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58
258화.
그것을 깨달은 정언은 숨을 멈췄다. 이보다 더 끔찍하고 더 불행한 일이 넘쳐나는 세상이었다. 지금까지 세상의 그림자만을 쫓아 달려온 주제에 왜 달아나려고 하느냐고, 그 수많은 어둠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성이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풀이할 때마다 심장이 조금씩 차가워졌다.
「선배나 너나, 본인들이 정의감 취해서 죽든 말든 본인 선택이다, 그래. 그거 알겠어. 그런데 너희 엄마는? 엄마 생각은 안 해?」
그렇게 자신을 다그치던 영직이 떠올랐다. 무슨 일만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내 딸이 나보다는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효명의 목소리가 곧 거기 겹쳐졌다. 다음 순간 마치 스위치를 누른 듯 눈물이 터졌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고 자신이 이 자리에 있기에 하는 일이었다. 거기에 개인의 삶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효명이 혼자 남겨질지도 모른다는 건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효명에게 그런 일을 두 번 겪게 할 수는 없었다.
『제 말 들리세요? 선배, 대답 좀 해 보세요. 네?』
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다음 순간 배터리가 방전됐는지 짧은 핸드폰 종료음과 함께 통화가 끊겼다. 정언은 꺼진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다가 손을 떨어뜨렸다. 힘이 풀린 손에서 벗어난 핸드폰이 바닥으로 굴렀다.
견딜 수 없는 두통 탓에 거의 쓰러지듯 바닥에 몸을 만 정언은 눈을 감았다. 정신을 잃은 건지 잠이 든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눈이 떠지는가 싶으면 다시 의식이 잠겨들었다. 전신으로 번지는 오한에 공처럼 웅크린 정언은 가느다란 숨을 내쉬었다.
누군가 멀리서 정언아, 하고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려 애를 쓰자 그 목소리의 잔상은 곧 사라졌다. 환청일까. 눈을 감고 있는데도 현기증이 났다. 먹은 것도 없이 속을 게워 내고 싶은 기분에, 정언은 무의식적으로 가슴 위를 꾹 눌렀다.
의식이 점멸하기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빠르게, 그리고 점점 느리게. 의식이 돌아오는 텀이 점차 길어졌다. 마침내 완전히 의식이 암전됐을 때였다. 빛 한 점 없는 암흑 속을 그저 끝없이 떠도는 듯한 감각은 몽롱했다.
왼쪽과 오른쪽, 위와 아래도 분간할 수 없는 그 절대적인 어둠 속에서는 눈을 뜬 것과 감은 것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아주 깊은 물속에 몸을 맡긴 것처럼 의식이 부유했다.
정언아.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에 어둠의 흐름이 멈췄다. 정언아, 서정언. 그 목소리는 조금 더 또렷해졌다. 아빠. 생각보다 먼저 의식이 미친 말에 정언은 소스라쳤다. 분명 현국이었다.
서정언, 일어나. 학교 가야지. 출근하기 전 늘 그렇게 자신을 깨워 주던 목소리는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했다.
정언아, 눈 떠. 정언아.
어깨를 쥐고 흔드는 손길에 정언은 눈을 번쩍 떴다.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빛에 눈이 시렸다. 아빠, 아빠, 하고 입술을 달싹였으나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막혔던 숨이 한꺼번에 쏟아져 호흡이 가빴다.
“얘, 너 출근 안 했어? 아니 세상에, 열 끓는 거 봐.”
효명의 목소리가 선명했다. 흐릿했던 시야가 다시 초점을 찾기까지는 몇 초가 더 걸렸다. 효명이 바닥에 잔뜩 웅크리고 있던 정언을 끌어다 억지로 침대에 눕히고는 분주하게 이마며 뺨을 짚어 보았다. 정언은 간신히 그 손목을 잡았다.
“엄마.”
하얗게 마른 입술을 달싹이자 효명이 손을 멈추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아니, 나는 새벽에 나가면서 너 출근했을 줄 알았지. 전화를 아무리 해도 안 받아서 혹시나 하고 올라왔더니 여기서 이러고 있었어? 출근 안 했어? 괜찮아?”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오한이 들었다. 그새 몇 시간이 다시 흐른 모양이었다. 혀를 차며 후다닥 나가서 물수건을 가져온 효명이 정언의 얼굴을 닦아 주고는 몸을 받쳐 반쯤 일으켰다. 손에 알약 서너 알과 물컵을 쥐여 준 효명은 어서 먹으라는 손짓을 했다.
