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67
267화.
“왜 엄마 때문이야, 그게.”
목소리가 잠겨 나왔다. 정언은 그것을 감추기 위해 짧게 헛기침을 했다.
“엄마 때문 아냐.”
서둘러 부정하자 효명이 코 밑을 문지르더니 공연히 새침하게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고? 아빠가 그래? 나 때문에 죽은 거 아니라고?”
“응. 꿈에서.”
정언이 대답하자 효명이 픽 웃더니 팔짱을 끼었다.
“하이고, 매정한 인간. 마누라 꿈에는 안 와도 딸은 보고 싶은 모양이지?”
“엄마 꿈에 나오면 혼날까 봐 그러겠지.”
“혼날 짓을 하질 말아야지, 그럼. 창창한 마누라 두고 혼자 가긴 왜 가?”
“빨리 다른 남자 만나지 그랬어. 아직 안 늦었는데 왜. 인기 많잖아, 엄마.”
농담처럼 던진 말에 효명이 턱 끝을 치켜들었다.
“내가 눈이 좀 높아?”
그러시겠죠, 하고 대꾸한 정언은 뒤에서 효명의 허리를 안으며 등에 얼굴을 묻었다.
“엄마랑 같이 자도 돼?”
“다 큰 게 왜 그래.”
징그럽게, 하고 덧붙이면서도 효명은 굳이 정언을 밀어내지 않았다. 침대로 들어온 효명이 몸을 돌려 정언을 마주 보았다. 정언이 이불 속으로 파고들자, 효명은 정언의 이마를 다시 한 번 만져 보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직도 열 좀 있네. 푹 자, 얘. 너무 무리해서 그래.”
겨우 입술을 달싹인 정언은 눈을 감았다. 아직 진실을 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현국의 죽음이 아직까지도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는 효명에게, 어떻게 말해야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을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이미 자신이 받은 고통을 생각한다면, 어차피 어떤 방식으로든 진실을 알게 된 순간 닥칠 충격을 피할 방법은 전무했다. 정언이 내내 거기 대해 생각하는 사이, 그런 속내를 알 리 없는 효명의 손길이 정언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토닥였다.
언제 깜빡 잠이 들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불현듯 놀라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효명은 이미 아침에 가게를 열러 나간 모양이었다. 꿈조차 없이 깊게 잠든 건 오랜만이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앉은 정언은 손을 뻗어 옆에 놓아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사정을 모르는 팀원들에게서 메시지가 몇 개 들어와 있었다. 정언은 가장 위에 뜬 민혜의 메시지를 보았다.
― 정언, 어디가 얼마나 아파서 며칠째 결근이야? 내가 죽 사가지고 갈까?
아마 많이 아파 출근을 못 한다고 윤이 대충 둘러댄 모양이었다. 정언은 괜찮아요 그냥 몸살이 심해서, 하고 답장을 보내고는 눈꺼풀 위를 눌렀다. 눈가가 물기 없이 뻑뻑했다. 잠시 고개를 뒤로 젖히며 침대 헤드에 기댄 정언은 핸드폰에 들어온 메시지를 차례로 확인했다.
― 오늘 오후 5시에 신촌에서 이희경 씨하고 잠깐 만나기로 했어요. 마침 근처에 약속이 있으시대요.
윤의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정언은 윤과의 대화를 되짚어 보았다. 수아가 선배랑 저한테 뭐 주고 싶은 게 있다고 그랬대요, 하던 것이 떠올랐다. 지금은 방송 생각에서 멀어지고 싶었으나, 수아가 마음에 밟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수아와 리아가 아니었다면 시작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가족을 잃고 일상을 지키려 하는 희경의 필사적인 모습이 불러일으킨 기시감만 아니었다면.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이 결국 끝없이 돌고 돌아 다시 자신에게 온 건 운명일까.
운명이란 말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이 상황을 설명할 다른 단어가 없었다. 민혜가 그 많은 게시판의 글 중 희경의 것을 가져오게 된 것도, 자신이 꼭 이 사건을 취재하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윤이 팩트를 가져오겠다며 재희 앞에서 말한 것도 전부 이렇게 되기 위해서였다면.
