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65
265화.
“아뇨, 그래서 더 안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소리 듣기 싫어하실 테니까.”
소명의 무표정하던 얼굴에 희미하게 웃는 빛이 떠올랐다.
“연수가 맨날 하는 소리가 강 피디한테 화내기 힘들다 그거였는데, 내가 이제 그게 무슨 소린지 알겠네. 그렇게 눈치 빠른 사람이 나한테 찾아와서 이러니까 나도 어지간하면 도와주고 싶은데,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냐. 밥줄 걸린 사람들 한둘이 아니잖아.”
재희는 남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씁쓸한 맛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고 감돌았다. 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 위를 손끝으로 문지르던 재희는 테이블 위에 시선을 둔 채 입을 열었다.
“누가 저한테 그렇게 물어보더라고요. 신념 좋은데, 신념 지키자고 팀원들 밥그릇 엎을 수 있냐. 그게 강 피디가 생각하는 저널리즘이라는 거냐. 대답 못 했습니다. 신념이 사람보다 중요한가, 사람답게 살려고 신념 가지는 건데 주객전도 아닌가. 솔직히 지금 좀 많이 창피하네요. 저 그렇게 잘난 척해도 아직 한참 모자라는 놈이구나 싶어서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재희는 소명에게 인사를 건넸다.
“죄송했습니다. 얘기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명이 대답 없이 가방을 집어 들며 몸을 일으켰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소명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재희가 한숨을 뱉고는 머리를 흩었다. 쉬운 일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소명이 편성국에 이 상황을 얘기하지 않기만을 빌어야 할 것 같았다.
사무실로 돌아오자 삼삼오오 모여 있던 팀원들의 눈이 일시에 재희에게 쏠렸다. 오전부터 내내 소명을 만난다고 자리를 비웠으니,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호형이 가장 먼저 목을 뽑아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재희가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젓자 찬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여 MD 보통 사람 아니라니까.”
사무실의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찬수가 즉시 손뼉을 딱딱 쳐 팀원들의 주의를 돌렸다.
“어차피 크게 기대한 건 아니었잖아. 만약에 안 되면 인터넷으로 실시간 스트리밍이라도 돌리면 돼.”
“그러지, 뭐. 방송국에서 나가야만 방송인가.”
현진이 그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래도 속을 알아주는 팀원들 덕에 바닥을 치려던 기분이 그 직전에 멈췄다. 자리에 앉은 재희는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윤이 보이지 않았다.
“김 피디는?”
민혜가 대신 대답했다.
“잠깐 나갔다 온다고 나가더니 아직 안 오네. 저녁 먹을 시간인데.”
“우선 다들 저녁 먹고 와.”
재희는 서랍에서 법인카드를 꺼내 현진에게 건넸다. 현진이 과장된 표정으로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니 카드를 흔들었다.
“야, 내가 뭘 긁을 줄 알고 이걸 줘?”
“회사 다 같이 관두는 김에 최후의 만찬이나 하시죠.”
재희가 툭 내뱉자 현진이 미친놈, 하며 재희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재희가 아야, 하고 맞은 이마를 문지르자 현진이 짐짓 삿대질을 했다.
“최후는 무슨, 내가 기어이 이 법인카드 다시 와서 쓰고 만다. 확 꽃등심이나 구울까 보다.”
팀원들이 낄낄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팀원들을 따라 나가려던 민혜가 꼼짝도 않고 있는 재희를 보더니 물었다.
“안 가?”
“나중에. 갔다 와.”
민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뭔가 말하려다 알았어, 하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삽시간에 조용해진 사무실에 혼자 앉은 재희는 창가로 몸을 돌려 앉았다. 어둑해진 도시에 하나둘씩 별무리처럼 빛이 떠올라 야경을 수놓기 시작했다.
손을 깍지 끼어 뒷머리를 받친 재희는 먼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소명의 협조 없이 생방송을 한다는 건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했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저녁 먹으러 간 사람들이 이렇게 빨리 온 건가 싶어 뒤를 돌아보자, 품에 웬 상자 하나를 안고 선 윤이 눈에 들어왔다. 놀란 재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어, 김 피디. 어디 갔다 온 거야? 그건 또 뭐고?”
