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63
263화.
사실은 옆에 있으면 안 되냐고 묻고 싶었지만, 윤은 그러는 대신 웃어 보였다. 정언이 멈칫하며 윤을 마주 보았다.
“아프고 머리 복잡할 땐 혼자 있는 거 아니더라고요. 진짜 걱정 많이 했는데 여기 계셔서 다행이에요.”
“여기 있는 거 알면서 뭐 하러 왔어.”
정언이 다시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무심함을 가장한 말투가 실은 미안함에 가깝다는 걸 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매일 보다가 하루 못 보니까 더 보고 싶잖아요.”
능청스러운 말에 정언이 한숨처럼 내뱉었다.
“하여튼 말은 잘 해.”
“행동도 잘 하잖아요. 보여 드려요?”
짐짓 정언 쪽으로 몸을 기울이자, 화들짝 놀란 정언이 창가에 붙을 기세로 물러났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에 결국 푹 웃는 소리가 터졌다. 순순히 제자리로 돌아간 윤은 정언에게 말했다.
“농담이에요. 그만 들어가세요. 얼굴 진짜 빨개요. 아까보다 열도 더 나는 것 같고.”
먼저 차에서 내린 윤은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차에서 내린 정언을 다시 집 앞까지 데려다주는 사이, 정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내 말이 없었다. 현관으로 통하는 쪽문 앞에 서 있던 정언이 바로 들어가지 않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윤에게 말했다.
“잠깐 올라왔다 가.”
“아니에요, 쉬세요. 선배 아픈데 왜…….”
뜻밖의 말에 놀란 윤이 손을 내젓자 정언이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줄 거 있어서 그래.”
그게 뭔지 묻기도 전에 정언이 걸음을 옮겼다. 윤은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가게 위층의 가정집으로 올라가 현관을 연 정언은 안으로 들어섰다. 집 안 곳곳에 깊숙이 배인 부드러운 빵 냄새가 옅게 밀려들었다.
정언은 거실 소파를 가리키더니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은 윤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외관은 상당히 오래된 건물이었는데, 내부는 수리한 듯 깔끔했다.
아마 한 번쯤은 새로 달았을 듯한 흰 섀시 틀, 노란색 커튼, 낡았지만 깔끔하게 관리된 패브릭 소파 같은 것들이 만드는 집 안의 분위기는 부드럽고 따뜻했다. 정언이 가장 먼저 떠올린 곳이 집이라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누구든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받을 수 있는 다정한 고요함.
몇 분쯤 지났을까, 방 안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던 정언이 품에 상자 하나를 들고 나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윤은 의아한 얼굴로 정언을 보았다. 이게 뭐냐고 묻기도 전 정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빠 돌아가시고 집에 남아 있던 물건 모아 놓은 거야.”
생각도 못 한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서현국 기자의 유품을 굳이 자신에게 보여 주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터였다. 정언이 상자 뚜껑을 만지작거렸다. 그 손끝에 초조한 기색이 묻어났다.
“엄대진하고 관련된 자료도 있어. 내가 녹음기 테이프 잠깐 듣고 확인했는데, 아마…… 방송 나가는 데 필요할 수도 있어서.”
마지막 말을 발음하는 목소리 끝이 갑자기 잠겨들었다. 정언이 우는 걸까 싶어 놀란 윤은 저도 모르게 정언의 손을 잡았다.
“선배.”
정언이 고개를 숙였다. 손을 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정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입술 끝을 물었다 놓은 정언이 입을 열었다.
“……그만둬도 된다고 말해 줘서 고마워.”
불현듯 깊은 수면 아래를 비춘 듯한 감각이 지났다. 정언이 드물게 드러낸 그 진심은 손을 대는 즉시 깨질 것처럼 불안하게 느껴졌다. 잡고 있는 손이 떨었다. 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정언의 차가운 손을 더 꼭 감싸 쥐었다. 정언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자신 없어.”
