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54
254화.
“그건 어떻게…….”
깜짝 놀란 윤은 눈을 크게 떴다. 진수가 굳이 그 말에 대답하기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적이며 재차 물었다.
“뭘 어떻게야, 인마. 방송 나갈 수 있어, 없어.”
“당연히 나가야죠.”
단어는 단호했지만 확신이 없었다. 팀원들의 말마따나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닌 탓이었다. 윤을 빤히 마주 보던 진수가 팔짱을 끼었다.
“스튜디오 구했냐? 강재희가 스튜디오 수배중이라고 소문 다 났던데.”
“어떻게든 해 보려고요.”
풀이 죽어 대답하자 진수가 코끝으로 웃는 소리를 냈다.
“뭘 어떻게 할 거야? 시사보도국 배정 스튜디오는 싹 사용 불가라며.”
불난 집에 기름 뿌리는 것도 아니고, 왜 갑자기 불러서는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윤이 진수의 의도를 가늠하기 위해 눈치를 살피는 사이, 진수가 입을 열었다.
“내일 오전에 사장님하고 백선경 국장님 검찰 소환 결정됐다고?”
대답을 기다린 말은 아닌 듯 진수가 휴, 하고 짧은 한숨을 뱉고는 이마를 긁적였다.
“ 스튜디오 쓰게 해 주면 돼?”
“네?”
윤은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맞은편에 앉은 진수의 얼굴은 폭탄 발언을 한 것치고 지나치게 평온했다. 벼락을 맞은 듯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는 윤을 보던 진수가 쯧, 하고 혀를 찼다.
“거기 쓰면 녹화할 수 있냐고 묻잖아.”
“부장님.”
윤이 다급히 진수를 부르자, 뭐라고 한마디도 더 하기 전 진수가 가차 없이 말을 잘랐다.
“아, 사내자식이 왜 이렇게 잔말이 많아. 할 수 있어, 없어?”
“부장님, 그게…….”
“꽃게랑 대게는 알아도 그게는 모른다, 인마. 할 수 있나 없나, 그것만 대답하라고.”
개인방송 스튜디오 수배까지 생각하는 와중에 버젓이 장비가 갖춰진 방송국 스튜디오를 쓰게 해 준다니, 지금 상황에서는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려도 모자랄 판이었다. 하지만 그 제안은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저희한테 스튜디오 내주면 해당 프로그램 관리자한테 징계 간다고 들었는데요.”
“그래서 뭐, 너 관리자야? 관리자는 난데 뭐가 불만이야?”
주저하는 윤을 본 진수가 의자 다리를 툭 걷어찼다.
“너 스튜디오 쓸지 말지도 결정 못 해? 이거 뭐 완전 시다구만. 야, 강재희 지금 있어? 있으면 전화해서 이리 내려오라고 그래.”
“아니, 부장님.”
“늙은이 귀에 대못 박냐? 부장님 소리를 지금 몇 번을 하는 거야? 빨리 전화 안 해?”
진수가 다그치는 통에 윤은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꺼냈다. 머뭇거리다 재희에게 전화를 걸자, 신호가 두어 번 가기도 전에 재희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어, 무슨 일이야?』
“그게, 저…… 잠깐 사무실로 오실 수 있으세요? 최진수 부장님이 얘기할 게 있다고 하시는데요.”
『교양국 최진수 부장님?』
당연히 정언 얘기라고 생각했던 듯했다. 뜬금없는 진수의 이름에 의아하다는 투로 되물은 재희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순순히 대답했다.
『알았어.』
전화가 끊어졌다. 재희가 사무실로 온 건 채 오 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진수가 문을 열어 주자, 재희가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어, 강 피디. 여기 좀 앉아 봐. 아니, 내가 이 새끼 불러서 뭐 좀 물어보는데 시다라 뒤치다꺼리나 하지 지가 뭘 결정을 못 하잖아. 그냥 강 피디한테 물어보는 게 맞는 것 같아서.”
의자를 끌어다 반 강제로 재희를 눌러 앉힌 진수는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사정을 모르는 재희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무슨 일이시죠?”
“스튜디오 못 구한다며. 우리가 스튜디오 쓰게 해 주면 방송할 수 있어?”
서론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진수에게, 재희는 드물게도 당혹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되물었다.
