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52
252화.
왜 말하지 않았을까. 엉망진창이 된 머릿속으로 윤은 가장 먼저 그 질문을 떠올렸다. 서현국 기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정언은 마치 전혀 모르는 사람인 양 넘어가곤 했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냐고 물었을 때도 그냥 평범한 분이었다는 대답만이 돌아왔던 것이 생각났다.
마치 영상을 거꾸로 돌리듯 수많은 기억들이 역순으로 재배치되기 시작했다. 윤의 생각이 멈춘 곳은 처음 희경을 만난 후 모였던 회의실 안이었다. 정언이 꼭 이 사건을 방송하고 싶어 한다고 느꼈기에, 재희에게 겁도 없이 팩트를 가져오겠다고 말했던 그 순간.
그저 막연하던 느낌이었다. 그때는 왜 자신이 그렇게 생각했는지 알지 못했다. 완전히 잊고 있던 기억이 재생된 순간 윤은 그 까닭을 비로소 깨달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마지막 인사조차 없이 떠나보낸 걸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던 정언의 목소리가 뇌리를 지났다. 겪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상실감. 이 사건을 시작했을 때부터 정언이 그 고통을 몇 번이나 다시 반복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차 안에서 죽지 말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던 그 얼굴이 되살아난 건 필연적이었다. 정언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온몸이 떨려 왔다.
“제가, 제가 어릴 때 서현국 기자님하고 만난 적 있었거든요. 저희 집에서 기자님한테 도움 받은 일이 있어서 그거 선배한테 얘기했었는데…… 그 뒤로도 기자님 얘기 몇 번쯤 했었고, 그때 말했을 수도 있는데, 왜…….”
윤은 더듬거리며 두서없는 단어들을 발음했다. 혼란스러움과 무력감이 뒤섞여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런 윤을 물끄러미 보던 재희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서 피디 그거 말하기 싫어해. 서현국 딸이라고 소문나면 사람들이 자기 어떻게 볼지 뻔히 아니까. 회사에서 이거 아는 사람 몇 없어. 우리 팀원들도 모르고.”
서현국 기자의 딸이 아니라, 서정언 피디 본인으로 인정받고 싶었기에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리라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마음은 이성적인 이해 바깥에 존재했다. 조금만 더 기대 줄 수는 없었을까. 자신을 믿어 줄 수는 없었던 걸까. 재희에게 말할 수 있었다면, 왜 자신에게는 말하지 못했을까.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들이 제멋대로 한데 뒤섞였다.
그런 윤의 감정을 알아차렸는지, 재희가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김 피디가 그런 얘기 했으면 더 말하기 힘들었겠지. 서 피디 성격 알잖아. 선 확실한 앤데, 괜히 그렇다고 말했다가 공사 구분 안 될까 싶어 입 다물었을 거야.”
재희의 말이 맞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의례적인 대답조차 떨어지지 않았다. 윤이 침묵하자, 눈썹 위를 몇 번 문지른 재희가 물었다.
“혹시 갈 만한 데 생각 안 나?”
정언에게는 개인적인 삶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재희도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윤은 그 질문으로 재희 역시 막막해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윤이 간신히 고개를 젓자, 재희가 윤의 어깨를 두드렸다.
“일단 김 피디가 집 아니까, 혹시 거기 있는지 한 번 갔다 와 볼래? 내가 이쪽에서 찾아볼 테니까.”
“네.”
재희가 서둘러 옥상을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를 듣고 있던 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정언이 어떤 마음일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가늠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꽉 조여드는 것 같았다.
서둘러 옥상에서 뛰어나온 윤은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왔다. 정언의 집을 향해 달려가는 내내 윤은 계속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통화 목록에 정언의 이름이 수십 번 찍히도록 정언에게서는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허무하게 흩어지는 발신음에 속이 타들어 갔다.
