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6
26화.
06.
정언은 세면대에 비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숙직실에서 새벽에 두세 시간 겨우 눈을 붙인 뒤 잠을 깨기 위해 씻고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는 생활을 일주일째 유지했더니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며칠 내내 눈알이 빠지게 산더미처럼 쌓인 자료들을 검토하는 중이었다. 국토부 자료, 서온건설 공시 자료와 주가 변동표는 물론이고 진송신도시와 관련된 모든 기사까지 포함된 몇 년 치 자료를 체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나마 기사라든가 통계 자료의 경우는 리서처인 영인이 아르바이트생들과 함께 먼저 팩트 체크를 거친 뒤 넘겨줬지만, 그것들만 읽어 보기에도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한 판이었다.
지난주 방송에서 진송신도시 사망 사건 제보 요청 자막을 띄우기 시작한 뒤로 제보도 상당수 들어오고 있었다. 제보 내용을 판별하는 것은 민혜의 몫이었다. 민혜 역시 제보 메일이나 전화를 받아 보고 팩트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데만 하루의 대부분을 쓰는 중이었다.
그사이 자료를 보며 잡아 둔 전문가들과의 자문 미팅과 취재 스케줄을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꼽아 보던 정언은 세면대를 잡은 채 고개를 숙였다. 골이 앞으로 죄다 쏟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늘은 오전에 윤과 함께 진송신도시 개발 현장에 나가 볼 예정이었다. 때문에 조금이라도 눈을 붙였어야 하는데, 자료를 파악하는 데만도 시간이 한참 걸리는 탓에 거의 밤을 새운 채라 내심 걱정이 되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정언은 제일 먼저 책상 위에 둔 커피를 마셨다. 믹스 커피 세 봉지를 뜯어 넣은 컵은 이미 차게 식은 지 오래였다. 감각이 둔해져 무슨 맛인지도 알 수 없었으나 일단 카페인이 들어가자 순간적으로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의자에 기대 있던 정언은 선배,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제 집에 안 들어가셨어요?”
윤이었다. 언제 출근한 걸까. 정언은 멍한 머릿속으로 윤을 쳐다보았다. 며칠 내내 같이 밤샘을 하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어제저녁에는 윤을 일찍 들여보냈던 것이 떠올랐다.
잠깐 눈만 감고 있었던 줄 알았는데, 시계를 흘끗 보자 아무래도 앉은 채로 삼십 분도 넘게 잠들었던 듯했다. 정언은 자세를 조금 고쳐 앉았다.
“왔어?”
“좀 쉬면서 하시죠. 그러다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던 윤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아무 생각 없이 윤을 보던 정언은 다음 순간 한쪽 뺨을 감싸 오는 손길에 멈칫했다. 따뜻한 손이었다.
지금 뭐하는 거지, 하고 생각하기 무섭게 윤이 책상 위에서 재빨리 티슈 몇 장을 뽑아 정언의 코 밑을 눌렀다. 무심코 시선을 내리자 티슈로 순식간에 새빨간 점이 번졌다. 정언은 그제야 자신이 코피를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괜찮으세요?”
윤이 몸을 숙이게 하며 물었다. 정언은 대답 대신 미간을 찌푸리며 티슈로 코를 막았다. 한동안 이런 적이 없었는데, 요 며칠 무리했더니 바로 반응이 온 모양이었다. 코 위쪽을 꽉 눌러 지혈하던 정언은 문득 아래로 시선을 주었다. 곁에 바짝 붙어 들여다보는 윤의 그림자가 바닥 위로 드리워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쩐지 창피한 기분이 된 정언은 책상 위의 물티슈를 뽑아 코 밑을 닦았다. 새빨간 핏물이 물티슈 조직 사이사이로 번지며 비릿한 쇠 냄새가 짧게 스쳤다. 다행히 피는 더 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더 그 부근을 닦은 정언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리를 떴던 윤이 곧 찬물 한 잔을 가지고 돌아왔다.
“좀 드세요.”