“너 열이 펄펄 끓어, 얘. 해열제야. 얼른 먹어. 회사에 전화는 했어?”
정언은 그제야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에 눈을 주었다. 배터리가 다 돼서 꺼진 핸드폰은 새까만 액정을 위로 한 채였다. 효명이 핸드폰을 집어 들어 눌러 보더니 꺼진 것을 알았는지, 거실에서 충전기를 가져다 핸드폰을 꽂아 두고는 서둘러 부엌으로 나갔다.
정언은 스르르 미끄러지듯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부엌에서 효명이 뭐라고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외삼촌에게 하는 듯했다. 텔레비전을 켜는 소리가 나며 익숙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후 뉴스인 것 같았다. 정언은 누운 채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검찰은 이번 주 초 불법 선거자금 제공 의혹으로 검찰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은 이규완 한국선진당 의원에 대해 추가 조사를 실시할 예정입니다. 검찰은 이 의원의 보좌관 김 모 씨에게 현재 구속영장을 발부하였으며, 곧 이 의원에 대한 구속 여부도 결정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규완, 추가 조사, 구속영장…… 몇 개의 단어들이 띄엄띄엄 들어왔다. 그것만으로도 내용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천장에 시선을 둔 채 눈을 깜빡이는 사이 다음 뉴스가 흘러들었다.
『엄대진 한국선진당 후보는 다음 주 초, 최근 불거지고 있는 서온건설 관련 논란에 대해 입을 열 것으로 전망됩니다. 현재 한국선진당에서는 이를 네거티브 정치 공세로 규정하고 법적 대응을 예고했습니다. 그러나 의 보도 이후 지지율은 뚜렷한 하락세로 돌아서고 있습니다. 민권당의 민주영 후보는 이번 주 들어 처음으로 각종 여론조사에서 엄 후보를 오차 범위 바깥으로 앞질렀습니다.』
내가, 우리가, 저 사람을 이길 수 있을까. 멍한 머릿속으로 스미는 의구심은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눈을 감자 눈꺼풀 안으로 엄대진의 얼굴이 선연했다. 자신을 보며 웃던 그 얼굴. 언제나 승리를 확신한다는 듯, 너희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서온건설이 시공한 해당 아파트 주민들의 피해 사례가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서온건설이 작년 환경부에서 사용 금지한 대국시멘트 제품을 그대로 시공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각종 호흡기 질환 및 알레르기, 아토피 증상 등을 호소하는 입주민들이 서온건설 측에 보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해당 유해물질이 영유아들에게 치명적이라는 연구 결과 보도 이후, 서온건설은 아직까지 별다른 해명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아나운서의 멘트 후 흘러나온 것은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저희는 그런 줄 알았으면 절대 이 아파트 안 들어왔죠. 분양할 때는 수입산 친환경 자재만 사용한다, 그러니까 믿고 들어왔는데 애는 계속 아프고, 회사에 아무리 문의해도 원래 너희 애가 예민하고 약해서 그렇다고. 세 살짜리 애가 살이 다 벗겨져요. 어른들도 그러면 못 견딘다고요. 가렵고 아프니까 밤새 잠도 못 자고, 손을 다 싸매 놓는데도 자면서 얼굴을 막 문지르니까 베개에 피가 이렇게…….』
아마 인터뷰에 응한 주민인 듯했다. 울먹이는 말끝이 잠겼다. 어디서나 지나칠 법한 평범한 사람의 얼굴이 그려졌다. 그 목소리에는 분노와 두려움, 억울함이 뒤섞여 있었다. 아무 힘도 없는 사람들, 수천만 인구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 그저 스쳐 가고 나면 잊어버리는 그 사람들 하나하나의 삶을 지켜 줄 수 있는 건 누구일까.
스스로가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두려웠다. 모든 믿음이 사라진 세계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이 고통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효명에게는 더더욱 불가능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서현국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효명만은 마지막까지 그 진실을 몰라야 했다. 진실의 대가가 무엇인지는 이미 정언 자신이 가장 뼈저리게 느낀 탓이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부엌에서 또닥또닥 칼질하는 소리와 무언가 끓는 듯 희미하게 보글거리는 소리가 멀게 들렸다. 떠도는 소리들은 귀로 들어오지 않고 그대로 흘러나갔다. 효명이 누군가와 다시 통화를 하는 듯한 소리가 잠시 들렸으나 착각인 것 같기도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언은 효명이 정언아, 하고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자 쟁반에 죽 한 그릇을 받쳐 들고 온 효명이 침대 위에 쟁반을 내려놓고는 정언을 일으켜 앉혔다. 효명은 다시 정언의 뺨을 만져 보았다.
