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57
257화.
장례식을 끝내고 돌아오자마자 효명과 정언은 이 상자에 죽기 전 현국이 가지고 있었던 물건들과 평소에 자주 쓰던 물건 따위를 모두 모아 둔 뒤였다. 그래 봐야 상자 하나도 채우지 못할 만큼 단출한 물건들이었다.
어쩐지 그걸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 더는 없다고, 잘 모르겠다고 말하며 영직을 돌려보냈던 것이 떠올랐다.
영직이 그때 찾던 건 뭐였을까.
손끝에서부터 차가운 감각이 전신으로 번졌다. 당연하게도 그때 영직이 가져간 자료들은 하나도 돌려받지 못했다. 그 이후로는 영직에게서 연락이 온 적도 없었다.
만약 최창묵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영직이 그렇게 서둘러 가져간 자료들은 엄대진에 관련된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바를 정에 말씀 언 자 쓰십니까?
그 순간의 공기가 퍼뜩 되살아났다. 뱀처럼 차가운 눈동자와 가늘게 말려 올라가던 입매.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을 비웃으며 그렇게 물었을 엄대진을 생각하자 그 태연함과 지독함에 치가 떨렸다.
이를 악문 정언은 안의 내용물을 바닥으로 쏟아 놓았다. 정언이 가장 먼저 펼쳐 본 것은 현국의 기자수첩이었다. 수첩의 내용은 마치 암호처럼 기록되어 있었다. 어릴 적 몇 번인가 그 수첩을 본 적이 있었지만, 거의 알아볼 수 없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한자와 영어, 일본어 따위를 마구 뒤섞어 쓰는 특유의 기록 방식은 아버지 본인만이 아는 것이었다. 언젠가 왜 그렇게 쓰는 거냐고 물었을 때, 현국은 중요한 내용이라 남들이 알아보면 안 되니까, 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생각하면 늘 이런 위협에 시달린 아버지가 자신만의 기록 방식을 만든 건 당연해 보였다. 수첩 몇 장을 넘겨보던 정언은 그것을 한쪽으로 밀어 두고 스크랩북을 펼쳤다. 현국 자신에 대한 기사가 실릴 때마다 스크랩해 둔 것인 듯했다.
스크랩북을 넘기던 정언은 한곳에서 손을 멈췄다. 오래된 신문 속의 흑백 사진에 나란히 선 두 남자의 얼굴이 박혀 있었다. 하단의 캡션이 선명했다. ‘YBS 시사보도국 사회부 서현국(좌), 최영직(우) 기자’.
정언은 스크랩북을 덮어 버리며 잠시 숨을 골랐다.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참 바닥을 짚은 채 손을 말아 쥐고 있던 정언은 겨우 몸을 추슬렀다. 마치 지독한 감기에 걸린 것처럼 온몸에 오한이 들었다.
선뜻 다른 것들에 손을 댈 생각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바닥에 흩어진 물건들을 눈으로 하나하나 훑어보던 정언은 구형 마이크로카세트 녹음기를 집어 들었다. 작동이 될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오래된 물건이었으나, 보관 상태는 좋아 보였다.
후면의 배터리 넣는 부분을 열어 보자 안은 비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정언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알람시계의 건전지를 빼 녹음기에 넣고는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거의 끝부분까지 감겨 있던 카세트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의정부 지나서, 거기가 지금은 농지입니다. 엄대진이 차명으로 매수를 하고 있어요.』
약간의 노이즈가 있었으나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벼락을 맞은 듯 놀란 정언은 서둘러 녹음기의 볼륨을 올리며 스피커에 귀를 가까이 가져갔다. 다른 남자가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투기입니까?』
현국이었다.
방송국에 입사한 이후, 예전에 현국이 나온 뉴스 영상 같은 것은 내부 데이터베이스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었지만 정언은 일부러라도 절대 그런 것은 찾아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현국의 목소리를 들은 지가 이미 십수 년도 더 전이었으나, 그 한마디를 듣자마자 기억 속에서 현국의 목소리며 표정, 말하면서 손을 움직이는 특유의 버릇까지도 바로 되살아났다.