“선배 만났어요.”
윤이 자기 책상 위에 상자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그 말에 귀를 의심한 재희는 바로 윤을 다그쳤다.
“서 피디? 연락됐어? 지금 어디 있대?”
“어머님 댁에요.”
그 말에 팽팽하게 당겨졌던 불안감이 한순간 느슨해졌다. 정언이 이렇게까지 연락이 안 된 건 처음이라 혹시 나쁜 생각이라도 한 건 아닌지, 엄대진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른 건 아닌지 내내 걱정하던 참이었다.
“좀 괜찮아? 상태가 어때?”
“몸이 많이 안 좋다고, 오늘은 아파서 아예 연락을 못 했던 것 같더라고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쉰 재희가 묻자, 차분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는 걸 보니 정언의 상태가 걱정한 것만큼 나쁘지는 않은 듯했다. 다시 의자에 풀썩 앉은 재희는 등을 기댔다.
“그래도 어머님 댁에 있다니까 다행이네. 애 잘못되는 줄 알고 간이 콩알만 해졌어, 진짜. 거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혹시나 해서 가게로 전화해 보고…….”
윤이 말끝을 약간 흐렸다. 그제야 가게 이름을 떠올린 재희는 아, 하며 눈썹을 좁혔다. 윤이라도 거기 생각이 미친 게 다행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윤이 재희를 마주 보았다.
“저, 그리고 선배한테 생방송 얘기는 했는데 선배가 못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이유를 물을 필요도 없는 말이었다. 그 상황에서도 방송 걱정을 했나 싶어 속으로 혀를 내두른 재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설마 내가 방송 나오라고 닦달할까 싶어서 그런대? 그런 거 걱정하지 말고 쉬고 싶은 만큼 쉬라고 해. 그 성격에 보나마나 방송 나가야 되는데, 그러면서 속 끓이고 있을 거 뻔한데. 하여튼 서 피디 진짜 왜 그렇게 자기 생각을 안 해?”
정언이 들었다면 선배나 잘 하라고 할 소리를 내뱉은 재희는 팔짱을 끼었다. 정언의 요령 없는 성격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속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면 스튜디오에 김 피디가 나가는 게 맞는데, 할 수 있어?”
잠시 사이를 둔 재희가 화제를 돌리자, 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되물었다.
“제가요?”
“뭘 그렇게 놀라. 내가 설마 2년 차를 생방송에 혼자 던져 놓을까 봐 그래?”
재희가 웃는 얼굴에 윤이 눈치를 보더니 입술을 잘근거렸다. 윤 정도면 화면에 최적화된 비주얼이라고 할 만했지만, 방송도 한 번 안 해본 생 초짜를 심지어 생방송에 던져 놓을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해야 되면 해야죠.”
가끔 사람을 이렇게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건 천성인 모양이었다. 해야 되면 하겠다고? 윤의 대답을 곱씹은 재희는 하하, 하고 웃는 소리를 냈다.
“자세 좋네.”
어떤 상황이 생길지는 알 수 없었고, 윤이 얼마나 제 역할을 해 줄지도 미지수였으나 일단 그 태도에 마음이 놓였다. 재희는 턱으로 윤이 책상 위에 올려놓은 상자를 가리켰다.
“그건 뭐야?”
“아, 선배가 아버님 유품이라고 하던데요. 엄대진 관련 자료도 있는데 선배가 직접 확인 못 할 것 같다고 해서요.”
“서현국 기자님?”
생각도 못 한 말에 멈칫한 재희는 윤을 재촉했다.
“그럼 일단 뭐 있는지 빨리 확인해 봐. 송 작가 저녁 먹고 들어오면 바로 반영해서 최종 수정 들어가게.”
