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64
264화.
맞은편에 앉은 소명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진작 퇴근했어야 하는 사람을 몇 시간째 붙들어 놓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소명이 짧은 한숨을 뱉고는 카페 소파에 등을 깊숙이 묻었다.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 지금까지 몇 번 했지?”
“저도 잘 알죠. 힘드니까 부탁드리러 온 건데요.”
입이 말랐다. 재희는 소명을 마주 보았다. 뿔테 안경 너머로 표정 없는 눈이 자신을 응시했다. 소명과 초면은 아니었다. 교양국 피디 출신인 소명은 피디 시절 연수와 친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재희 역시 연수를 통해 소명과는 예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
그러나 소명이 출산 이후 주조정실 MD로 소속을 옮기면서 이전처럼 자주 만날 일이 없게 된 지 오래였다. 주조정실의 교대 근무 탓도 있었고, 연수의 장례식 이후로는 이렇게 따로 이야기를 나누는 일 자체가 처음이었다.
때문에 그 어설픈 친분을 가지고 자신이 소명을 설득하겠다고 나선 건 아니었다. 소명의 성격상 그건 도리어 자신의 약점에 가까웠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대안이 없었다.
침묵하던 소명이 안경을 벗어 내려놓으며 눈 앞머리를 눌렀다.
“강 피디.”
“피디들은 주조 MD 일 별거 아닌 줄 알지?”
낮은 목소리에서는 거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소명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약간 당황한 재희는 서둘러 그 말을 부정했다.
“아닙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지난번에 시보국에서 인사위 열어서 주조로 발령받은 분들 다 그만둔 건 알아?”
시보국 프로그램 피디들 중 몇몇이 지난번 이사회 저지 이후 열린 인사위에서 전보 조치를 당한 일이 있었다. 그 중 두 명이 주조정실 MD로 발령받았는데, 두 사람 모두 얼마 지나지 않아 종편으로 이적한 것은 재희도 이미 아는 사실이었다. 재희의 굳은 표정을 본 소명이 입매를 슬몃 비틀었다.
“운행표 체크하고, 예고 내보내고, 자막 넣고, 필러(filler)46) 틀고. 하루 종일 여기 앉아서 하는 일 없이 모니터링만 하고. 별거 아닌 일이긴 하지.”
“저 그런 생각 전혀 안 합니다.”
재희가 다시 한 번 부정하자 소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강 피디 좋은 사람인 거 아는데 대부분 그렇게 생각한다고. 내가 피디 출신이야. 그거 모르겠어?”
재희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 분위기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윗선에 밉보인 사람들이 주조정실로 발령 나는 케이스가 처음은 아니었다. 특히 프로그램을 만드는 피디 일과는 정반대 업무에 가깝다 보니, 좌천된 피디들이 하루아침에 구경꾼 된 기분이라고 토로하는 일도 잦았다. 소명이 재희를 빤히 보다 픽 웃는 소리를 냈다.
“주조 와서 별소리 다 들었는데 오늘이 제일 황당하네.”
“한 번만 더 생각해 주시면 안 될까요?”
“윗선 가서 얘기해.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이래?”
재희의 부탁에도 소명은 냉랭했다. 재희는 나오려는 한숨을 참으며 다시 한 번 소명을 설득했다.
“지금 시보국 상황 아시잖아요. 윗선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면 제가 이러겠습니까?”
이만큼 절박한 적은 처음이었다. 몇 달을 공들인 방송인데, 더구나 모든 판이 다 준비된 마당인데 이제 와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인 재희에게 소명이 물었다.
“윗선은 설득 안 되고, 나는 될 것 같고?”
그 말에 가슴이 덜컥했다. 방송국에서 소명의 성격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소명을 설득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이런 상황도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소명이 재희를 빤히 마주 보다 벗어 두었던 안경을 다시 썼다.
“강 피디가 신념 가지고 일하는 거 나도 잘 알아. 시보국 상황 잘 알고, 다른 데 상황도 안 좋다는 것도 알고. 나도 피디 일 오래 했어. 힘든 거 왜 모르겠어.”
