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68
268화.
“아빠가?”
정언의 목소리가 크다고 생각했는지, 수아가 입술에 손가락을 대며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했다. 수아가 몸을 숙여 정언과 머리를 맞대며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아빠가 이거 주면서, 수아가 갖고 있다가 나중에 누구 주라고 그랬어요.”
“누구한테? 왜 엄마한테 안 드렸어?”
엄마 이야기가 나오자 수아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아빠가 나중에 내가 진짜진짜 믿을 수 있는 어른한테 주는 거라고 그랬어요. 엄마는 알면 안 된대요.”
“엄마가 알면 안 된다고 했다고?”
정언이 재차 확인하자 수아가 입술에 댄 손가락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비밀이에요. 엄마한테 말하면 안 돼요.”
수아는 조그만 손을 휘적여 얼른 집어넣으라는 표시를 했다. 윤이 서둘러 그 봉투를 셔츠 포켓 안에 넣었다. 완전히 봉투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수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리고 있던 희경이 수아에게 손짓을 했다.
“수아, 선물 드렸어?”
희경에게 달려간 수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윤이 수아의 머리를 쓸어 주고는 빙긋 웃었다.
“고마워. 착하네, 수아. 바쁜 일 끝나면 이모랑 삼촌이랑 또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
수아가 네, 하고 대답했다. 희경이 민망하다는 얼굴을 했다.
“바쁘신데 죄송해요.”
“아니에요.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하죠. 내일 방송 나갈 거니까 꼭 봐 주세요.”
윤이 미소를 지었다. 수아가 무엇을 주었는지 희경은 알 리 없었다. 기껏해야 편지 같은 것이리라 생각하는 듯했다. 희경이 아무 의심 없는 얼굴로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 그만 갈게요.”
“조심해서 가세요.”
윤이 희경을 입구까지 배웅했다. 희경이 두 아이를 데리고 나가는 것을 확인한 윤이 서둘러 자리로 돌아왔다. 포켓에서 봉투를 꺼낸 윤이 정언의 맞은편에 앉았다. 봉투를 열자 안에서 나온 건 조그만 메모리카드 하나였다.
생각도 하지 못한 물건이었다. 왜 규형이 수아에게 이런 걸 줬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순간 당황한 탓에 짧은 침묵이 지났다.
“이게 뭐지? 어디서 나온 거야?”
혼잣말처럼 자문한 정언은 손톱만 한 메모리카드를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핸드폰의 메모리카드라면 이미 초반에 확보한 지 오래였다. 혹시 발견되지 않을 때를 대비해 만든 사본인가 싶었다. 잠시 그 메모리카드를 들여다보는 사이, 윤이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눈을 크게 떴다.
“블랙박스?”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윤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이거 혹시 블랙박스 메모리 아니에요? 박규형 씨 차 블랙박스 확인하러 갔을 때 거기 이게 없었잖아요.”
윤의 말대로였다. 자신들이 차를 확인했을 때 규형의 블랙박스 메모리는 이미 제거된 상태였다. 희경의 말로는 규형이 블랙박스 고장이라는 말을 했다고 했다. 그러나 만약 블랙박스가 고장 난 적 없었다면, 단지 규형이 미리 메모리를 빼 두었던 것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정언은 윤에게 되물었다.
“블랙박스 메모리를 미리 빼서 수아한테 줬다고?”
“주변 사람들이나 경찰 못 믿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애는 뭔지 모르니까. 괜히 이희경 씨가 갖고 있다가 그런 사람들한테 넘어갈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애한테 맡겨 두고 믿을 수 있는 어른한테 주라고 한 거 아니에요? 최유림 변호사님이나 임형원 기자님 생각하고?”
긴장한 듯 윤의 말이 빨라졌다. 일단 확인해 보면 알 일이었다. 윤이 서둘러 자기 핸드폰의 슬롯에 메모리카드를 끼워 넣었다. 안에 든 것은 동영상 파일이었다. 기본적으로 생성되는 파일명과 달리, 가장 위의 파일은 ‘중요’라고 파일명이 변경된 채였다.
뭔가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규형은 이미 녹취록과 내부 문서를 남겨 둔 뒤였다. 이게 정말 블랙박스 메모리라면, 이런 물건을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수아에게 주었을 리 없었다. 윤이 서둘러 동영상을 재생하고는 정언이 볼 수 있도록 밀어 놓았다. 곧 화면에 차 내부가 비쳤다. 뒷좌석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내부 촬영인데요?”
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차량 내부 촬영이 가능한 4채널 블랙박스인 듯했다. 정언은 영상을 유심히 보았다. 뒷좌석을 완전히 비추는 앵글이라, 운전석 쪽 사람은 어깨가 걸려 나왔다. 뒤창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풍경이 낯익었다.
“메이 주차장 같은데요.”
윤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 말대로였다. 화면 한쪽에 메이 간판이 약간 비치는 것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곧 운전석에 탄 사람이 시동을 걸고 내비게이션을 입력하는 소리가 났다.
