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61
261화.
“그래요? 아예 까고 가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하나 보네. 우리 입장에선 뭐 그럼 좋지. 최창묵 누구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신원 까고 말하면 증거가 좀 부족해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쉬우니까.”
차라리 잘됐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민혜가 윤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정언 없으니까 우리 둘이 우선 봐요. 구성안 볼 줄은 알잖아.”
회의실로 윤을 부른 민혜는 맞은편에 앉았다. 추가된 인터뷰로 구성안을 새로 짠 민혜가 윤에게 수정 사항을 설명했다. 추가 배치를 논의하는 일이 적당히 마무리되자, 민혜는 윤에게 내레이션을 직접 읽어 보게 했다.
한 멘트를 몇 번이나 다시 읽히며 계속해서 수정하는 통에 나중에는 입이 마를 지경이었다. 결국 윤이 잠시 휴식을 요청하고 물을 마시는 사이, 민혜가 턱을 괴고 그런 윤을 보다 물었다.
“김 피디 딕션 굉장히 좋네? 어디서 배웠어요?”
“아, 언시 준비하면서 잠깐…… 스터디 들어갔을 때 기자나 아나운서 생각해 보라고 해서 조금 배웠어요.”
생각지도 못한 칭찬에 당황하며 대답하자 민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왜 안 했어요? 내가 다 아깝다. 정언 다음으로 이런 사람 처음 보는데.”
“그래요?”
“정언도 입봉 때부터 딕션 완전 칼이었거든요. 강 피디가 혹독하게 시키긴 했는데 본인도 아나운서들 하는 만큼 엄청 연습했다고 그러더라고. 걔가 뭐든 적당히 하는 법이 없잖아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민혜가 웃었다. 애써 따라 웃기는 했으나 머릿속이 복잡했다. 민혜의 말대로 뭐든 적당한 게 없는 정언이었다. 얼마나 혹독하게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선뜩했다.
간신히 첫 번째 수정을 마치자 이미 몇 시간은 훌쩍 지난 뒤였다. 민혜가 마지막 클로징 멘트 자리를 펜 끝으로 톡톡 치며 턱을 괴었다.
“이 자리는 원래 담당 피디가 직접 쓰는데, 정언이 와야 쓰지. 뭐 방송 전에는 오겠지만…… 혹시 어머님이 많이 아프신가? 전화가 안 돼서 물어볼 수도 없고. 가게는 열었나 모르겠네.”
민혜의 혼잣말에 퍼뜩 지난번 정언의 어머니가 회사에 찾아왔던 일이 떠올랐다. 선물용 쿠키 상자 수십 개를 들고 와 나눠 주는 사이, 희림이 지나치듯 정언의 어머니가 하는 빵집이 유명하다는 얘기를 하던 것이 뒤이어 생각났다.
오월의 나무. 박스 겉에 쓰여 있던 또박또박한 글자를 기억해 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윤은 전화 좀 하고 올게요, 하며 바로 사무실을 나왔다. 비상구 계단에서 서둘러 핸드폰으로 ‘오월의 나무’를 검색하자, 가장 상단에 바로 가게 이름과 위치, 메뉴, 지도, 전화번호 따위가 떴다.
마르는 입술을 물었다 놓은 윤은 전화를 연결했다. 신호음이 두어 번 가기도 전에 바로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네, 오월의 나무입니다.』
중년 여인의 목소리였다. 짧은 만남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으나, 그날 만났던 정언의 어머니인 것 같았다. 윤은 숨을 고르며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안녕하세요. 서정언 선배 어머님 되시나요?”
『어머, 네. 누구시죠?』
가게 전화로 정언에 대해 물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 바로 상대방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약간 불안한 기색이 섞인 말투에, 윤은 얼른 대답했다.
“선배하고 같이 일하는 김윤 피디입니다. 지난번에 뵈었는데 혹시 기억하세요?”
이름을 말하자 놀란 투로 건너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 그럼요! 당연히 기억하죠. 그런데 무슨 일로…….』
“저, 선배가 오늘 출근을 안 했거든요. 실례인 줄 아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혹시 본가에 들렀는지 여쭤보려고 연락드렸습니다. 어디 많이 아픈 건지 걱정되는데 통화가 안 돼서요.”
『정언이가 회사를 안 나갔다고요?』
당황해서 되묻더니 잠깐 어머, 어머, 하고 혼자 중얼거리던 정언의 어머니가 윤에게 서둘러 변명하듯 말했다.