어릴 적 들었던 젊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그 작은 기계 안에 그대로 살아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대답하는 내용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정언은 녹음기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렇죠. 1, 2년 사이에 신도시 개발 계획 잡을 겁니다. 의정부 지나서, 전방에서 가까운 쪽이니까, 아무래도 사람들이 보수 성향이 강하죠. 지역적으로…… 개발 결정되면 최소한 스무 배 이상, 정말 최소한으로 잡아서. 그 정도 가격 폭등할 건 예측이 됩니다.』
『해당 지역이 부지 선정에 실패할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서온건설 끼고 있잖아요. SOC 몰아주고, 신도시 개발 넣어 주고 리베이트 받고. 그 리베이트 다 한선당으로 들어갑니다. 국토부 한선당이 잡고 있는데 부지 선정이 별겁니까?』
대답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정언은 문득 이 사람이 살아 있을지 궁금해졌다. 신도시 개발 계획이 아직 잡히지 않은 부지, 의정부 지나서…… 엄대진이 진송신도시 부지를 미리 매입했다는 이야기임이 틀림없었다.
언제 녹음된 것인지, 누구와 대화한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으나 그 짧은 대화만으로도 앞뒤 내용을 유추하는 것이 가능했다.
『어, 영직아. 테이프 거의 다 됐네. 잠깐 끊었다 가자.』
현국의 말에 멀리서 네, 하고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영직이었다. 십여 초 정도의 침묵이 지난 뒤 테이프가 모두 돌아가며 찰칵 소리와 함께 재생이 멈췄다.
정언은 녹음기를 내려다보았다. 이건 분명 지금 상황에서 너무나 중요한 자료였다. 그러나 이 안에 담긴 내용을 처음부터 다시 돌려 들을 자신이 없었다.
만약에 진실을 몰랐다면 가능했을까.
그저 사고였다고, 엄마의 말처럼 아빠의 운명은 거기까지였다고 생각하며 살았다면 지금의 이 두려움을 이겨 낼 수 있었을까.
작은 방 안에 내려앉은 침묵 속에서 정언은 눈을 감았다. 단 몇 시간, 창묵을 만나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기꺼이 치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철저한 팩트는 언제나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무기였다. 진실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믿음만이 전부였다. 상상한 적 없는 배신은 더욱 고통스러웠다. 깨져 버린 믿음의 단면은 견고했던 만큼 날카로웠다. 전신을 꿰뚫고 짓누르는 진실의 무게를 더 이상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넋을 잃은 듯 앉아 있던 정언을 퍼뜩 현실로 돌려놓은 건 진동하는 핸드폰 소리였다. 반짝이는 화면에서 윤의 이름이 선명했다. 자정을 넘긴 지 한참이었지만 아직도 잠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죠. 슈퍼맨이 평소에는 클락 켄트라는 이름 쓰면서 신문사 기자로 일하잖아요. 그래서 어린 마음에 그 기자님도 슈퍼맨일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다니까요. 옷도 비슷하게 입고 오셨거든요. 체크무늬 셔츠에 갈색 재킷에 뿔테 안경 있잖아요. 집에 아직 그분 명함도 있어요.」
옥상에 나란히 앉아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대기업을 그만두고 방송국에 들어온 이유에 대해 말하던 윤의 목소리가 뇌리를 지났다. 그때는 그게 아버지 얘기일 거라고는 상상도 한 적이 없었다. 슈퍼맨. 그렇게 말하던 윤의 눈빛은 소년처럼 들떠 있었다.
체크무늬 셔츠, 갈색 재킷, 뿔테 안경. 젊은 아버지의 얼굴이 마치 그린 것처럼 선연하게 되살아났다. 안경 너머의 어쩐지 슬픈 듯한 눈. 정언은 그때 현국이 왜 그런 표정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최근 떠올린 현국의 얼굴은 늘 그랬다.
끊임없이 울리던 핸드폰이 마침내 조용해졌다. 정언은 점멸하던 윤의 이름이 꺼진 액정 아래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새까맣게 잠긴 그 작고 네모난 어둠이 막막했다.