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상자를 안고 회의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사이 팀원들이 저녁을 먹고 돌아왔다. 재희에게 자료 이야기를 들은 민혜는 즉시 회의실로 달려갔다. 저녁 내내 회의실에 틀어박혀 있던 민혜가 고개를 내민 건 열한 시가 다 되어서였다. 민혜는 흥분한 말투로 재희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김 피디가 가져온 서현국 기자님 자료 있잖아. 이거 엄대진이 차명으로 현재 진송신도시 부지 매수했다는 증거 자료야. 강 피디는 이런 게 갑자기 어디서 났어? 강 피디가 줬다며?”
민혜의 물음에 재희는 뭐, 하며 얼버무렸다. 윤이 민혜에게도 숨긴 모양이었다. 다행히 출처가 정말 궁금한 건 아니었던 듯 민혜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인터뷰 녹음된 게 중요한 거더라고. 인터뷰이가 엄대진이 진송신도시 부지 매입할 때 명의 빌려 준 사람인데, 황영토목이라는 하청업체 간부. 지금은 폐업한 업체인데 엄대진이 수도권 올라오면서 부지 매입할 당시까지는 규모가 상당히 있었대. 천안 거점이고 충청도 지역 하청 위주로 한 업체라는데 누구 생각나지 않아?”
천안 거점 업체, 충청도 지역 하청 위주…… 머릿속에 바로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재희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황영토목 오너 이름이 뭐야?”
“정관수.”
“정보현 아버지야?”
민혜가 휘파람을 불며 손뼉을 짝짝짝 쳤다.
“캬, 역시 눈치 빨라. 내가 그래서 강 피디 사랑하잖아.”
“나 사랑하지 마. 상처 받아. 나 나쁜 남자인 거 알면서 왜 그래. 아무튼 그림 쓸 만하겠어?”
진지한 얼굴로 농담을 던지자 민혜가 뭐라니, 하며 질색했다. 쿡쿡대며 웃는 재희에게 손가락질을 한 민혜가 대답했다.
“증거 자료 바로 첨부해서 대본 수정하고 VCR 잠깐 추가하면 될 것 같아. 일 크지 않으니까. 아무리 늦어도 금요일 밤이나 토요일 오전까지는 충분히 되겠어.”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자 민혜가 더 가까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여 MD님이 아무래도 안 되겠대?”
“송출하고 부조까지 엮이는 거니까 좀 그런가 봐.”
“그것도 그렇긴 하네. 그러면 어떻게 하지?”
“일단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이라도 생각해 보자고. 시청자 수는 비교 안 되겠지만 우선 방송한다는 게 중요하니까. 인터넷 중심으로 방송 직전에 커뮤니티나 SNS에 실시간 주소 싹 돌려서 홍보하고.”
민혜의 표정에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재희는 손을 뻗어 민혜의 어깨를 두드렸다.
“일단 편집은 내가 할 테니까 송 작가는 그만 들어가. 고생했어.”
알았어, 하고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한 민혜가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손을 흔들며 사무실을 나갔다. 회의실에서 나온 윤에게도 퇴근하라고 말했으나, 윤은 잠깐만 자고 올라오겠다며 곧 숙직실로 내려갔다.
빈 사무실이 고요했다. 다른 피디들은 내일 시사를 위해 편집실에서 머리를 맞대고 있는 중이었다. 커피라도 한 잔 마셔야겠다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재희는 정수기 앞에 섰다. 컵에 믹스커피 두 봉지를 뜯어 넣고 막 뜨거운 물을 받고 있을 때였다. 사무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강 피디.”
그 목소리에 들고 있던 컵을 떨어뜨릴 뻔한 재희는 재빨리 컵을 내려놓고 시선을 들었다. 소명이었다. 아까 퇴근한 줄 알았는데, 어떻게 된 건가 싶어 까닭 없이 불안해졌다.
“아, 네. 안 들어가셨습니까?”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소명을 마주 보자,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선 소명이 팔짱을 끼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한동안 침묵하던 소명이 안경 너머의 날카로운 눈으로 시선을 맞춰 왔다.
“자신 있어?”
저도 모르게 되묻자 소명이 다시 한 번 말했다.
“회사 제자리로 돌려놓을 자신 있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