바닥으로 떨어지는 목소리는 혼잣말에 가깝게 들렸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 한 거 처음이야.”
그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곧 사라졌다.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표정이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롭게 선 채, 정언은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짓 당해도 버틸 수 있었는데 이젠 무서워.”
정언의 입에서 나온 무섭다는 말은 낯설었다. 처음 왔을 때부터 수십 번은 더 던졌을 질문이었다. 선배는 무섭지 않아요? 이런 일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때마다 정언은 늘 담담하게 굴었다. 이런 일쯤은 견디게 된다고. 결국은 아무렇지도 않아진다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내가 믿던 게 뭔지 모르겠어, 이젠.”
정언이 입술을 깨물었다. 불신을 고백하는 고해성사실의 신자 같은 얼굴이었다.
“정말 목숨 걸고 했어. 김 피디 말대로 들어온 이후로 나한테 다른 삶 없었다고. 이런 일 하는 사람도 필요하니까, 내가 여기 있으니까, 이게 내 일이니까…… 다른 생각 해 본 적 없었어. 그런데 이제 와서 후회돼. 내가 이 일 안 했으면 아무것도 몰랐을 수 있는데. 아빠가 그냥 사고로 죽었다고 알고 살면서.”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겁고 아픈 단어들이었다. 그러나 이 많은 단어들은 지금 정언을 괴롭히는 고통의 극히 일부조차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다. 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정언이 웃는 소리를 냈다.
“재밌지. 더한 일 겪은 사람도 많은데, 세상에 이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일 많다는 거 내 눈으로 수백 번, 수천 번도 더 봤는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다 지나간다고 말하면서 정작 내 일 되니까 순식간에 사람이 무너져.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진짜 아무것도 아닌데.”
차라리 울어 버리면 지금처럼 보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지는 않을 것 같았다. 파랑주의보가 내린 바다처럼 생각들이 격렬하게 수위를 높이며 밀려들었다. 머릿속이 제멋대로 뒤엉켰다.
“……왜 아무것도 아닌데요.”
다친 쪽은 정언인데, 자신이 먼저 터지지 않기 위해 견디는 건 상상보다 더 괴로웠다.
“내 상처가 나한테 제일 아픈 거 당연하잖아요.”
가슴부터 목 안쪽까지 뜨거운 것이 역류했다. 그 궤적마다 불을 붙인 것 같았다. 윤은 흔들리는 목소리를 애써 눌렀다. 몰랐다면 좋을 텐데, 정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대로 들여다보이는 탓이었다.
“지금 그런 생각 이기적인 것 같으세요? 그건 이기적인 게 아니라 인간적인 거예요. 남들이 뭔데요. 누가 나 대신 아파 준대요? 내가 다치고 내가 아프다는데 누가 뭐라고 그래요. 지금 아픈 사람 선배예요. 다른 사람들 생각하지 마세요.”
속을 들킨 사람처럼 정언이 멈칫했다. 문득 맞닿은 시선이 얇은 칼날처럼 마음의 어딘가를 저미듯 지났다. 윤은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만하셔도 돼요. 제가 할게요. 저 할 수 있어요, 선배.”
그 말에 정언이 무너졌다. 그대로 주저앉으려는 정언을 낚아챈 윤은 그 마른 몸을 꽉 안았다. 정언이 밀어내려는 듯 윤의 어깨를 쥐었으나 윤은 완강했다. 가늘고 찬 숨이 배회하다 결국 가슴으로 파묻혔다.
숨이 막힐 정도로 끌어안은 팔 안에서 정언이 떨었다. 윤은 잠시 눈을 감았다. 어느 누구도 정언을 이렇게 망가뜨릴 수 없었다. 절대 그렇게 되게 내버려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설령 그게 정언 스스로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정언이 이런 순간을 아무에게도 보인 적 없을 거라는 확신은 달콤하고 고통스러웠다. 때문에 통제되지 않는 진심을 막는 건 불가능했다.
