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59
259화.
밤새 전화를 수십 통은 더 걸어 본 것 같았다. 잠을 자려다가도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하며 연락을 시도한 탓에 윤은 한숨도 잠들지 못했다. 뻔히 전화가 오는 걸 알 텐데도 연락을 받지 않으니 속이 완전히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결국 잠들기를 포기한 윤은 날이 밝기 무섭게 출근길에 나섰다. 경찰에 신고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하며 사무실에 들어서자, 벌써부터 자리에 앉아 있던 재희가 윤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서 피디 연락 안 됐어?”
“네.”
“미치겠다, 정말. 이런 적이 없었는데…….”
재희가 이마를 짚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차라리 어디 틀어박혀서 마음 정리라도 하고 있으면 다행인데, 무슨 일 생겼을까 봐 그게 제일 걱정이야. 연락 한 통 없이 이럴 애가 아닌데.”
재희 역시 내내 연락을 시도해 본 듯했다. 말없이 입을 다물고 서 있는 윤을 물끄러미 보던 재희가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김 피디 얼굴 말이 아니네, 아주. 지금 상황이 이러니까 일단 서 피디가 방송을 어떻게 하고, 이런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자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왔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보자.”
네, 하고 대답했으나 그건 그저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한 재희조차도 이런 일을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을 정도라면, 정언이 지금 어떤 상황일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자리에 앉은 윤은 컴퓨터를 켰다. 그러나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바탕화면을 멍하니 보며 넋을 놓고 있던 윤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가방 안에 든 자료들을 꺼냈다. 물론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무실 안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응답 없는 핸드폰에 온 신경이 쏠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팀원들이 속속 출근하기 시작했다.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열 시 반이 넘도록 정언은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쩐지 이대로 정언이 아주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퍼뜩 엄습했다.
재희도 문이 열릴 때마다 퍼뜩 놀라 고개를 드는 걸 보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곧 정언과 민혜를 제외한 모든 팀원이 자리를 채웠다. 짧은 한숨을 뱉은 재희가 곧 표정을 감추며 가볍게 손뼉을 딱 쳐서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다들 왔지? 좋은 얘기 먼저 할게. 스튜디오 구했어.”
“스튜디오를?”
“어디요?”
아침 대신인지 하루견과 봉지를 뜯어 나눠 먹고 있던 찬수와 철진이 거의 동시에 물었다. 재희가 대답했다.
“에서 자기들 스튜디오 쓸 수 있게 해 준대.”
“뭐?”
현진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재희가 턱 끝으로 윤을 가리켰다.
“어젯밤에 거기 최진수 부장님이 나하고 김 피디 불러서 직접 얘기하신 거예요. 우리가 스튜디오 못 구하고 있다는 거 들었다고, 김 피디 봐서 해 주시겠다던데요.”
“아니, 우리는 좋긴 한데 거기 징계 받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런대요?”
아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몸을 앞으로 내민 호형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재희가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공문에 우리한테 못 내주는 거 시보국 배정 스튜디오로 한정돼 있어. 만약에 그 건으로 인사위 회부되면 공문에 명시 안 돼 있었다고 걸 생각이신 것 같던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걸 우리가 덥석 받아도 돼요?”
“나도 계속 사양했는데 부장님이 굉장히 완강하시더라고.”
찬수가 휙 소리가 나게 휘파람을 불었다.
“야, 김 피디 진짜 인재네. 어지간하면 그렇게까진 안 하실 텐데.”
“그때 게시판에 글 안 썼으면 어떻게 할 뻔했어?”
놀림 반, 칭찬 반인 예준의 물음에 윤은 애써 웃었다. 물론 전혀 그럴 기분은 아니었다. 현진이 고개를 뽑아 윤 쪽을 건너다보더니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재희를 보았다.
“그런데 서정언 왜 아직도 출근 안 해? 무슨 일 있어?”
“집에 일이 좀 생겼대요. 작가님, 편집본 어떻게 할지 결정했어요?”
적당히 둘러댄 재희는 즉시 말을 돌렸다. 다행히 현진은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집에 가서 구성안 보고 시청률 순으로 비슷한 아이템 세 개 모았어. 어차피 페이크니까 별도로 내레이션 따거나 할 거 없이 그냥 대충 짜깁기해서 붙이려고.”
