 긴 숨을 뱉으며 고개를 젖혔다. 쏟아질 듯 묵직하게 내려앉은 회색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비행기 한 대가 흰 꼬리를 남기며 하늘을 가로질렀다.
재희는 곧 아무것도 보지 못한 양 시선을 돌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