입 안이 온통 비릿하던 차였다. 눈치 빠른 윤이 좀 고마워졌다. 땡큐, 하고 중얼거리며 물을 한 모금 마시자 정신이 났다. 그렇지 않아도 피곤해서 까끌거리는 혀 위로 희석된 비릿함이 뒤엉켰다. 썩 유쾌한 감각은 아니었다.
남은 물을 마저 다 마신 정언은 미간을 누르다 다시 한 번 시계를 보았다. 슬슬 출발해야 할 시간이었다. 정언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을 돌렸다.
“준비되면 바로 내려가자. 보이스리코더 있으면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난 정언은 캐비닛을 열어 카메라를 꺼냈다. 그러곤 초소형 카메라 촬영용으로 작은 구멍을 뚫은 백에 익숙하게 자리를 맞춰 카메라를 고정시켰다. 책상 위에 놓인 펜 형태의 보이스리코더를 포켓에 꽂은 정언은 차 키를 집어 들려고 손을 뻗었다.
다음 순간 캠 가방을 챙겨 어깨에 둘러멘 윤이 바로 정언을 막았다. 놀란 정언은 고개를 들어 윤을 쳐다보았다.
“뭐야?”
“어, 죄송해요. 운전하시려는 거 같아서요.”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는지, 윤이 제풀에 놀란 표정으로 황급히 사과했다. 정언은 눈썹을 좁히며 되물었다.
“운전 안 하면 어떻게 갈 건데?”
“제가 하려고요.”
뜻밖의 대답이었다. 멈칫한 정언은 내심 당황했다. 선배들과 취재를 나갈 때면 늘 정언이 운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피곤해 보인다고 해서 딱히 정언을 배려해 주는 선배들은 거의 없었다.
선배들 앞에서 괜히 피곤하다는 소리를 꺼냈다가 똑같이 밤샘하고 똑같이 힘든데 여자라서 남이 운전하는 차에 타고 다닐 생각 하냐고 빈정대는 소리는 죽어도 듣기 싫었다.
정언에게 운전을 안 시키는 선배는 재희가 유일했다. 그러나 정언은 재희 앞에서 풀어지는 것이 싫어 운전을 자청하는 일이 많았다. 때문에 운전은 언제나 정언의 몫이었다.
자신이 선배가 된 뒤에도 그건 달라지지 않았다. 선배들하고 똑같은 인간이 되고 싶지도 않았고, 선배 대접 받겠다고 후배들한테 운전기사 시키는 건 영 취향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후배들은 그런 호의를 쉽게 받아들였다. 물론 정언의 앞에서 싫다는 말을 할 만한 강심장도 드물었다. 그러다 보니 먼저 자기가 운전하겠다고 나선 건 윤이 처음이었다.
“왜, 밤샘하고 코피까지 쏟는 인간이 운전하면 목숨이 위험할까 봐?”
정언은 말을 뱉은 즉시 후회했다. 이럴 때는 그냥 고맙다고 말해도 될 텐데, 하는 생각이 뒤이어 따라왔다. 윤이 대답 대신 웃고는 먼저 사무실을 나섰다.
윤을 따라 주차장으로 가는 내내 정언은 왠지 어색한 기분에 엘리베이터의 반대쪽 벽만 쳐다보았다. 주차장에 세워 둔 자기 차에 시동을 건 윤이 먼저 뛰어가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이렇게까지 매너 좋을 필요가 있나, 속으로 생각한 정언은 마지못해 서둘러 차에 타며 안전벨트를 채웠다. 윤이 문을 닫아 주고는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흘끔 둘러본 차 안은 지나칠 정도로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백미러에 달아 둔 방향제에서는 섬유유연제 향 같은 것이 났다. 외관에도 먼지 하나 없었던 걸 떠올리면 늘 세심하게 관리한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정언은 혼자 픽 웃었다. 세차는 몇 달에 한 번이나 할까 말까에, 운전석 말고는 사람 탈 자리도 없이 난장판인 많은 팀원들의 차를 떠올린 까닭이었다. 이런 애가 이 팀에 어떻게 굴러오게 된 건지 다시 한 번 궁금해졌다.