윤은 정언의 오피스텔 앞에 멈춰 숨을 골랐다. 올려다본 창가에는 불이 꺼진 채였다. 바로 지하 주차장으로 뛰어 내려가 그 넓은 주차장을 끝에서 끝까지 몇 번이나 오가며 확인했으나, 정언의 차는 없었다.
근방을 전부 뒤지는 동안 거의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재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 건 그때였다. 윤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서 피디 집에 없어?』
누가 들을까 싶어서인지 잔뜩 낮아진 목소리였다. 윤은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네. 주차장에 차도 없어요.”
『여기서도 본 사람이 없다는데.』
미치겠다, 하고 재희가 중얼거렸다. 잠깐 사이를 둔 재희는 윤에게 말했다.
『사무실로 와. 전 부장님하고 대책 얘기했으니까, 김 피디라도 일단 들어야지.』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윤은 몸을 숙이며 긴 숨을 내쉬었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가로등 빛에 그림자가 멀리 늘어졌다. 도로를 지나치는 자동차 소리나 근처 상가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음악들 따위는 언제나의 일상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그 여상함이 갑자기 낯설어졌다.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 드러난 진실은 지나치게 잔혹했다. 지금까지 익숙했던 모든 세계가 자신을 배신하고 등을 돌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을 애써 상상하자, 무딘 칼날로 심장의 어딘가를 저미는 듯한 아픔이 스며들었다.
윤은 그 자리에 무너지듯 다리를 접어 주저앉았다. 지금 바라는 건 단 하나였다. 제발 정언이 지금 이 순간 혼자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그 모든 고통을 홀로 감당하려 하지 않기를.
윤이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이미 창묵의 인터뷰를 전부 본 듯 팀원들은 몹시 심각한 분위기였다. 윤이 돌아오자 당연히 정언이 함께 올 거라고 생각했는지 문으로 시선을 주었던 예준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 도대체 서 피디는 지금 이 판국에 어딜 간 거야?”
“일이 좀 생겼어.”
재희의 말에 예준이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일? 무슨 일이요?”
“그건 나중에 얘기할게. 일단 지금 방송 어떻게 할지부터 생각하자고.”
재희가 즉시 화제를 돌렸다. 희림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내일 오전에 사장님하고 국장님 들어가시면 는 어떡해요?”
“전 부장님하고 얘기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방송은 사수하신대. 그래도 아직 전 부장님 편이 많아. 지금 반대하는 쪽에서 제작 거부 사태 생길 수도 있어서, 정수창 앵커하고 나머지 기자들이 펑크 대비한 추가 기사 올려놓고 큐시트 2안 짜는 것도 고려중이라고 하고.”
귀를 기울이고 있던 찬수가 흠, 하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면 일단 그쪽은 에 맡겨야겠네.”
“어차피 우리가 거기 간섭할 수도 없잖아요. 전 부장님이 그건 그 팀에서 어떻게든 내보낼 거라고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우리가 문제인 거지.”
“혹시 뉴스 센터 스튜디오 쓰는 건 불가능해요? 세트나 뉴스 스탠바이 시간 때문에 힘든가?”
호형이 끼어들자 재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둘째 치고, 지금 우리가 스튜디오를 쓰면 다른 사람들이 보복 당하게 생겼어.”
정언의 생각으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 말은 선명하게 들렸다. 잠시 멍하니 앉아 있던 윤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재희가 두통이 있는 듯 찌푸린 미간 위를 꽉 눌렀다.
“내가 지금 다른 데 더 부탁을 할 수가 없어. 토요일 자정까지 우리는 일산 센터 포함해서 무조건 모든 시사보도국 배정 스튜디오 사용 금지고, 이거 어기면 부서 책임자한테 중징계 내린다고 위에서 협박했대. 제발 자기들 사정 좀 봐 달라고 하더라고.”
“방송 직전까지 막으면 니들이 뭐 어쩌겠냐 이거예요?”
황당해 죽겠다는 표정을 한 호형이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이거 진짜 돌아 버리겠네.”
