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55
255화.
45.
무음으로 돌려놓은 핸드폰의 화면이 다시 한 번 연신 반짝이다 잠잠해졌다. 정언은 거기 눈을 주었다. 김윤, 부재중 통화(38). 굳이 보지 않아도 얼마나 애타게 자신을 찾고 있을지는 뻔했다. 하지만 지금은 윤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영직의 사무실을 뛰쳐나온 정언의 머릿속에 있던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여기와는 무조건 멀어지고 싶었다. 방송국은 한때 아버지가 모든 걸 바쳤고, 자신 역시 남은 삶을 걸겠다고 생각한 곳이었다. 그 열정에 돌아온 보답이 이런 절망감과 배신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주차장에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를 몰고 나왔지만 막상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팀원들의 얼굴을 볼 자신도 없었고, 이럴 때 연락할 만한 사람도 생각나지 않았다. 목적지 없이 한참을 헤매다 멈춘 곳이 한강이었다.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댄 정언은 멍하니 앞창 너머의 풍경을 보았다. 새까맣게 흐르는 한강의 수면 위로 야경의 불빛들이 떨어져 산란했다. 평일 밤의 한강공원은 한적했다. 이따금 산책을 하는 연인들이나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들의 모습이 눈에 띌 뿐이었다.
모든 것이 평소와 똑같았다. 세상은 언제나처럼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돌아가고 있었다. 정언은 불현듯 그 풍경을 멀게 느꼈다. 영원히 깰 수 없는 악몽 속으로 끌려 들어간 기분이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다시는 이 창 너머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정언은 멍한 머릿속으로 기억을 되짚었다. 자신이 취재한 많은 가해자들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감춰지고 묻힌 건 모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라고. 아무도 그걸 끄집어내고 공개할 권리는 없다고. 너희가 모르는 진실이 있고 그게 알려지면 누군가가 또 다치게 된다고.
늘 그런 건 비열한 변명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답을 알 수 없는 물음이 어딘가에서 고개를 들었다. 아빠의 죽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일일까. 내가 모르는 진실이 있는 걸까.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누가 더 다치게 될까.
「너희 아빠가 목숨 걸고 그렇게 취재해서 남은 게 뭐야? 세상이 뭐가 그렇게 달라지고 뭐가 그렇게 더 좋아졌냐고!」
영직의 목소리가 환각처럼 되살아났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정언은 핸들 위로 엎드렸다. 가슴이 답답해 움켜쥔 셔츠 자락이 손안에서 마구 구겨졌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갑자기 운전석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퍼뜩 놀란 정언은 고개를 들었다. 순찰 중이었는지, 젊은 경찰 두 사람이 창 너머에서 이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정언이 문을 반쯤 열자 가까이 있던 경찰이 물었다.
“여기서 뭐하시는 겁니까?”
“네?”
되물은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얼굴이 심하게 좋지 않았는지, 경찰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괜찮으세요? 술 드시거나, 그런 건 아니시죠?”
“네.”
“아까 저희가 순찰 돌다 봤는데, 계속 그러고 계셔서 무슨 일 있는 줄 알고요.”
경찰이 정언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정언은 그제야 자신이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듯한 사람처럼 보였다는 걸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정언의 대답에 약간 안도한 듯한 표정을 한 경찰이 가볍게 경례를 붙이고는 자리를 떴다.
문을 닫은 정언은 헛웃음을 뱉었다. 마치 허술한 부조리극을 연기하는 배우가 된 기분이었다.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리자 창 너머에서 넘실대는 어두운 강물의 결이 망막 위에서 반짝였다. 한동안 거기 눈을 두고 있던 정언은 시동을 걸었다. 여기 계속 있었다가는 정말 무슨 짓이든 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서둘러 한강공원을 빠져나온 정언은 오랫동안 한밤중의 도로를 배회했다. 서울 시내를 정처 없이 떠돌다 결국 차를 멈춘 곳은 신촌 주택가 인근의 작은 빵집 앞이었다.
이미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간판의 조명은 꺼졌지만 아직 가게 안의 불은 켜진 채였다. 오륙 년쯤 전 한 번 바꿔 단 간판은 오래된 가게라고는 생각할 수 없이 산뜻했다.
오월의 나무.