윤의 메시지 위에 시선을 두었던 정언은 알았어, 하고 짧은 답을 보냈다. 커튼을 친 방 안을 가득 채운 옅은 어둠이 눈꺼풀 위로 부드럽게 얹혔다. 머릿속이 가는 실을 아무렇게나 얽어 놓은 듯 복잡했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오후까지 내내 웅크리고 누워 있었으나 깜빡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한 통에 머리가 무거웠다. 몇 번인가 효명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밥은 먹었냐는 물음에 이따가, 하고 연신 대답했으나 입맛이 있을 리 만무했다.
윤에게 곧 출발한다는 연락을 받은 건 네 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부스스 몸을 일으킨 정언은 욕실에서 씻고 나와 화장대 앞에 앉았다. 늘 그다지 생기 있는 느낌은 아니었으나, 최근 며칠 사이 얼굴이 더 말이 아니었다.
희경이나 아이들이 보고 놀라지나 않을까 싶어, 마지못해 대강 화장을 한 정언은 약속 장소인 신촌역 근처의 프랜차이즈 카페로 향했다. 커피 두 잔을 시키고 창가 자리에 앉자, 곧바로 입구로 들어선 윤이 두리번거리며 정언을 찾았다.
정언이 손을 들어 보이자 윤이 후다닥 달려와 맞은편에 앉았다. 윤의 얼굴에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마 철야를 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생글생글 웃는 건 여전했다.
“방송 준비는?”
커피를 앞으로 밀어 놓으며 물은 말에 윤이 목소리를 낮췄다.
“주조하고 협의됐대요. 어제 구성안 수정하고 강 피디님이 추가 편집 시작하셨어요. 다른 선배들은 페이크 영상 가지고 조금 전에 이사회 시사 들어가셨고요.”
주조정실을 어떻게 설득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주조정실의 여소명 MD라면 정언도 잘 알고 있었다. 어지간해서는 넘어가지 않을 사람인데 협조해 준 걸 보니, 상황이 제대로 돌아가는 건 확실해 보였다. 정언은 눈가를 누르며 말끝을 흐렸다.
“생방송이면 스튜디오 나가야 되는데…….”
담당 피디가 그 주의 아이템을 진행하도록 되어 있었기에, 이제 와서 진짜 생방송을 진행한다니 가장 먼저 그 걱정이 들었다. 아무래도 안심이 안 된다는 얼굴이었는지, 정언을 가만히 보던 윤이 말했다.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다른 생각하지 마세요. 무리하실 필요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본인도 무리하고 있는 얼굴이라 헛웃음이 났다. 정언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자, 그걸 부정이라고 생각했는지 윤이 다시 한 번 정언을 설득했다.
“진짜예요. 선배가 신경 쓰실 거 하나도 없다니까요.”
물론 그렇게 말하는 윤의 마음이 뭔지 정언 역시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정언은 대답 대신 커피를 마시며 말을 돌렸다.
“어제 는 어떻게 나갔대?”
“이사진 편인 제작진들은 다 제작 거부하고 남은 인원들끼리 진행했대요. 미리 큐시트 B안 만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오늘도 그렇게 나갈 모양이던데요. 이번 주까지 서온건설 특종 보도한다고 미리 계속 예고했고요.”
유동욱 사장과 백선경 국장이 부재중인 상황이었다. 한동을 비롯한 사람들이 남은 방송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일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위에서는 어떻게든 막으려 하겠지만, 이미 시작된 여론을 멈추기는 힘들 터였다.
더구나 이미 는 매번 다음 방송을 예고하고 있었다. 여기서 방송을 강제로 멈추면 역효과였다. 위에서도 그것을 알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일 게 틀림없었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정언은 윤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선배 없어도 세상 잘 돌아가고 있어요. 혼자 세상 구할 생각 안 하셔도 돼요.”
정언은 눈을 들어 윤을 마주 보았다. 그 표정은 진지했다. 한참을 물끄러미 응시하자, 윤이 의아한 듯 물었다.
