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62
262화.
때로 이렇게 빤히 들여다보인다는 걸 스스로는 알고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
“선배 아버지가 서현국 기자님이라고 저한테 얘기 안 하신 거요?”
정언의 시선은 앞에 고정된 채였으나, 무릎 위에 놓인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열 때문일까,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정언의 옆모습을 빤히 보던 윤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저 선배한테 왜 그 얘기 안 하셨냐고 화내도 되는 사람이에요?”
정언이 그 말에 멈칫했다. 뭐라고 대답하려는 듯 하얗게 마른 입술을 두어 번 움직이던 정언은 곧 입을 다물었다. 확실하게 선을 긋고 싶다면 아니라는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그럼에도 정언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왜 대답 못 하세요. 지금 제가 화낼 거라고 생각하고 선수 치셨잖아요. 저 선배한테 화낼 자격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냐고요.”
윤이 화가 났다고 생각했는지, 정언이 처음으로 시선을 돌려 이쪽을 보았다. 그러나 정언이 어떤 상황인지 알면서 그럴 수 있을 리 없었다. 윤은 한숨처럼 웃었다.
“제가 어떻게 화를 내요. 말했잖아요. 선배한테 아무 일 없기만 하면 뭐든 다 할 거라고 기도했다고.”
마주친 시선에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이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몸이 아파서 마음이 무너지는 건지, 아니면 약해진 마음이 몸의 병으로 옮아 간 건지 알 수 없었다. 심장의 어딘가가 뜨끔해졌다. 열 때문인지 핏기 없는 얼굴에 뺨 부근만 희미한 홍조가 돌았다. 정언이 그 위를 손으로 몇 번 열없이 문질렀다.
“……어떻게 알았어? 선배가?”
오랫동안 말이 없던 정언이 침묵을 깼다.
대답한 윤은 바로 덧붙였다.
“진짜 화난 건 아니에요. 전 몰랐는데 강 피디님은 알고 계신 게 질투 나서 그렇지.”
분위기를 풀기 위한 농담이었지만, 물론 백 퍼센트 농담은 아니었다.
“그냥 술김에 얘기했던 거야.”
마치 그 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정언이 입술을 달싹였다. 열 때문인지 평소보다 목소리에 공기가 훨씬 많이 섞인 느낌이었다. 속삭이는 듯한 낮은 목소리의 결을 문득 만져 보고 싶었다.
“선배가 저한테 변명하시니까 좀 색다른데요.”
윤은 씩 웃었다. 변명이라는 단어가 영 걸렸는지, 정언의 한쪽 눈썹이 약간 치켜 올라갔다. 그러나 정언은 굳이 그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따지고 보면 딱히 더 나은 말도 없기는 했다.
윤은 곧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며 정언을 마주 보았다. 열에 약간 들뜬 그 얼굴은 평소와 달라 보였다. 평소에는 아주 잘 드는 칼 같았다면, 지금은 슬라이드 유리를 깨뜨린 조각 같았다. 날카롭지만 손을 대는 순간 그대로 부서질 수도 있을 듯한.
서늘하고 깊은 눈동자가 이쪽을 응시했다. 그새 한층 짙어진 어스름 탓에 정언의 표정이 조금 더 흐릿해졌다. 정언의 눈도 내리깔린 어둠처럼 가라앉은 채였다. 그 뺨을 만지고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고 싶은 걸 참기 위해 윤은 무릎 위에 놓여 있던 손을 말아 쥐었다.
“괜찮으시냐고 안 물어볼게요. 아니라는 거 아니까.”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눈앞의 정언보다 더하지는 않을 터였다. 윤은 애써 단순해지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선배가 지금 어떤 마음일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요.”
정언이 멈칫했다. 그 마음을 다 이해한다거나, 공감한다거나, 그런 말 따위는 하기 싫었다. 그건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짐작조차 불가능한 그 속을 얄팍한 위로로 달랠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밤새 엄청 걱정했어요.”
나지막한 말에 무릎 위로 떨어진 정언의 시선이 퍼뜩 윤에게 돌아왔다. 윤은 부러 투덜거렸다.
“정말 돌아 버리는 줄 알았다고요. 선배가 이러고 있을 거 뻔히 보여서.”