안경다리가 걸리는 귀 부근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얼굴을 찌푸리던 소명이 팔짱을 끼었다.
“그런데 지금 강 피디 하자는 거 같이 밥그릇 엎자 그 소리밖에 더 돼?”
자신들에게 협조하면 무조건 연대 책임이 되는 상황이었다. 소명에게 그걸 감당해 달라는 소리나 다름없었으니, 변명할 말이 없었다. 소명이 입을 다문 재희를 바라보다 재미있다는 표정을 했다.
“말 못 하네. 그렇잖아. 강 피디 지금 본인은 정의의 사도고, 나는 비협조적인 방관자다 그거 아냐.”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재희는 즉시 사과했다. 그러려는 생각은 없었지만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건 사실이었다. 자신의 방식이 반감을 사기 쉽다는 건 감수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소명이 가라앉은 재희의 표정을 알아차렸는지 좁혀진 미간을 눌렀다.
“강 피디도 지금 이게 말 안 되는 요구라는 거 알잖아.”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건 당연히 재희 자신이었다. 소명이 말을 이었다.
“나라고 회사 돌아가는 꼴 모르겠어? 그런데 우리는 강 피디랑 상황이 달라. 이렇게까지 하면서 방송 계속할 생각이야? 아니지? 이게 마지막이다, 지금 그렇게 생각하고 왔을 거 아냐.”
재희는 순순히 그 말을 인정했다. 소명이 픽 웃는 소리를 냈다.
“그런데 난 그게 아니라고. 주조 쪽은 안 그래도 불안정한 사람들 많아. 이사진 바뀌면서 MTD47) 전부 계약직으로 갈아 치운 건 알지? 여기 반발해서 노조 가입한 사람들 다 전보시켰고. 나랑 같이 일하던 MD들 지금 다 지방 사무국 이런 데 가 있어. 폭탄 돌리기도 아니고 이게 뭐냐고. 피디 징계 내려서 여기 MD로 보내고, MD 징계 내려서 지방 사무국 보내고. 거기서도 눈 밖에 나면 어떻게 하겠어?”
마지막 말은 다소 감정적이었다. 소명에게서는 보기 드문 어투였다. 사이를 둔 소명이 다시 낮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재희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건 본인도 불편한 일인 듯했다.
“사람들 몸 사릴 수밖에 없어. 더구나 계약직으로 바뀌면서 경력 없는 친구들 케어하느라 후배들이 부담도 심하고.”
“무슨 말씀이신지 압니다.”
“맘에 없는 소리 하지 마. 강 피디가 주조 일 하면서 목숨 걸고 싶어 하는 사람 없다는 소리 진짜 이해해? 그거 이해하는 사람이 이럴 수는 없지.”
소명의 부정에 속이 뜨끔했다. 무슨 말인지 너무나 잘 아는 탓이었다. 스스로 사명감이라고 부르는 그 거창한 신념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자리를 위태롭게 만들 수도 있었다. 불현듯 부끄러운 기분에 낯이 뜨거워졌다. 소명이 이미 다 식은 지 오래인 커피를 홀짝이며 내뱉었다.
“솔직히 나 개인만 놓고 본다면 그거 어려운 일 아냐. 편성표 이미 나와 있고, 그거 그냥 생방으로 교체하는 건데. 손이 좀 가서 그렇지 뭐가 문제겠어. 그런데 방송 나가고 뒷감당 어떻게 할 거냐고. 위에서 나 개인한테만 문제를 삼겠다, 그럼 상관없어. 나도 솔직히 지금 회사 꼴 정떨어지고, 강 피디가 나쁜 짓하려는 것도 아닌데 못 도와줄 이유 없으니까. 그런데 위에서 반드시 일반 스탭들한테까지 책임 묻는다고. 강 피디도 팀원들 데리고 있으니까 알 거 아냐.”
소명 역시 자신의 문제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불똥이 튈 것이 두려운 듯했다.
“무리한 부탁인 줄 아는데, 사정이 급해서 저희 생각만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재희는 다시 한 번 사과했다. 소명은 그런 재희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테이블 위로 정적이 흘렀다. 카페에 틀어 놓은 제목을 알 수 없는 팝송의 멜로디가 그 정적 위를 떠돌았다. 한 곡이 거의 다 끝나갈 즈음, 소명이 입을 열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답을 생각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이게 저희한테도 마지막입니다.”