“오케이. 그건 임 선배랑 민 피디가 좀 붙어서 봐 줘요.”
재희가 손끝으로 찬수와 철진을 가리키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희는 말을 이었다.
“스튜디오는 우리가 금요일 밤부터 쓸 수 있어.”
“그러면 세팅할 시간은 충분히 되겠다. 그런데 세트 옮기면서 말 안 나가려나?”
석현이 묻는 말에 재희가 대답했다.
“교양국 스튜디오는 별관 건물이라 센터에서 세트 옮기는 동선이 다르대. 새벽에는 이동하는 사람 거의 없어서 잘 모르고. 어젯밤에 미술센터 쪽하고 통화했어.”
“거기 우리 녹화 막힌 거 알아?”
“알지. 화요일에 세트 넣어 놨더니 갑자기 빼라고 오더 내려왔다는데. 아, 무슨 일 생겼구나 그랬다고 하더라고.”
촬영을 잡아 놓은 스튜디오에서 갑자기 불가 통보를 받은 일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땅콩을 으적거리던 찬수가 부정확한 발음으로 물었다.
“세트 넣었다고 불이익 주는 거 아닌가?”
재희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딜을 하긴 했는데 뭐 그쪽이 밑지는 장사죠, 따지고 보면.”
“무슨 딜?”
“이사진 바뀌면서 미술센터 외주 회사로 빼고 간접고용으로 돌렸잖아요. 그거 원래대로 직접고용으로 돌려 달라고 작년부터 미술센터 노조에서 투쟁중이고. 자기들이 확실히 보안 지킬 테니까 대신 에서 이거 한 번 방송해 줄 수 있냐는 거지.”
간밤에 미술센터 쪽과도 이미 이야기를 마쳤을 정도라면 재희도 거의 쉬지 못한 게 분명했다. 피곤한 듯 눈가를 누르는 재희에게 예준이 궁금하다는 얼굴을 했다.
“우리 문 닫는다고 말씀은 드렸어요?”
“영원히 닫을 건 아니잖아, 그러시더라고. 그래서 그건 아니죠, 그런데 우리 맘대로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래도 좋대. 거기도 상황 워낙 안 좋으니까 지푸라기 잡아 보는 거지, 뭐. 방송 전에 절대 말 나가면 안 된다고 하니까 믿을 만한 직원들 보내겠다고 했어.”
턱을 괴고 재희의 말을 듣고 있던 현진이 갑자기 웃는 소리를 냈다.
“야, 재밌네. 위에서는 이런 상황 생각도 안 했을 텐데.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죽으라고 죄다 밟아 놓는 바람에 살 구멍이 생기는 거 진짜 웃기지 않냐? 애초에 김윤 안 보냈으면 엄대진 뒤 안 캤을 수도 있고, 방송도 안 했을 거고, 교양국에서 스튜디오도 안 빌려 줬을 텐데. 미술센터도 가만히 잘 있던 애들 돈 아낀다고 외주로 돌려서 우리 도와주게 만들고.”
그러니까, 하고 찬수가 맞장구를 쳤다. 재희가 피식 웃었다.
“죽으란 법은 없잖아요. 세트는 미안한데 주 피디가 우 피디랑 같이 좀 봐 줘.”
“알겠습니다.”
예준이 대답하자, 재희가 오케이 사인을 만들어 보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일단 대본 수정할 때까지 스탠바이. 대본 수정 끝나고 추가분 있으면 바로 편집하고 점검하는 걸로 하자고.”
그때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윤은 재희가 순간 멈칫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선 건 민혜였다. 곱슬곱슬하게 말아 놓은 머리가 사방으로 흩날리는 걸 보니 어지간히 급히 달려온 모양이었다.
“아우, 미안해. 늦었네.”
주말에 아이가 아파 입원했다며 며칠을 출근하지 못했던 민혜였다. 재희가 물었다.
“어, 송 작가. 애는 좀 어때?”
숨을 몰아쉬며 의자에 풀썩 주저앉은 민혜가 말도 말라는 듯 양팔을 휘적거렸다.