“열은 조금 내린 것 같기도 한데…… 일단 죽 좀 먹어.”
“입맛 없어.”
“너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고개를 저었으나, 효명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죽을 떠 한 숟갈씩 불어 가며 억지로 입 안에 밀어 넣었다. 강제로라도 몇 숟가락 받아먹고 나니 헛헛했던 속에 조금 온기가 돌았다.
그릇을 반쯤 비운 정언은 더 못 먹겠다고 손을 내저었다. 효명이 한 숟갈만 더 먹어, 하며 재촉했으나 정언이 완강히 거부하자 할 수 없다는 듯 쟁반을 들고 일어섰다.
“일단 가게 내려갔다 올게. 좀 쉬고 있어, 그럼.”
효명이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정언의 얼굴을 물수건으로 다시 한 번 꼼꼼히 닦아 준 효명이 쟁반을 다시 챙겨 들고 방을 나가며 불을 껐다. 어두워진 방 안에서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수없이 쌓인 질문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스튜디오는 어떻게 됐을까. 방송은 나갈 수 있을까. 는 어떻게 되는 걸까. 사장님과 국장님은, 팀원들은…… 윤은. 단 1분도 그냥 흘려보내서는 안 되는데, 자신이 지금 여기 이렇게 누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문득 거실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날카롭게 정언을 현실로 돌려놓았다. 받을 생각이 없었으나 연신 울리는 전화벨은 그칠 기미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정언은 아직도 지끈대는 머리를 흔들며 거실로 나섰다. 수화기를 집어 들자 효명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얘, 손님이 왔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언은 사이를 두었다가 물었다.
“……뭐라고?”
『괜찮으면 잠깐 내려와. 아니면 올라가라고 할게.』
그새 누가 온 건지 수화기 너머로 어서 오세요, 하는 효명의 목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수화기를 내려다보며 서 있던 정언은 미간을 좁혔다. 아픈 걸 빤히 아는데도 손님이 왔다고 부르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욕실에서 대강 세수를 한 정언은 짧은 머리를 당겨 묶었다. 아직 현기증은 가시지 않았으나 아까보다는 훨씬 나은 느낌이었다. 차라리 조금 움직인다면 머릿속이 맑아질지도 몰랐다. 계단을 내려간 정언은 쪽문을 열었다.
초조한 듯 도로 위를 발끝으로 툭툭 차며 서 있던 그림자와 맞닥뜨린 건 다음 순간이었다. 무심코 눈을 든 정언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멈췄다. 상대방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로등의 빛에 드러난 흰 얼굴은 낯이 익었다.
윤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몸이 그대로 굳어 버리는 듯한 감각이 순식간에 전신으로 번졌다. 눈을 깜빡이던 윤이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게 빤한 얼굴로 말했다.
“……어머님한테 전화 드렸거든요. 선배 거기 있냐고, 연락이 안 돼서 걱정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선배가 많이 아프다고 하셔서요. 실례지만 제가 혹시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선배 만날 수 있냐고…… 그랬더니 여기로 오라고 얘기하시더라고요.”
그러나 그 목소리는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아무 단어도 생각나지 않았다. 입술 끝을 깨물며 바닥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내려다보던 윤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저하고 얘기하는 거 불편하세요?”
시선이 바로 맞춰졌다. 입 안이 말랐다. 이 순간이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윤을 보자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규정할 수 없는 감정들이 한데 뒤엉켰다. 가만히 정언을 마주 보던 윤이 입을 열었다.
“하루 종일 제가 무슨 생각했는지 모르실 걸요.”
얼어붙은 듯 서 있는 정언을 향해 윤이 웃었다.
“선배한테 아무 일 없기만 하면 뭐든 다 할 거라고 기도했어요.”
예리하게 심장 위를 스치는 듯한 감각이 지났다. 서늘하고 아릿한 통증. 환각인 것을 알면서도 절로 숨을 멈추게 되는 아픔이었다.
“저 그냥 갈까요?”
윤이 물었다. 정언은 오랫동안 침묵했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아냐.”
윤을 밀어내는 건 자신에게 이미 불가능해진 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