소명의 눈이 가늘어졌다. 재희는 마르는 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말을 이었다.
“사장님하고 시보국장님 검찰에 소환됐으니 어떻게든 위에서 두 분 잘라 내려고 하겠죠. 일 년 전하고 지금하고 저희 어떻게 달라졌는지 아실 겁니다.”
“에서 계속 보도 내보내고 있잖아. 그걸로는 안 되는 상황이야?”
“저희 이번 주 방송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것 때문에 에서 먼저 위험 부담 감수하고 이 기획 시작했어요. 저희가 이 방송 못 하면 까지 죽습니다.”
소명은 재희의 말을 곱씹는 듯 한동안 침묵했다. 손끝을 소파 팔걸이에 톡톡 두드리던 소명이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한참 동안 시선을 두고 있던 소명이 입을 열었다.
“ 방송하면 상황이 달라져?”
“확신 못 합니다. 그렇다고 안 하면 아무것도 안 달라지니까 하려는 거고요.”
그건 재희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대답이었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 방송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 버릴 수도 있었다.
거대하고 악랄한 적. 그 세력이 얼마나 강하게 뻗어 있는지 이쪽에서 파악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이길 확률이 얼마나 될까. 자신들이 하려는 건 그 불확실한 확률에 거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기가 찬다는 얼굴로 재희를 응시하던 소명이 헛웃음을 뱉었다.
“강 피디 정말 사람 난처하게 만드는 데 재주 있어.”
“그럴 의도 아니었습니다.”
소명이 몸을 앞으로 조금 내밀었다. 시선이 더 가까운 곳에서 마주쳤다. 안경 너머의 눈은 고요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기 어려웠다.
“내가 지금 이 상황 위에 보고할 수도 있다는 생각 안 해?”
올 게 왔구나, 속으로 중얼거린 재희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각오하고 왔습니다.”
“각오하고 왔다?”
“여 MD님 어떤 분인지 압니다. 저희가 원칙 어기려고 한다는 것도 알고요. MD님이 지금 저희 상황 윗선에 보고한다고 하시면 받아들이겠습니다.”
소명이 지금처럼 나올지 모른다는 것도 이미 염두에 둔 부분이기는 했다. 의외로 순순히 그 말을 받아들이는 재희의 태도가 뜻밖이었는지, 뿔테 안경 너머로 소명의 눈썹이 약간 치켜 올라갔다.
“내가 제안 거절하면 플랜 B는 뭔지 물어봐도 되나?”
“생각 안 해 봤습니다.”
재희의 대답에 소명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재희는 말을 덧붙였다.
“유튜브로 실시간 스트리밍 들어갈 예정이기는 했습니다. 정 안 된다면 그렇게라도 해야죠.”
“홈페이지 실시간은 어차피 우리 따라 움직이니까, 안 되면 유튜브로?”
“생각보다 대책 없네?”
“좀 그렇죠.”
재희가 웃자 소명이 턱을 괴었다. 재희의 얼굴을 한동안 응시하던 소명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강 피디 이럴 때 보면 지 기자랑 진짜 닮았어.”
연수 이야기를 먼저 꺼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기에, 재희는 저도 모르게 약간 움찔했다. 정작 말을 시작한 소명은 여상한 얼굴이었다.
“연수 걔 안 그렇게 생겨서 엄청 무대포였잖아. 위에서 그렇게 깨져도 기 한 번 안 죽고.”
그러나 그 짧은 말속에서 느껴지는 감정들은 복잡했다. 불현듯 손끝까지 저릿한 감각이 지났다. 재희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했다.
“그랬죠. 제가 연수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는데요.”
“강재희.”
갑자기 불린 이름에 재희는 소명과 시선을 맞췄다. 소명이 자신을 그냥 이름만으로 부르는 건 오래전의 기억을 되짚어도 드문 일이었다. 소명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내가 연수 때문에 설득하기 더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