「제가 예전에 선배한테 얘기했었잖아요. 저 어릴 때 저희 집에 YBS 기자님 오신 적 있었다고, 그분 때문에 제가 여기 피디 된 거라고요. 그 기자님이 서현국 기자님이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윤이 지나치듯 한 말이었지만, 윤의 기억 속 그 기자가 아버지였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심장이 덜컥했던 건 사실이었다. 그때 사실은 서현국 기자가 우리 아빠라고 털어놓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서정언 피디가 아니라 서현국 기자의 딸로 생각되는 건 싫었기에, 아버지 이야기를 숨기는 것은 오랜 습관이었다. 윤이 그걸 안다 해서 자신을 다르게 보거나 태도가 달라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게다가 당장 하루 앞의 일도 모르는 판이었다. 자신이 언제, 어떻게 될지 확신하는 건 불가능했다. 때문에 윤과의 연결고리를 하나라도 더 만드는 걸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만에 하나,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남겨질 윤이 조금이라도 더 괜찮을 수 있도록.
혹시, 윤이 그 사실을 알았을까.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머릿속이 싸늘해졌다. 만약 그걸 알았다면 윤이 어떤 심정일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뻔했다.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도 마찬가지였다. 브레이크 호스가 절단된 걸 고작 반나절 숨긴 윤에게 화가 나서 퍼부어 댄 주제에, 이 사실을 지금까지 숨긴 자신을 윤이 이해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긴 한숨을 뱉은 정언은 등을 돌려 벽을 보고 웅크리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눈을 감았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판단할 수가 없었다. 당장 오늘 밤은 그렇다 치고, 그 뒤가 문제였다.
위에서 방송을 막기로 작정했다고 했으니 팀에서도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할 건 당연했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숨이 막혔다. 습관적인 편두통이 밀려들었다. 깨질 듯 아파 오는 머리를 감싼 채 정언은 몸을 더 작게 말았다.
몸은 피곤했으나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선잠이 들었다 다시 깨는 것을 수도 없이 반복하던 정언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몇 시간이나 지났는지, 이미 날이 밝은 듯했다. 창을 가린 암막커튼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었다.
놀란 정언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통은 여전했다. 벽에 걸린 시계는 이미 열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끈거리는 머리 탓에 관자놀이 부근을 꾹 누른 정언은 한참 몸을 숙이고 있다가 겨우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바닥에 둔 핸드폰의 LED 표시등이 연신 깜빡였다.
정언은 핸드폰을 집어 들어 켜 보았다. 윤의 이름 옆 부재중 통화 수는 그사이 더 늘어 있었다. 잠도 안 자고 전화를 걸어 댄 건가 싶어 입이 썼다. 이마를 짚은 정언은 한 손으로 통화 목록을 확인했다.
쭉 늘어선 윤의 이름 사이사이로 간혹 재희가 보였다. 바로 직전에 걸려온 전화는 민혜의 것이었다. 전날 밤부터 연락 두절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정언이 통화 목록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이 다시 전화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윤이었다. 망설이던 정언은 전화를 받았다. 미처 입을 떼기도 전, 통화가 연결된 것을 확인하자마자 윤이 다급하게 물었다.
『선배, 선배 맞죠?』
윤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가슴 한구석이 툭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막 잠에서 깨어 멍한 머릿속이 안개 속을 헤매는 것처럼 답답했다.
충전해 두지 않은 핸드폰에서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는 경고음이 울렸다. 사이를 두고 윤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아무 일 없는 거죠?』
침착하려고 애써 노력하고 있다는 걸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말투였다. 괜찮냐는 말 대신 돌아온 질문에 정언은 겨우 응, 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 대답은 거의 숨소리에 가까웠다. 짧은 정적이 지났다. 머리를 제대로 들 수 없을 정도의 두통에 무릎을 끌어당겨 안은 정언은 이마를 댔다.
『출근하실 수 있어요?』
“……미안.”
중얼거린 말에 윤이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스스로도 명확히 규정할 수가 없었다. 핸드폰을 움켜쥔 손이 떨렸다. 윤이 선배, 하고 정언을 불렀다. 다시 한 번 경고음이 삑삑거렸다.
정언은 하얗게 일어난 입술 위를 깨물었다. 얇은 피부가 이 끝에 걸려 가늘게 벗겨지며 희미한 피 맛이 입 안으로 스몄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