“진심으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럼 내가 다 늙어서 젊은 사람들 불러다 놓고 헛소리할까 봐 그래?”
“저희한테 스튜디오 주는 팀은 무조건 징계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여튼 아주 이타적이야, 응? 프로그램만 이타적인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남 생각부터 열심히 하나?”
헛웃음을 뱉으며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재희를 빤히 보던 진수가 턱을 만지작거렸다.
“강 피디, 지금 본인들 코가 석 자인 거 알아? 남 걱정할 때가 아냐.”
“관계없는 분한테 폐 끼칠 수는 없습니다.”
“같은 YBS 직원인데 왜 관계가 없어? 회사 개판 나고 사장님, 시보국장님 잡혀가게 생겼다는데, 니들은 교양국장 잡혀가는 거 아니니까 손 놓고 구경이나 하라 그거야?”
재희가 선뜻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침묵했다. 그런 재희에게 시선을 두고 있던 진수가 입을 열었다.
“군대 갔다 왔잖아. 군인들 전방에만 배치하나? 전방이 있으면 후방도 있고 보급책도 있고 첩보부대도 있고, 그래야 전쟁이 돌아가는 거 아냐. 시보국이 전방이니까 교양국 같은 후방은 빠져라?”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재희가 서둘러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수가 알겠다는 듯 손을 들어 재희가 더 말하려는 걸 막았다.
“김윤 그렇게 전보당하고 내가 진짜 생각이 엄청 많았다고. 그 뒤로 징계 받은 사람들 보면 솔직히 뭐 이 새끼는 징계라고 할 수도 없는 거긴 한데, 아무튼 내가 그때 얘한테 엄청 뭐라고 그랬어. 왜 입 못 다물고 있냐고. 너 뭔데 남들 다 가만히 있는데 거기 그런 글 썼냐고.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니까 그게 엄청 마음에 걸리더라고. 내가 윗사람으로서 그렇게 얘기한 게 맞나, 내 한 몸 보신하자고 어린놈한테 입 다물라고 한 게 잘한 짓인가.”
시선을 내린 채 손끝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윤은 멈칫하며 진수를 마주 보았다. 진수가 윤의 시선을 외면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공문 검토하고 결정 내린 거야. 시보국에서는 지금 이런 거 못 하잖아. 근데 공문에 뭐라고 돼 있냐, 모든 시사보도국 소속 프로그램 제작 스튜디오 사용 불가. 외주도 불이익 주겠다. 그런데 교양국은 언급 자체가 안 돼 있어. 이 건으로 징계를 내릴 수도 없고, 징계를 내린다고 해도 내가 빠져나갈 부분이 있다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런 부분은 생각조차 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확실히 아까 재희도 시사보도국에 배정된 스튜디오가 사용 금지라고 언급했을 뿐, 다른 곳에 대해서는 말한 적이 없었다. 놀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진수가 웃는 소리를 냈다.
“내가 나이 뭐 공으로 처먹은 줄 아나? 나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하자는 거지. 내가 무슨 정의감이 엄청 있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고. 내가 김윤 이 새끼, 오랜만에 좀 똘똘한 놈 하나 왔구나 싶어서 잘 키워 보려고 끼고 있었는데 일 치고 그리 가 버려서 심란해 죽을 뻔했어.”
진수가 윤에게 슬쩍 시선을 주더니 머쓱한 듯 관자놀이 부근을 긁적거렸다.
“아들 같은 놈 보내 놨더니 길바닥에서 녹화하게 생겼다는데 그걸 그냥 둘 수가 있나. 통박 굴리고 견적 나오니까 하자는 거야. 우리 스튜디오 괜찮아. 장비 교체한 지도 얼마 안 됐고. 시보국에서 하는 건 우리도 다 하니까. 부조 들어갈 스탭 없으면 우리 쪽에서 지원할 수도 있고.”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재희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는 투로 묻자 진수가 손을 휘적였다.
“안 괜찮으면 뭐 어쩌려고? 일이 이쯤 됐으면 시보국에서도 앞일 생각하고 저지르는 건 아니잖아. 안 그래? 내일 없다, 죽어도 오늘 죽는다 마음먹었으니까 스튜디오 구하러 다니겠지.”
그건 사실이었기에 재희와 윤 중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을 생각하던 재희가 결국 알겠습니다, 하고 수긍하자 진수가 코끝을 찡긋거리며 씩 웃었다.
