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66
266화.
가슴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재희는 저도 모르게 소명을 불렀다.
“MD님.”
“다들 자기 자리에서 자기 일 하는 게 원칙이다, 내 생각은 그래.”
소명이 쯧, 하고 혀를 차며 이마 부근을 긁적였다.
“여기가 강 피디 자리잖아. 강 피디 같은 사람들 징계 받고 자기 자리도 아닌 주조에서 모니터링하는 꼴 더 보기 싫어. 나도 내 밥그릇 챙겨야 되는 사람인데, 그런 식으로 자리 뺏기는 것도 불쾌하고.”
이건 사실상의 허락이었다. 입이 바짝 말랐다. 소명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섞어 말했다.
“토요일 밤에 우리 조가 들어갈 거고, 다른 MD들도 동의했어. 지금 시보국 인력 부족이라고 들었는데, 부조 들어갈 엔지니어 필요하면 믿을 만한 사람들 불러 줄게.”
“지금 그 말씀은, 그러면…….”
“나한테도 다음 없어. 이거 방송국 역사에 없는 일이라고.”
허락하기만 한다면 당장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이었다. 소명이 내뱉었다.
“한 번으로 뒤집을 자신 없으면 지금 말해.”
“할 겁니다.”
“할 수 있습니다.”
그 한 번의 기회를 절대 놓칠 수는 없었다. 재희를 빤히 보던 소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사무실을 나가는 소명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멍하니 서 있던 재희는 긴 숨을 뱉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불이 꺼진 방 안은 고요했다. 닫아 놓은 커튼 너머로 희미하게 가로등의 불빛이 스몄다. 정언은 창을 등지고 웅크린 채 벽에 아롱지는 빛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그만해도 된다고, 그게 뭐 어떠냐고 말하던 윤의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절대 그만두면 안 된다고, 포기하면 안 된다고 늘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것은 오랜 습관이었다. 멈춘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실 지금의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건 괜찮다는 말이었다. 윤이 그 말을 하기 전까지는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렇게 말해 준 윤 앞에서 엉망으로 무너진 건 그래서였다.
아까의 일이 떠올라 창피해진 정언은 이불을 더 당겨 얼굴을 묻었다. 아직 열이 남은 건지 머릿속이 빙글거렸다. 눈을 감고 한동안 누워 있던 정언은 문득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효명이 문틈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씻고 나온 듯 머리칼에 아직 물기가 있었다.
정언이 잠들지 않은 것을 안 효명이 방에 불을 켰다. 어두웠던 방 안이 삽시간에 하얗게 밝아졌다. 효명은 침대가에 걸터앉으며 정언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효명의 손이며 옷소매에 깊숙이 배어 있는 고소하고 부드러운 냄새가 공기 속을 떠돌았다.
“열은 좀 내렸어? 그러게 몸 관리 잘 해, 맨날 괜찮다고만 하지 말고.”
“괜찮다니까.”
정언이 입술을 달싹이자 효명이 혀를 찼다.
“으이구, 하여튼 미련해서는…….”
침대 곁의 티슈를 두어 장 뽑아 이마에 배어 나온 식은땀을 닦아 준 효명이 화제를 돌렸다.
“김 피디 저녁이라도 먹여서 보냈어야 되는데 어떡하니? 여기까지 왔는데.”
어지간히 안타깝다는 말투였다. 그 속이 뻔히 들여다보여 속으로 한숨을 내쉰 정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나중에 밥 사지, 뭐.”
“근데 다시 봐도 사람이 너무 괜찮아, 얘.”
아니나 다를까였다. 누운 채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효명을 올려다보던 정언은 코끝으로 웃는 소리를 냈다.
“뭘 얼마나 봤다고 괜찮다고 그래. 이상한 애면 어떡하려고 오라고 그랬어?”
“딱 봐도 그런 애 아니더구만. 딸 있는 엄마가 아무 남자나 집 앞에 오라고 할까 봐?”
효명이 정색하는 얼굴에 정언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얼굴 보고 그런 거 아냐?”
답지 않게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는 효명을 본 정언이 고개를 흔들며 그럼 그렇지, 하고 중얼거리자, 효명이 즉시 항변했다.
“아니, 이왕이면 다홍치마 아냐. 잘생긴 놈은 얼굴값 하고 못생긴 놈은 꼴값한다는 말도 몰라? 이왕 하는 거 얼굴값 하는 게 낫지.”