“내가 어쩌고 있는데.”
아까보다 조금 더 낮아진 목소리였다. 조용한 차 안이 아니라면 그냥 흩어져 버릴 것 같은. 그 소리의 입자들이 너무 옅어, 이상한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제 피 한 방울도 안 남기고 말리려고 하시잖아요, 지금.”
애써 농담처럼 대꾸한 말에 정언이 픽 웃는 소리를 냈다. 농담 아닌데요, 하고 덧붙이려던 윤은 그 말을 삼켰다. 정언은 지친 듯 한쪽 눈가를 손으로 덮었다. 가늘다 못해 앙상한 손가락 끝이 떨리는 것이 선연했다. 정언이 그 떨림을 감추려는 듯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다시 내려앉은 정적이 길었다. 먼저 그 침묵을 깬 건 윤이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하세요?”
“무슨 말을 해야 되는데, 내가.”
정언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뭐라도요.”
“할 말 없어.”
정언은 변명조차 포기한 사람 같았다. 변명. 그 말은 확실히 정언과는 먼 단어였다. 그러나 최소한의 자기변호조차 하지 않으려는 그 태도에 도리어 애가 타는 건 윤 쪽이었다. 아프다고, 힘들다고, 그 한마디가 정언에게 왜 그렇게 어려운 건지 답답했다.
가늘고 날카로운 정언의 옆모습에 눈을 두고 있던 윤은 다시 물었다.
“그만하고 싶으세요?”
그 물음에 정언의 몸이 굳었다. 마른 어깨가 순간 경직하는 게 옷 아래로도 보였다. 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럼 그렇게 하시면 되잖아요.”
정언의 눈이 커졌다. 당연히 그런 반응일 거라고 생각했기에 윤은 여상하게 대꾸했다.
“그게 뭐 어때서요.”
정언은 못 박힌 듯 윤을 쳐다보았다. 뭐 이런 게 다 있나, 하고 써 붙인 얼굴이었다. 물론 서정언에게 방송을 그만하라니, 누가 들었다 해도 그런 반응이 나올 건 당연했다.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이던 정언이 윤에게 물었다.
“……지금 본인이 무슨 소리 하는지 알긴 해?”
“어떻게 취재한 건데, 이걸…….”
목소리를 높였던 정언의 말끝이 급격히 흐려졌다. 몇 달을 매달린 일이었다. 이제 와서 포기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정언이었다.
물러날 수도, 전진할 수도 없는 늪. 그대로 서 있는 사이 정언은 그 늪에 발목을 잡힐 게 뻔했다. 1분 1초가 아까운 시점이었다. 이렇게 허비할 시간이 없는데도 정언이 움직이지 못한다는 건 그만큼 두렵다는 뜻이었다. 윤은 정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저 있잖아요. 강 피디님도 있고, 다른 선배들도 있고. 저 못 믿으셔도 선배들은 믿으실 수 있을 거 아니에요. 몇 년을 같이했는데. 팀이 왜 팀인데요.”
정언이 그 말에 멈칫했다. 윤은 말을 이었다.
“그만하고 싶다고 얘기하셔도 돼요. 무섭다고 하셔도 되고요. 포기하면 뭐 어때요.”
그건 진심이었다. 정언이 말을 잃은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윤은 씩 웃었다.
“스튜디오도 구했고 방송도 하기로 했어요.”
“방송을? 어떻게?”
놀란 정언의 목소리가 커졌다. 윤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생방송으로요.”
“생방송? 주조하고 합의된 거야?”
정언이 윤을 다그쳤다. 방금 전까지 다 죽어 가더니, 방송 얘기가 나오자마자 살아나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윤은 차분하게 정언을 달래듯 말했다.
“강 피디님이 얘기해 보신다고 했어요. 선배 없어도 방송 돌아가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고요. 혼자 하는 팀 아닌데, 누가 힘들면 다른 사람들이 대신해 줄 수도 있잖아요.”
정언의 눈이 흔들렸다. 윤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가벼운 한숨을 뱉었다.