“제 앞에서만 이러시면 안 돼요?”
참지 못하고 숨소리로 속삭인 말에 정언은 윤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말보다 절박하게 매달리는 손끝이 대답을 대신했다.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자신이 알지 못하고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시간들을 모두 들여다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어떤 순간들을 전부 독점하고 싶다는 바람을 가져 본 것도 처음이었다.
제어할 수 없는 갈망의 실체는 또렷했다. 누구와도 이 순간을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궤도 안, 달의 뒷면, 깨져 버린 유리 성벽 너머의 정언은 오로지 자신의 것이었다. 지금 정언에게 필요한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자신이었다.
윤은 오랫동안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귓가에서 맴도는 희미한 숨소리와 품을 가득 채운 정언의 체온이 시간을 잠시 멈춘 듯했다.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정언이 고개를 들었다. 윤은 그 창백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런 순간을 이용하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지금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정언이 거절할 리 없었다. 머릿속을 녹여 버리는 상상들 중 무엇이든 현실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는 싫었다. 정언을 안아 조심스럽게 앉혀 준 윤은 가까이서 열에 들뜬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차마 윤을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린 정언이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미안해.”
윤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뭐가요. 지금 저 좋은 일만 하셨는데.”
농담처럼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윤은 테이블 위의 상자를 품에 안아 들었다. 갈게요, 하며 몸을 돌리자 정언이 현관까지 따라 나왔다. 열린 문가에 기대선 정언이 짧은 한숨을 뱉었다.
“빨리 들어가세요.”
상자를 안고 손짓하던 윤은 퍼뜩 생각난 것이 있어 아, 하고는 정언을 마주 보았다.
“저기, 이희경 씨가 연락 주셨었어요. 내일 박규형 과장님 생일이라 가족들끼리 작게 파티하면서 수아랑 리아한테 아빠 얘기 하려고 하신다고 그러는데, 수아가 선배랑 저한테 뭐 주고 싶은 게 있다고 그랬대요. 시간 뺏어서 죄송하다고 하시면서 이쪽으로 오시겠다고, 십 분 정도만 볼 수 있겠냐고 하시길래 알겠다고 했거든요.”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정언은 잠깐 생각하더니 곧 순순히 대답했다.
“알았어. 연락 줘.”
“괜찮으시겠어요?”
“수아가 보고 싶다고 했다며.”
정언이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윤은 정언이 희경과 두 딸에게 자신을 겹쳐 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상황이 이래도 그런 부탁을 거절할 마음은 없는 듯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윤은 정언에게 말했다.
“힘드시면 며칠 더 쉬면서 생각해 보셔도 돼요. 강 피디님한테는 제가 얘기할게요. 이희경 씨는 여기 근처로 오시라고 해도 되니까 부담 갖지 마시고요.”
“알았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선배 생각만 하세요. 저 진짜 갈게요. 약 드시고 좀 누워 계세요. 잠 못 자면 나을 병도 안 나아요.”
덧붙인 말에 정언이 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윤은 애써 그 눈을 외면하며 몸을 돌렸다.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등 뒤에서 정언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김 피디.”
한 계단 아래서 윤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 새까만 눈동자가 내려온 어둠 속에서 더 깊었다. 바닥을 알 수 없는 물처럼 가라앉은 정언의 눈에 까닭을 알 수 없이 가슴이 덜컥했다. 정언이 입술을 달싹였다.
“고마워.”
어쩐지 정언이 이대로 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멍하니 정언을 보던 윤이 간신히 네, 하고 대답하자 정언은 잠시 눈을 내리감았다. 곧 현관 안으로 사라진 정언이 문을 닫았다. 윤은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선 채 움직이지 못했다. 불현듯 품에 안은 상자의 무게가 이미 묵직해진 심장 위로 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