“아, 됐어.”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윤을 생각하니 다시 머리가 지끈거렸다. 손을 내저은 정언이 말을 끊었으나, 효명은 굴하지 않았다. 이불 위로 정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른 효명이 은근히 기대감에 찬 얼굴로 물었다.
“근데 진짜 너 좋아하는 거 아니니? 누가 직장 선배 연락 안 된다고 걱정돼서 집에 전화하고 아프다니까 찾아오고 그래.”
“왜. 탐나?”
정언이 되묻자 효명이 정언의 어깨를 찰싹 쳤다. 정언이 아야, 하며 어깨를 문지르자 효명이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그럼 안 나? 인물 좋지, 싹싹하지, 너희 팀 피디 될 정도면 똑똑하기도 할 거 아냐. 내가 한 삼십 년만 젊었으면…….”
“엄마는 삼십 년 젊어져도 아빠 만날걸.”
“그건 그렇지.”
그 말을 바로 수긍한 효명은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다가 팔짱을 끼었다.
“너희 회사 인사팀이 나랑 보는 눈이 비슷한 거 아닐까?”
“최효명 여사 안목이 오죽하겠습니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툭 내뱉자 효명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러니까 서정언 같은 딸 낳았지.”
혼자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한참 웃어 대던 효명이 정언에게 물었다.
“내일은 회사 갈 거야?”
“아직, 모르겠네.”
어정쩡하게 대꾸한 정언은 나오려는 한숨을 눌렀다. 윤이 그렇게 말해 준 게 마음의 위로는 되었으나, 그렇다고 정말 안 가는 건 또 마음에 걸렸다. 재희에게서도 윤에게 들었다며, 힘들면 얼마든지 더 쉬어도 된다는 메시지를 받은 뒤였다.
차라리 당장 오라고 들볶으면 마음은 더 편할 텐데, 하고 속으로 생각한 정언은 미간을 문질렀다.
“휴가 냈어?”
효명의 말에 정언은 대답 대신 뭐, 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둔 효명이 침대 머리맡에 앉은 채 정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이 어쩐지 속을 다 들여다보는 것 같아, 공연히 눈을 피한 정언은 이불 속에서 손을 꼼지락거렸다.
“무슨 일인지 아직도 엄마한테 말하기 싫어?”
효명의 말에 가슴이 덜컥했다. 아무리 떨어져 살았대도 엄마를 속인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일은 무슨.”
둘러댄 말에도 효명은 순순히 넘어가지 않았다.
“아무 일 없는 사람 얼굴이 아냐, 너. 김 피디도 아무 때나 집 앞까지 쫓아오겠어? 무슨 일 있으니까 걱정돼서 찾아왔겠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퍼뜩 놀란 정언은 효명을 쳐다보았다. 효명이 그런 정언을 빤히 보다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왜, 눈치가 너무 빨라서?”
“……엄마는 아빠한테 다른 일 하라고 말해 본 적 없어?”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서둘러 말을 돌리자 효명이 별소리를 다 듣겠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 정언은 몸을 반쯤 일으켜 침대에 기대앉았다.
“엄마 만났을 때는 대학생이었다며. 기자 취직했을 때 다른 일 하라고 할 수도 있었잖아.”
“너희 아빠가 뭘 하면 안 그랬을까 봐?”
코웃음을 치더니 옛 기억을 되짚는 듯 잠시 눈을 굴리던 효명이 한숨을 섞어 입을 열었다.
“나라고 너희 아빠가 기자 일 해서 좋은 게 뭐 있었겠어. 집에 일찍 오기를 해, 그렇게 일하면서 돈을 수억씩 벌기를 해. 아빠 얼굴을 못 보니까, 내가 너 어릴 때 저녁 뉴스 나오면 아빠 보여 준다고 맨날 안고 있어서 시사 프로 피디가 됐나 싶어 속상해 죽는 줄 알았다니까.”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그 장면들은 빛바랜 사진처럼 남아 있었다. 매일 밤 아홉 시가 되면 YBS 뉴스를 튼 효명은 어린 정언을 품에 안고 앉아 텔레비전을 보았다. 뉴스에 현국이 나올 때마다 효명은 정언의 손을 잡고 화면을 가리키며 아빠야, 아빠, 하고 말하곤 했다.