윤이 내비게이션에 진송신도시 주소를 입력했다. 꼿꼿하게 앉아 있던 정언은 무의식중에 윤의 손끝으로 시선을 주었다. 흰 부분이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짧게 손질된 단정한 손톱에 마디 없이 긴 손가락은 마치 그린 것처럼 보였다.
손도 예쁘네, 하고 무심코 생각하던 정언은 다음 순간 윤이 갑자기 이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바람에 소스라쳤다. 뭐하는 거냐고 물으려는데, 윤이 그럴 기회도 주지 않고 자연스럽게 시트를 뒤로 젖혔다.
무방비 상태로 몸이 따라 넘어갔다. 미처 당황하지도 못했는데 먼저 시트에 등이 파묻혔다. 이게 뭔지 깨닫기도 전, 당혹스러움과 낯선 민망함이 뒤섞였다. 내려다보는 윤의 눈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귀 끝이 삽시간에 뜨거워졌다.
이게 뭔가 싶어 순간적으로 사고가 정지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윤은 곧바로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사람을 이렇게 당황시킨 것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깔끔한 태도였다. 윤이 액셀을 밟으며 여상하게 말했다.
“말 안 하면 안 주무실 것 같아서요. 한 시간은 걸릴 텐데 눈 좀 붙이세요.”
남자가, 더구나 후배가 이런 식으로 구는 건 처음이었다. 배려라고 하자니 기습적이고, 건방지다고 하자니 세심했다. 눈치를 보는 게 지나치다기에는 이런 태도가 아예 몸에 배어 있는 느낌이었다. 신경이 미묘하게 당겨졌다. 까닭을 알 수 없는 감각이었다.
주차장을 나서자마자 아침 햇빛이 쏟아졌다. 눈이 부시다고 느끼기 무섭게, 윤이 마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손을 뻗어 조수석의 선바이저를 내려 주었다. 매번 이런 식으로 뭔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면 윤이 귀신처럼 알아채는 건 왜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뭐라고 말하려던 정언은 곧 포기하고 눈가를 두어 번 문질렀다. 머리가 둔해져 계속 생각하는 일조차 피곤했다. 시트에 비스듬히 기대 있던 정언은 눈을 감았다. 남이 운전하는데 옆자리에서 자는 건 매너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눈꺼풀이 추를 단 듯 무거웠다. 잠깐 눈이라도 감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선배, 선배. 괜찮으세요?”
얼마나 지났을까, 퍼뜩 정신이 돌아온 건 윤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였다. 기억도 하지 못한 새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거의 기절하는 수준으로 깜빡 정신을 놓았던 듯했다. 정언은 고개를 두어 번 흔들며 시트 레버를 당겨 바로 앉았다.
대시보드의 시계에 뜬 숫자를 눈으로 읽었으나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몇 초 정도 시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정언은 미간을 문질렀다. 출발한 지 한 시간 반 정도가 지난 뒤였다. 평소였다면 한 시간 좀 못 걸릴 거리였다. 차는 진송신도시 입구 부근의 빈 도로변에 세워져 있었다.
잠시 정언을 지켜보던 윤이 먼저 말했다.
“차가 좀 막혔어요. 어디 아프신 거 아니죠?”
“……응.”
이 정도로 긴장이 풀리는 건 거의 없는 일이었다. 나이를 먹긴 먹는 건가, 속으로 중얼거린 정언은 차에서 내리려다 말고 윤에게 말했다.
“고생시켜서 미안하네.”
진심이기는 했지만, 자주 하던 말이 아니라 그런지 영 어색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윤이 웃었다.
“에이,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하고 되물으려던 정언은 입을 다물었다. 공연히 또 윤을 트집 잡는 꼴이 될까 싶어서였다. 그러자마자 저도 모르게 윤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분명히 윤이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지금은 반대가 된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