“왜요?”
“정곡 찔려서.”
정언은 짧게 대답했다. 윤의 말대로였다. 자신 없이도 세상은 돌아가고 있었다. 마지막 방송을 하는 그 자리에 꼭 자신이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었다. 그걸 알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도망치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물러나게 되는 게 싫었다. 정언은 입술 안쪽을 이로 누르며 표정을 감췄다. 커피를 반쯤 마셨을 때, 입구로 희경이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섰다. 먼저 윤을 알아본 수아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어어, 한 윤이 얼른 수아를 안아 들었다.
“그렇게 뛰면 넘어져, 수아야.”
안녕하세요, 하고 수아가 뒤늦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뒤를 따라온 희경이 정언과 윤에게 가벼운 묵례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네, 하고 웃어 보인 정언은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수아, 리아, 잘 있었어?”
정언이 묻자 리아가 혀 짧은 발음으로 두 손을 앞에 모으고는 인사를 했다.
“피디님, 안녕하세요.”
처음 만났을 때보다 확연히 자란 느낌이었다. 애들은 금방 크는구나, 하고 속으로 생각한 정언은 윤에게 눈짓을 했다. 윤이 바로 커피 한 잔과 아이들을 위한 주스를 사서 돌아왔다. 깜짝 놀라 괜찮은데, 하고 손을 내저은 희경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오늘 아빠 생일파티 하고 왔거든요.”
“얘기하셨어요?”
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 말이 없던 수아가 고개를 들어 윤과 정언을 올려다보았다.
“아빠가 멀리 가서 우리하고 이제 전화도 못 하고 우리 못 만나러 온대요.”
재회를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을 이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정언은 가만히 수아를 마주 보았다. 수아가 배시시 웃고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근데 아빠가 나랑 리아랑 엄청엄청 사랑한다고 전해 달라고 그랬대요. 아빠가 많이 보고 싶은데 거기는 차가 없고 무지무지 멀어서 어른 될 때까지는 못 온다고요.”
가슴 한쪽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문득 이진의 말이 떠올랐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고. 수아가 무슨 생각을 하며 그 말을 받아들였을지 불현듯 궁금해졌다. 정언은 가라앉는 목소리를 애써 다듬으며 웃어 보였다.
“수아는 괜찮아?”
수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괜찮아요. 나중에 어른 되면 아빠 보러 갈 수 있어요.”
“씩씩하네.”
윤이 기특하다는 듯 수아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주스 병을 따서 건넸다. 고맙습니다, 하고 두 손으로 병을 잡은 수아가 주스를 홀짝였다. 희경은 윤의 품에 안겨 있는 수아에게 손짓을 했다.
“수아, 피디님들한테 선물 드릴 거 있다며. 피디님들 많이 바쁘시니까 얼른 드리고 가자.”
수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시던 주스 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윤의 무릎에서 내려온 수아가 손을 잡아끌었다. 얼결에 윤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수아가 멀리 떨어진 구석 자리를 가리키며 정언에게도 손짓을 했다.
“왜? 엄마랑 리아가 알면 안 돼?”
정언이 농담처럼 묻자 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진지한 표정이었다. 잠시만요, 하고 희경에게 양해를 구한 정언은 수아와 함께 구석 자리로 향했다.
뒤를 돌아본 수아가 희경이 이쪽을 보는지 안 보는지 확인하더니 메고 온 조그만 아동용 핸드백을 만지작거렸다. 규형이 사 주었다는 빨간 가방이었다. 늘 몸에서 절대 떼놓지 않는다더니,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빨간 에나멜 백을 얼마나 가지고 다녔는지, 끈 부분에 손때가 까맣게 탄 채였다. 수아가 조심스럽게 가방을 열더니 안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사탕 같은 건가, 하고 무심코 생각했으나 안에서 나온 건 뜻밖의 물건이었다.
카드 하나가 들어갈 법한 작은 봉투였다. 윤 역시 이게 뭔가 싶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뭐야?”
“아빠가 줬어요.”
수아가 소곤거렸다. 이상한 예감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정언은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