“아이, 그래도 관리자가 좀 낫네. 언제 녹화 딸 건데?”
“생방송 진행할까 하는데요.”
“생방? 생방으로 를 내보낸다고?”
그때까지 느긋하던 진수가 그 말에 자리에서 펄쩍 뛸 기세로 목소리를 높였다. 제풀에 깜짝 놀라 창 너머를 살핀 진수는 이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했다.
“아직 결정된 건 아니고 극비 사항입니다.”
“야, 이거…….”
재희의 말에 뭐라고 얘기하려는 듯 운을 뗐던 진수가 자기 머리를 흩어 놓더니 짧은 한숨을 뱉었다.
“일단 우리 스튜디오가 금요일 촬영 끝나면 주말은 비어서, 내가 추가 촬영 있다고 일요일 새벽까지 스튜디오 키핑해 놨어. 그거 가지고 지지든 볶든 알아서 하라고. 별관 스튜디오라 본관에서 진행하는 것보다는 눈에도 좀 덜 띌 테고.”
“감사합니다.”
“사고 크게 치네. 스케일이 아주…… 남들이 다 , 그러는 이유가 있구만.”
실없이 웃은 진수가 에라 모르겠다, 하며 내뱉었다.
“이왕 칠 거 크게 치라고. 그래야 남들이 다 보지. 시시하게 치면 나만 아파.”
“생방송하자고 한 거 김 피디 생각입니다.”
재희의 말에 진수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윤을 쳐다보더니 기가 찬다는 듯 픽 웃었다. 진수는 윤이 앉은 의자 자리를 툭 걷어찼다.
“강 피디, 얘가 진짜 똑똑하고 괜찮은 놈이야. 가끔 지 맘대로 튀어서 그렇지. 성에 안 찰 거 알지만 잘 좀 봐 줘.”
“아닙니다. 저희 팀에 보내 주셔서 감사하죠.”
“내가 보냈나, 지가 지 발로 간 걸. 얘기 끝났으니까 가 봐. 괜히 시다 불러서 두 번 일했네.”
공연히 투덜거린 진수가 빨리 가라는 손짓을 했다. 나가려던 윤은 뒤를 돌아보았다. 진수가 왜, 하고 내뱉는 얼굴에 윤은 짐짓 진지하게 물었다.
“부장님, 저 보고 싶어서 부르신 거죠?”
“너는 꼭 1절만 하라고 하는데 4절도 모자라서 합창에 제창까지 하더라.”
진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로 쥐어박을 기세라, 윤은 얼른 아니에요, 하고 손을 내젓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진수에게 등을 떠밀려 사무실을 나서기 무섭게 재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 김 피디 덕분에 살았다. 솔직히 진짜 막막했거든. 말이 외부 렌탈이지 거기서 생방송 송출하려면 일이 또 장난 아니잖아. 하루 만에 어떻게 스튜디오 구하고 세팅 들어가고 MD님 설득해야 되나 싶어서 머리 터지는 줄 알았는데, 제일 중요한 거 해결해 줘서 고마워.”
민망해진 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부장님이 빌려 준다고 하신 건데요, 뭐. 전 아무것도 안 했는데…….”
“부장님이 김 피디 생각해서 우리한테 빌려 주신다는 거 아냐. 아무리 봐도 다시 데려가고 싶어 하시는 것 같은데 큰일 났네, 우리도 이제 김 피디 도로 뺏기기 싫은데.”
씩 웃은 재희가 윤의 어깨를 툭 쳤다.
“얼른 들어가.”
열려 있는 비상구로 향한 재희가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소리가 멀게 들렸다.
그 자리에 서 있던 윤은 아직 불이 켜진 사무실에 눈을 주었다. 예전 언젠가, 민혜에게 진수가 교양국으로 자신을 다시 데려갈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정언이 쌀쌀맞게 굴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면서도 결국에는 자신을 걱정하던 정언이었다.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든 가도 된다고.
그런 순간을 떠올리면 정언이 스스로의 감정에 이기적인 법을 모르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곤 했다. 정언의 그 서툴고 인간적인 부분들은 늘 마음을 끌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정언이 어디선가 자신의 고통보다 다른 것을 먼저 생각할까 봐 두려웠다. 윤은 대답 없는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꺼진 액정에 비친 얼굴이 어둡게 잠겨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