『어젯밤에 여기 와서 잤는데, 아파서 그랬나? 어머, 세상에. 내가 일찍 나와서 애가 당연히 일어나서 출근한 줄 알았어요.』
“아, 어젯밤에…….”
그 말에 긴장했던 속이 조금 느슨해졌다. 정언이 혼자 있었을까 봐 걱정했는데, 그래도 가장 안심할 만한 곳에 있었던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윤은 안도의 한숨을 뱉으며 가슴 위를 눌렀다. 어머니의 말이 넘어왔다.
『네. 늦게 왔더라고요, 열두 시 다 돼서. 그런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다 하긴 했어요. 연락해 보고 다시 전화할게요. 번호 좀 불러 줄래요?』
윤은 자기 핸드폰 번호를 두 번 반복해서 불러 주었다. 금방 전화할게요, 하고 전화가 끊어졌다. 윤은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핸드폰을 쥔 손이 차갑게 젖어들었다.
다시 전화가 걸려 온 건 이십 분쯤 지나서였다. 진동이 울리기 시작한 순간 전화를 받자, 아휴, 하는 한숨이 먼저 들렸다.
『정언이 엄마예요. 정언이 집에 있네요. 어지간하면 그러는 애가 아닌데, 많이 아파서 연락도 못 하고 결근한 것 같아요. 어떡하죠?』
“많이 안 좋습니까?”
『열이 심하게 나서요. 애가 워낙 잘 먹지도 않고 그러더니 기어이 탈이 났나 봐요.』
어머니에게는 이유를 말하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열이 심하게 난다는 말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아유, 미안해요. 많이 걱정했겠네요.』
“……죄송합니다. 실례인 거 아는데, 제가 잠깐 선배 보러 가도 괜찮을까요? 걱정돼서요.”
그렇게 물은 건 충동적이었다. 한 번 본 게 고작인 직장 동료가 아픈 딸을 보러 오겠다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가만히 정언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놀란 듯 잠깐 정적이 흘렀으나, 대답은 의외로 쉽게 돌아왔다.
『정언이한테 얘기해 놓을게요. 여기 온다는 거죠? 주소는 알고요?』
“네. 바로 가겠습니다.”
『그래요.』
전화를 끊기 무섭게 사무실로 돌아온 윤은 민혜에게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하고 말하고는 차 키를 집어 들었다. 놀란 민혜가 어디 가냐고 물었으나, 윤이 뛰어나간 통에 그 말은 이미 등 뒤에서 닫힌 문에 가로막혔다.
슬슬 퇴근 시간이 가까워 오는 도로였다. 신호에 걸릴 때마다 윤은 이 끝으로 입술을 잘근거렸다. 근처의 공영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가게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 시간이었다.
소박하고 깔끔한 간판은 눈에 쉽게 들어왔다. 전면창 안 진열장에는 가지각색의 빵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도 부드럽고 고소한 빵 냄새가 풍겼다. 작은 가게 안에서는 이미 몇몇 손님이 빵을 고르는 중이었다.
숨을 고른 윤은 가게 문을 밀었다. 풍경이 딸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카운터 안에서 어서 오세요,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정언의 어머니였다. 윤이 안녕하세요, 하며 인사를 건네자 곧 윤을 알아본 어머니가 반색을 했다.
잠깐 기다리라는 손짓을 하더니 수화기를 든 어머니는 손님이 왔다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아마 정언인 듯했다. 짧은 통화 후 수화기를 내려놓은 어머니가 카운터 너머로 몸을 조금 내밀었다.
“전화했으니까 금방 내려올 거예요. 저기, 정언이가 진짜 그런 애가 아니거든요. 지각 한 번 안 하는 앤데, 몸이 너무 안 좋았나 봐요.”
“좀 괜찮아졌나요?”
“아까 약 먹고, 죽도 한 반 그릇 먹더라고요.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더니 열은 좀 내렸어요. 일부러 정언이 보러 와 줘서 고마워요. 원체 앓는 소리 한 번을 안 하는 앤데…….”
어머니가 말끝을 흐렸다. 뭔가 말하려다 마는 듯한 그 얼굴에, 윤은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문득 생각했다. 그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어머니가 문 옆쪽을 가리켰다.
“요 앞에서 기다리면 나올 거예요. 내가 저녁이라도 대접했으면 좋겠는데, 손님이 있어서 영 그러네. 어쩌죠?”
“괜찮습니다. 잠깐 얼굴만 보러 온 건데요, 뭐. 감사합니다.”