“그리고 만에 하나 외주 스튜디오든 렌탈이든 어떻게 구한다 쳐도 지금 방송 자체를 내보내지 말라는데 이건 어떻게 할까 그거지. CP님이 금요일 오후에 편집본 가져와서 시사를 하래. 이사들이 직접 보겠다면서.”
“만약에 우리가 거부하면?”
찬수가 묻자 재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면 심석건 말대로 그냥 특선영화 내보내면 그만이죠.”
“아주 최후의 발악을 하는구만. 벌써 지지율 폭락중인데 우리 막는다고 판 새로 짤 수 있을 것 같은가?”
“뭐라도 해 보고 싶지 않겠어요? 우리도 뭐라도 해 보려고 시작한 거니까.”
재희의 말투는 담담했으나 그 속이 어떨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 자리의 모든 사람이 다 같은 마음일 터였다. 한동안 말이 없던 찬수가 중얼거렸다.
“아, 진짜 스튜디오고 뭐고 당장 방송을 하는 게 난감하네. 최 CP 얘기 이사진들 앞에서 서버에 올린 최종본 시사하라는 거지? 환장하겠다, 정말.”
사무실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상황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최종본으로 시사까지 하겠다는 건 문제가 될 소지는 무조건 제거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하자니 그건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죽을힘을 다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코앞에 목적지를 놓고 그만둘 수는 없었다. 정언이라면 더더욱 이보다 더한 상황이라도 어떻게든 방송을 내보낼 방법을 강구할 게 분명했다.
한동안 생각에 빠져 있던 윤은 입을 열었다.
“방송 안 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재희가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 대답했다. 팀원들의 시선이 윤에게 쏠렸다. 입술 끝을 몇 번 잘근거리던 윤은 재희를 마주 보았다.
“그러면 생방송으로 내보낼 수는 없나요?”
“생방송?”
재희가 되묻자, 찬수가 곁에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김 피디, 생방 들어가 봤어?”
“아뇨.”
물론 그런 적은 없었다. 기껏해야 가 경력의 전부인 윤이 생방송 경험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찬수가 쟤 뭐지, 하는 얼굴로 심각하게 윤을 쳐다보다 말고 고개를 돌려 팀원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우리가 생방 해 본 적이 있나?”
“없죠. 생방할 일이 뭐가 있어, 뉴스도 아니고.”
대꾸한 철진이 어우,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천하의 서정언이라도 생방으로 앉아서 말하라면 그게 될까? 녹화 때 실수 없는 편이긴 한데 녹화랑 생방이랑 압박 오는 게 다르잖아.”
석현이 철진에게 면박을 주었다.
“아니, 압박이 문제가 아니고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갑자기 생방을 어떻게 해.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닌데.”
스튜디오 녹화가 불가능해 영상 종편조차 끝내지 못한 데다 메인인 정언은 사라진 상태였다. 생방송을 하려면 구성안도 다시 짜야 했고, 송출 가능한 스튜디오도 필요했다. 이사진들이 최종본을 확인하겠다고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건 더 문제였다. 사실상 생방송을 하기 위해 준비된 게 하나도 없는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다들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하는 사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을 바닥에 둔 채 손끝으로 입술을 문지르던 재희가 고개를 들었다.
“요새 개인방송 스튜디오 렌탈하는 데도 많던데, 정 안 되면 그런 데라도 빌려 볼까?”
“진짜 하게요?”
철진이 반신반의하며 물었으나 재희는 진지했다.
“고려해 볼 만한 것 같아. 김 피디 생각은 뭐야?”
윤은 마른침을 삼켰다. 성공률이 희박한 작전이었으나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은 아니었다. 재희가 단칼에 안 된다고 자를 수도 있었지만 일단 말은 꺼내 봐야 했다.
“지난번에 서버에서 시보국 최종본 삭제해서 방송 펑크 날 뻔한 적 있다면서요. 저희가 그거 역으로 이용하면 안 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