“말도 마. 아주 전쟁이었어, 전쟁. 는 계속 나가지, 나는 속이 바짝바짝 타지, 애가 열은 안 떨어지지…… 그저께 애가 병원 싫은지 계속 울어서 퇴원하면 안 되겠냐 애원하니까 열 오르면 바로 다시 데려오래. 퇴원시켜서 집에 눕혀 놓고 열 오르나 안 오르나 그것만 감시하고 있었다는 거 아냐.”
“애는 누가 보고, 그럼.”
“어제까진 친정 엄마가 와서 봐주시고 오늘 아침에는 시어머니. 눈치를 얼마나 주시는지 말도 못 한다, 진짜.”
민혜가 진저리를 치자 호형이 안쓰럽다는 얼굴로 말을 보탰다.
“며느리가 구국의 작가라고 말이라도 해 보시지 왜요.”
민혜는 그 말에 코웃음을 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구국의 작가는 무슨. 우리 시어머니가 엄대진이라면 껌뻑 돌아가셔, 아주. 내가 이러고 있는 거 알면 뒷목 잡고 넘어가실걸. 아침부터 뉴스 보면서 YBS 욕을 쉬지도 않고 하시는데, 누가 보면 우리가 부모 원수인 줄 알겠더라니까.”
“운명의 장난이네. 엄대진 이거 아주 고부 사이를 갈라놓고 말야.”
재희가 짐짓 얼굴을 찌푸리자 민혜가 아이 그러니까, 하고 투덜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니, 근데 정언 어디 갔어? 왜 안 보여?”
“집에 일이 좀 생겼대. 일단…….”
재희가 다시 화제를 돌리려 했으나 민혜는 들은 척도 않고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 어머니 어디 안 좋으셔? 열이 40도까지 끓어도 출근을 하던 애가 안 온 거 보면 뭐 심각한가 본데?”
“나중에 얘기할게.”
황급히 말을 막은 재희는 얼른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내가 주조랑 얘기는 해 봐야 되는데, 토요일에 생방 가는 걸로 일단 알고 있어. 스튜디오는 확보했고.”
이상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민혜가 잘못 들었나 싶었는지 귓가를 긁적이며 되물었다.
“강 피디 지금 뭐라고 그랬니? 생방이라고? 내가 뭐 잘못 들었나?”
“아냐, 아주 잘 들었어. 생방이라고 한 거 맞아. 그리고 내 간 얘기하지 마. 이거 내 아이디어 아니고 김 피디 아이디어니까.”
동그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민혜는 곁에 앉은 윤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어머머, 미쳤어. 생방 해 봤어요?”
윤이 아뇨, 하고 고개를 젓자 민혜가 윤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어머, 세상에.”
어쩐지 너 처음부터 이런 사고 한 번 칠 줄 알았다, 라고 이마에 써 붙인 표정이었다. 재희가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튕겨 민혜의 주의를 다시 자신에게 돌려놓았다.
“아무튼 일이 그렇게 됐고, 최창묵 인터뷰 새로 따온 거 있으니까 그거 보고 추가할 내용 추가해서 생방용으로 나랑 김 피디랑 송 작가 셋이서 수정 좀 하자고.”
“알았어.”
민혜가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그때 핸드폰을 보고 있던 호형이 고개를 들었다.
“사장님이랑 국장님 지금 검찰 출석하셨나 봐요.”
“몇 시간이나 붙들려 계시려나?”
석현이 걱정스러운 듯 중얼거린 말에 재희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오늘 시작할 때까지는 붙잡아 놔야 의미가 있겠지. 그러면 최소한 13시간, 14시간 이상. 그 새끼들 전적 생각하면 20시간 이상 잡아 두려고 할 수도 있고.”
“장난 아니네.”
혀를 내두르는 석현에게 재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서로 장난할 시간 없다 그거지. 우리도 시작합시다. 나 주조 가 볼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주고.”
손으로 전화하는 모션을 만들어 보인 재희가 일부러 윤 뒤로 돌아 나가며 살짝 어깨를 짚었다. 정언에게 연락이 온다면 얘기해 달라는 뜻일 터였다. 정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 리 없는 민혜는 코끝을 긁적이며 책상 위에 놓인 자료들을 뒤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