또박또박한 폰트로 적힌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가게 앞의 주차 구역에 차를 세운 정언은 한동안 텅 빈 쇼윈도를 보고 있다가 차에서 내렸다. 보통 저녁이면 대부분의 빵이 모두 팔리기에, 효명이 이 시간까지 가게를 열어 놓는 건 드문 일이었다.
마치 자신이 찾아올 줄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작은 가게의 유리문으로 따뜻한 조명이 흘러나왔다. 정언은 머뭇거리다 가게 문을 열었다. 위쪽에 매달린 작은 풍경이 맑은 소리로 딸랑거렸다.
카운터는 비어 있었다. 풍경 소리에 안쪽의 제빵실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쾌활한 목소리가 먼저 날아들었다.
“어머, 남은 제품 없는데요. 죄송해요.”
“빵은 됐고요, 최효명 여사님 보러 왔습니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꾸하자, 제빵실 안쪽에서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내민 효명이 정언을 보더니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뛰쳐나왔다.
“어머, 어머! 어머, 미쳤어. 너 여기 어떻게 왔어?”
“뭘 어떻게 와, 차 가지고 왔지. 삼촌은? 왜 가게 이 시간까지 열어 놨어?”
무슨 일이 있다는 티를 내기는 싫었다. 부러 평소처럼 물은 말에, 효명이 밀가루가 군데군데 묻은 앞치마를 털며 대답했다.
“오늘 동네 아줌마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대서 거기 갔다 왔어. 삼촌보고 가게 먼저 닫아 놓으라고 하고. 근데 너희 삼촌이 뭐 뒷정리 깔끔하게 하니. 좀 아까 왔는데 아무래도 대충 해 놓고 갔지 싶어서 청소하고 가려고 그랬지.”
만약 가게가 닫혀 있었다면 그냥 돌아갈 생각으로 온 곳이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싸늘한 가운데 그나마 희미한 온기가 돌았다. 정언은 자신이 지금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심장이 뛰는 순간마다 희미한 통증이 전신으로 번지는 것 같았다. 그 고통을 혼자 견디는 것이 두려웠다. 효명이 앞치마를 벗어 카운터 안쪽에 접어 넣고는 정언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그런데 너 얼굴이 왜 그래?”
“얼굴이 왜.”
“무슨 일 있는 사람처럼 그렇잖아. 너 울었어?”
단번에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효명의 말에 가슴 한쪽이 뜨끔했다. 정언은 에이, 하며 시선을 피했다. 말을 돌리는 걸 알아차렸는지 효명이 정언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
“얘, 저녁은 먹었어?”
이 시간까지 안 먹었을 리가 있냐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대답하기도 전 효명이 혀를 찼다.
“안 먹었지? 못 살아, 내가.”
“엄마는?”
어떻게 알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정언이 묻자 효명은 나는 장례식장에서 먹고 왔지, 하고 대답하며 안쪽에 세워 둔 물걸레포로 가게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정언은 얼른 효명의 손에서 자루를 빼앗아 들었다.
“내가 할게.”
“피곤한 애가 뭘 해, 됐어. 올라가 있어. 금방 문 닫고 갈게.”
효명이 정언의 등을 밀어냈으나, 정언은 서둘러 바닥을 밀며 대꾸했다.
“내가 이거 전문가잖아. 오랜만에 좀 해 보자.”
짧은 실랑이가 벌어졌으나, 정언의 고집에 효명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정언과 가게 정리를 마치고 나선 효명은 가게 문을 잠그고 위층의 집으로 연결된 쪽문으로 들어섰다.
계단을 올라 현관을 열자, 아예 집안 전체에 밴 듯한 옅은 빵 냄새가 밀려들었다. 후각은 기억을 가장 오랫동안 간직하는 감각이라고 했던가. 오랜만에 돌아오는 집이었으나 그 냄새는 기억 속에 늘 자리한 그대로였다.
거실의 불을 켠 효명이 정언을 끌어 소파에 앉히더니 뺨을 만졌다.
“얼굴이 왜 이래, 또. 어떻게 된 게 그때 봤을 때보다 더 말랐어?”
“괜찮다니까.”
정언은 서둘러 효명의 손을 밀어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효명이 알게 될까 봐 두려워서였다. 아휴, 하고 들으라는 듯 한숨을 쉰 효명이 정언의 팔을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뼈만 남아서는 아주, 바람 불면 안 날아가니?”