처음 YBS 시사보도국 피디에 합격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효명이 어릴 때 뉴스 보여 주지 말 걸 그랬다며 투덜거리던 건 농담이 아니었던 듯했다. 효명이 할 수 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그런데 서현국 그 성격에 어딜 갔어도 그랬을 거 아냐. 그냥 회사 갔어도 노조위원장 같은 거 안 했겠니? 그 꼴 못 봐서 집에서 놀라고 했어도 동네 통반장하면서 민원 수리하러 다녔을 거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아이고, 그것도 내 팔자다 싶었지. 너희 할아버지, 할머니도 못 말린 걸 내가 어떻게 말려. 할아버지가 너희 아빠 대학생 때 데모하는 거 걸려서 한 번만 더 데모하면 팔다리를 분질러 버린다고 했더니 그럼 휠체어 타고 데모하러 다닌다고 그랬다잖아.”
정언은 문득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만년 문청 같은 얼굴 어디에 그런 강단이 있었는지 지금 와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었다. 정언은 부러 어깨를 으쓱했다.
“내 성격이 어디서 왔나 했네.”
“그럼 나 닮은 줄 알았어? 얘, 너희 엄마는 아주 교양 있는 사람이야. 어디다 비교하니?”
효명이 짐짓 정색을 하며 눈을 흘겼다. 시선이 마주치기 무섭게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의 끝이 사그라지자 방 안에는 다시 옅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정언은 가만히 자기 머리칼을 쓰다듬는 효명을 마주 보았다.
내내 맴도는 생각들은 어느 쪽으로도 쉽게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빠에 대해 말해야 할까. 어차피 방송이 나간다면 알게 될 사실이었다. 그 전에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게 맞다는 걸 알면서도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엄마, 있잖아.”
정언은 한동안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효명이 머리칼을 만지던 손을 내리며 정언을 마주 보았다.
“왜 그래, 겁나게.”
“있잖아, 만약에…… 만약에 그때 아빠가 안 죽었으면 어땠을 거 같아?”
주저하며 물은 말에 효명이 눈썹을 좁혔다.
“얘가 진짜 이상하네. 왜 그런 소릴 해?”
“그냥 만약에 그랬으면 어땠을 거 같냐고.”
“이제 와서 그런 얘기하면 뭐하니.”
다 부질없다는 듯 효명이 손을 내저었다. 그 손은 힘없이 무릎 위로 떨어졌다. 허공을 응시하던 효명은 혼잣말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지. 내가 너희 아빠한테 적금 만기되면 새 차 사준다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그랬는데. 딱 한 달만 더 있었으면 만기였다고, 그게. 그거 이자 얼마 차이 나는 게 뭐라고, 그냥 맘먹었을 때 적금 깨서 사줄걸. 그랬으면 안 죽었을 수도 있는데. 그 생각을 천 번은 더 했어.”
발인을 마치고 돌아온 날 밤, 등을 돌리고 돌아누운 효명이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뇌리를 지났다.
「진작 좋은 차 한 대 사줄걸.」
마치 어제 일처럼 당혹스러울 정도로 생생하게 떠오른 기억이 퍼뜩 잘 드는 칼날처럼 심장 위를 긋고 지났다.
정언은 굳은 듯 효명의 옆얼굴을 보았다. 어느새 제법 나이가 든 그 옆모습에서 젊은 효명의 흔적이 떠올랐다가 희미해졌다. 효명이 공연히 눈가를 두어 번 문질렀다.
“너 취직하자마자 차 사준 거 그 돈이야. 내가 한이 맺혔다고. 나 때문에 죽었나 싶어서.”
그 목소리 끝이 떨렸다. 정언이 방송국에 합격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효명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정언을 불러 근처의 자동차 대리점에 간 것이었다. 효명은 차가 얼마든 상관없으니 무조건 튼튼하고 좋은 걸로 사라고 강권했었다.
효명은 구두쇠까지는 아니더라도 알뜰하기로는 이름난 사람이었다. 장사가 잘 되는데도 굳이 가게 규모를 늘리지 않는 건 그 까닭도 있었다.
그런데 효명은 그날 대리점에서 몇 천만 원 하는 차를 일시불로 정언에게 뽑아 주었다. 평소의 효명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때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날의 일을 효명이 계속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다는 걸 짐작조차 한 적이 없었던 탓이었다. 머릿속이 차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