미안해하는 얼굴에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윤은 손님들로 복작거리는 가게 안을 빠져나왔다. 건물 옆으로 조그만 쪽문이 하나 나 있었다. 쪽문 너머로 보이는 계단은 위층의 가정집과 연결된 듯했다.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하는 도로 위로 가로등이 켜졌다. 윤은 바닥을 내려다보며 그림자 위를 툭툭 찼다. 고작 몇 분이겠지만, 몇 시간은 되는 것처럼 긴 기다림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쪽문이 열리며 안에서 누군가 밖으로 나섰다. 자신을 보고 멈춰 서는 인기척에 윤은 고개를 들었다. 정언이었다. 자신이 왔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듯,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정언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렇지 않아도 핏기 없는 얼굴이 하룻밤 사이에 더 엉망이었다. 당장이라도 끌어당겨 안아 주고 싶은 걸 참기 위해서는 약간의 인내심이 필요했다. 윤은 애써 웃었다.
“……어머님한테 전화 드렸거든요. 선배 거기 있냐고, 연락이 안 돼서 걱정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선배가 많이 아프다고 하셔서요. 실례지만 제가 혹시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선배 만날 수 있냐고…… 그랬더니 여기로 오라고 얘기하시더라고요.”
정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표정 없는 얼굴이었으나 윤은 그 아래의 수많은 감정들을 쉽게 간파했다. 당혹감, 두려움, 불편함. 정언이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도망쳐 버릴 것 같아, 윤은 서둘러 물었다.
“저하고 얘기하는 거 불편하세요?”
그 말에 정언의 눈이 흔들렸다.
“하루 종일 제가 무슨 생각했는지 모르실 걸요.”
윤은 애써 웃었다.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질 듯한 그 얼굴을 마주하자 머릿속이 텅 비는 기분이었다.
“선배한테 아무 일 없기만 하면 뭐든 다 할 거라고 기도했어요.”
나지막이 뱉은 말에 긴 침묵이 지났다. 떨어지는 가로등 빛이 서늘했다. 윤은 정언의 눈을 응시했다. 할 말이 아주 많은 것 같은, 혹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은 그 눈. 어느 쪽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저 그냥 갈까요?”
“……아냐.”
잠깐의 사이를 두고 정언이 대답했다. 윤은 정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손을 뻗어 이마를 짚어 보자 정언이 움찔했다. 닿는 순간 느껴질 정도로 이마가 뜨거웠다. 가까이서 스친 옅은 숨에도 희미한 열기가 묻어났다. 다른 생각보다 걱정이 앞섰다.
“아직도 열 있어요.”
“얘기하려고 왔다며.”
“선배.”
정언을 부르자, 정언은 아무 말도 없이 윤을 마주 보았다. 닥쳐올 일이 뭐든 각오한 사람처럼, 단호한 입매가 꼭 닫힌 채였다. 서현국 기자의 일 때문일까. 불현듯 스친 생각에 잠시 정언을 내려다보던 윤은 주차장 쪽을 가리켰다.
“차에서 얘기해요. 선배 지금 열 많이 나서 어디 가기 힘들겠어요.”
얼마 떨어지지 않은 주차장까지 가는 동안 정언은 내내 말이 없었다. 조수석 문을 열어 주자 정언이 순순히 차로 들어와 앉았다. 문을 닫자 공기가 순식간에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조금 떨어진 도로에서 들리는 자동차의 소리와 상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 따위가 멀게 떠돌았다.
막상 이렇게 있으니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어색한 정적은 무거웠다. 정언이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댔다. 허공으로 가는 한숨을 뱉은 정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알았지?”
서두조차 없는 질문이었으나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묻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는 뻔했다. 서현국 기자가 자기 아버지라는 걸 알았느냐는 질문이었다. 정언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에, 정언이 내내 그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으리라는 걸 윤은 문득 깨달았다.
정언은 시선을 앞창 너머 어딘가에 둔 채 입술을 달싹였다.
“나 이해 못 해도 상관없어.”
무감한 말투였다. 그러나 정말 상관없다면 그 질문을 가장 먼저 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윤은 이제 이런 정언을 잘 알고 있었다. 상처 받는 게 두려워서, 혹은 상처를 줄 게 두려워서 먼저 벽을 치고 물러나는.
포항에서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날 밤 정언이 인간적인 부분 따위는 기대하지 말라고 선을 그었던 건, 결국 지금처럼 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지금처럼 의도하지 않은 순간 서로를 다치게 만들까 봐. 그 방어적인 태도에 윤은 헛웃음을 뱉었다.
“제가 뭘 이해 못 하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