“사람이 그렇게 쉽게 날아가는 줄 알아?”
정언이 손을 내젓자 효명이 갑자기 은근하게 웃었다. 정언은 까닭 없는 불길한 예감에 미간을 좁혔다. 아니나 다를까, 효명이 듣는 사람도 없는데 소곤거렸다.
“저번에 그, 김윤 피디? 그런 남자가 들고 가면 딱 좋겠구만. 키 크지, 몸 좋지, 어깨가 아주…… 너 같은 애는 한 손으로도 들고 가겠더라.”
“아, 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튀어나온 윤의 이름에 목덜미가 확 달아올랐다. 정언이 버럭 소리를 질렀으나, 효명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표정으로 정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너 맨날 남자 만날 시간도 없다고 입에 달고 살잖아. 사내 연애하면 일부러 시간 내서 안 만나도 되고 얼마나 좋아? 그 얼굴로 왜 피디 한다니? 김 피디 몇 살인데? 후배면 너보다 어려?”
“한 번 본 사람 가지고 뭐 어디까지 가려고 그래? 양심 좀 가져, 엄마 딸한테는 너무 과분해 보이지 않아?”
애써 장난스럽게 넘기려 했으나, 윤을 떠올리기 무섭게 주머니에 든 핸드폰의 무게가 몇 톤은 되는 듯 무거워졌다. 대답 없는 자신 때문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게 뻔해 문득 입 안이 말랐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효명은 정언의 말에 심각한 표정을 했다.
“아니, 인물 좋긴 하더라만…… 우리 서 피디가 어디가 어때서?”
“맘에 없는 칭찬 됐고요.”
중간에 말끝을 흐리는 걸 보니 내심 그런 생각을 하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정언이 말을 끊자 효명이 정언의 허벅지 위를 찰싹 때리고는 부엌을 돌아보았다.
“아무튼 올 줄 알았으면 너 좋아하는 거 해 놨을 텐데, 미리 연락 좀 하고 오지. 먹을 게 아무것도 없네.”
“라면 있으면 라면이나 끓여 먹자.”
“무슨 라면이야, 맨날 라면 먹을 거면서.”
효명이 눈을 흘겼다. 대답 대신 웃은 정언은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가서는 찬장을 열었다. 가지런히 열을 맞춰 정리된 라면 두 개를 끄집어낸 정언은 냄비에 물을 올리며 대꾸했다.
“라면 안 먹는다니까. 밖에 나가서 일부러 라면을 왜 사먹어. 삼시 세끼 회사에서 잘 먹고 있어. 간만에 먹고 싶어서 그래.”
“하여튼 그런 것도 지 아빠 닮았어, 저건. 맨날 새벽에 와서 라면 끓여 먹고, 나한테 들키면 간만에 먹고 싶어서 그랬다고 그러고.”
봉지를 뜯던 정언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무심히 한 말이었을 테지만 손이 떨렸다. 정언은 곧 물이 끓기 시작한 냄비 안에 서둘러 면과 가루 수프를 집어넣었다. 익숙한 냄새가 하얗게 올라오는 김에 섞여 온 집 안에 퍼졌다.
허리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효명이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고 수저와 앞접시를 챙겨 식탁에 놓았다. 정언이 식탁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 자리에 앉자, 효명이 수저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물었다.
“너 무슨 일 있지?”
“일은 무슨 일. 얼른 먹어. 맛있겠다.”
정언은 말을 돌리며 앞접시에 라면을 두어 젓가락 덜어 내 먹기 시작했다. 빈속이었지만 허기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사실 무슨 맛인지도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정언이 꾸역꾸역 라면을 먹는 동안, 유심히 정언을 지켜보던 효명이 물었다.
“뉴스 보니까 유동욱 사장하고 시사보도국 국장 검찰에 소환된다 어쩌고 그러던데, 너희는 상관없어?”
“엄마가 신경 안 써도 돼.”
“그럼 누가 신경을 써, 딸 일에.”
정언은 젓가락을 들고 있던 손을 멈췄다. 효명이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뒀다.
“부모도 자식 속 모른다고 암만 그래도 무슨 일 있는지 없는지 그런 건 다 보여.”
“엄마.”
“말하기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