“저 선배한테 당장 내일부터 다시 나오라고, 방송 코앞이니까 일하라고 그런 말 하러 온 거 아니에요. 전에 얘기했잖아요. 선배가 그렇게 힘들게 견뎌야 되는 거면 전 폐지돼도 상관없다고. 선배가 일에 미친 사람이라 멋있어 보였고, 그래서 빠진 거지만 선배 인생에 그게 전부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윤은 눈썹 부근을 긁적이며 멋쩍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선배가 뭘 좋아하는지, 자주 가는 데가 있는지, 친한 사람이 있는지, 이럴 때 갈 만한 데가 어딘지…… 아무것도 생각 안 났어요. 선배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건방지죠.”
마주 본 눈이 복잡했다. 윤은 그 시선을 어슷하게 비껴 피하며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다 생각했어요. 선배한테 산다는 게 뭘까. 사람들은 다 그런 거 있잖아요. 퇴근하고 친구하고 맥주 한잔할 수도 있고, 집에서 드라마를 볼 수도 있고, 애인하고 저녁을 먹을 수도 있고. 그런데 선배한테는 그런 게 없는 거예요. 방송이 선배 삶이고, 이 팀이 전부고.”
뒤통수라도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정언을 본 윤은 고개를 저었다.
“저 선배 비난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뭐라고 선배한테 그러겠어요. 저도 팀원이니까 선배 삶에 나름대로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었던 건데, 어떻게 생각하면 다행이죠. 여기가 아니었으면 제가 선배 인생에 들어올 일 없었을 테니까.”
“그럴 일 없었을 거라고?”
“제 얼굴 이렇게 안 먹히는 여자는 선배가 처음이라서요. 제가 여기 아니면 어디서 선배 보고 들이댔어도 말 한 번 못 걸어 보는 사이였을 거 아니에요.”
짐짓 진지한 척 심각하게 대답하자, 정언이 어이가 없는지 웃는 소리를 냈다. 그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윤은 손을 뻗어 이마 위로 흘러내린 정언의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손가락 사이로 떨어지는 가늘고 부드러운 머리칼의 감촉이 서늘했다.
“선배가 웃는 게 좋아요.”
생각도 못 한 말이었는지 정언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게 더 귀엽다는 걸 알기는 할까, 속으로 생각한 윤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뒀다.
“그 얼굴 보면 진짜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눈썹을 좁힌 정언이 되물었다.
“제정신 아니지?”
“선배 만나고 제가 지금보다 더 제정신인 적 없을걸요.”
말문이 막힌 듯 정언이 이마를 짚었다. 창백한 얼굴에 귀 끝만 빨갛게 단 채였다.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정언을 끌어 자신을 보게 만들고 싶은 걸 겨우 참으며, 윤은 정언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니까 마음 가는 대로 하세요. 지금 그만두셔도 아무도 선배보고 뭐라고 안 해요. 팀이 전부라고 생각하시면 선배도 그만큼 믿음 주셔야죠. 혼자 그렇게 힘들고 괴로워하실 거면 선배가 지금까지 해 온 게 무슨 의미예요. 선배 하나 없다고 지금까지 온 거 전부 소용없는 걸로 만들 사람들 아닌데 왜 그러세요.”
정언이 실은 서툰 사람이라고 느끼는 건 이럴 때였다. 이런 순간에도 홀로 죽어라 버티며 이를 악무는 건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일 터였다. 혼자 모든 걸 책임져야만 강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정언이 알았으면 했다.
“저 선배가 지금 얼마나 아픈지 몰라요. 상상도 안 가고요. 그런데 그냥…… 선배가 아프다고 얘기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나 너무 아프다고, 죽을 것 같다고, 그러니까 옆에 있어 달라고 할 수는 있잖아요. 똑같은 고통 가진 사람만 다른 사람 위로할 자격 있는 건 아니니까.”
“김 피디.”
정언이 윤의 말을 끊으려 했으나, 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옆에 있어 달라고 하시면 그렇게 할게요. 더한 것도 상관없어요. 그게 뭐든 선배한테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일은 다 할 거예요.”
이 끝으로 아랫입술을 누른 정언이 시선을 내렸다. 다시 공기가 가라앉았다. 무릎 위에 놓인 정언의 손끝이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이 침묵의 순간을 모두 언어로 치환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건 여기서 정언을 안아 주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말들일 거라고 윤은 문득 생각했다.
“집에 가지 말고 오늘은 여기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