“박규형 씨가 지금 타 있는 거지?”
“그런 것 같아요.”
정언의 물음에 윤이 수긍했다. 곧 화면 속에서 뒷좌석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안에 앉았다.
『박규형 과장님 맞습니까?』
동영상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또렷했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나 엄대진입니다.』
동영상 속 얼굴이 선명했다. 엄대진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확실한 장면이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커지며 귓전을 때렸다. 정언은 먹먹해지는 귓가를 꽉 누르며 숨을 골랐다.
마른침을 삼킨 윤이 볼륨을 조금 더 올렸다. 카페의 배경 음악 사이로 엄대진의 매끄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누군지 알아요?』
『아, 네. 저…… 의원님 아니십니까?』
대답하는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겁을 먹은 것처럼도 들렸다. 대진이 웃었다.
『조 계장이 그러던데, 요새 박 과장님이 좀 심란하신 것 같다고.』
짧은 침묵이 지났다. 대진이 다시 규형에게 물었다.
『왜? 지금 하는 일 때문에 그래요?』
규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언은 서둘러 기억을 더듬었다. 메이와 유란에서 확보한 VIP실 CCTV에서 대진이 직접 드나드는 영상을 본 기억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날은 일부러 규형을 만나기 위해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손 사장도 박 과장은 다루기 힘들다고 하던데.』
『……죄송합니다.』
그의 말에 규형이 주저하는 투로 사과했다. 대진은 아주 재미있는 말이라도 들은 양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지, 죄송할 일이 아니지.』
존댓말이 어느새 자연스러운 반말로 바뀌어 신경을 긁었다. 웃음기가 어려 있던 말투가 돌변한 건 다음 순간이었다.
『죄송할 일은 안 하는 게 맞지. 안 그래?』
퍼뜩 등으로 소름이 돋았다. 독사가 발목을 휘감아 올라오는 듯한 환각이 지났다. 대진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기자 만났다며?』
『변호사, 기자, 그런 사람들 만나고 다닌다며.』
대진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차 안이 순식간에 담배 연기로 흐릿해졌다. 연기를 뿜어낸 대진이 내뱉었다.
『박 과장, 정신 똑바로 차려. 부인 아직 젊던데. 애들도 어리고.』
『의원님.』
규형의 목소리가 떨렸다. 입 안이 말랐다. 가족을 가지고 이런 식으로 협박하는 그 비열함에 이가 갈렸다. 평범한 아내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두 딸의 삶 따위는 대진에게 그저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박 과장 죽고 부인까지 죽으면 애들은 누가 돌보나?』
다시 한 번 연기를 뱉은 대진이 창에 대고 담배를 비벼 껐다.
『나 뒤통수치려던 놈들 중에 아직 살아 있는 놈 없어. 시체도 못 찾은 놈 많고.』
규형을 직접 협박하러 온 것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현장 과장 한 사람이, 자기의 모든 걸 망가뜨릴까 두려워서. 분노와 좌절감이 한데 뒤섞였다. 단번에 발화점까지 올라간 감정들이 머릿속에서 들끓었다.
『조 계장하고 손 사장이 컨트롤이 안 된다고 하도 그러니까 내가 직접 만나러 온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네.』
『아직 의원님, 의원님 하지만 곧 대통령님, 대통령님 할 날 온다고.』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맞은편에 앉은 윤 역시 마찬가지였다.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은 듯 얼어붙은 윤은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박 과장 계속 이러면, 내가 대통령 되고도 살려 두겠어?』
대진의 입에서 나온 그 세 글자에 전신으로 차가운 감각이 끼쳤다. 그 자리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평범한 사람쯤 몇 명이든, 몇십 명이든 죽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의 욕망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죽인다고 하면 진짜 죽이는 거야. 농담이라고 생각하지 마.』
낮게 웃은 대진이 차 문을 열었다. 영상은 거기서 끊겨 있었다. 한참이나 말을 잃고 있던 윤이 겨우 정언을 마주 보았다.
“완전 라스트 샷이에요. 얼굴 너무 잘 보여요. 자기 입으로 이름도 말했고.”
뜨거워진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거대한 원심력이 수많은 감정들을 끌어들였다. 가장 마지막까지 남은 건 분노였다. 온몸이 떨렸다. 정언은 손을 말아 움켜쥐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으려니, 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정언에게 물었다.
“선배, 괜찮아요?”
“여기서 바로 송 작가님이랑 선배한테 영상 전송하고 사무실 들어가.”
지금 머릿속에 남은 생각은 오로지 하나였다. 정언이 몸을 일으키자 윤이 다급히 따라 일어나며 정언의 팔을 잡았다.
“데려다드릴게요.”
“아냐. 나 어디 좀 가 봐야 될 것 같아.”
윤의 손을 떼어 낸 정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윤이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딜 가신다고요?”
“이따가 다시 연락할게.”
대답 대신 정언은 바로 카페를 뛰어나갔다. 윤이 등 뒤에서 선배, 하고 외쳤으나 그 말은 들리지 않았다. 정신없이 가게 앞까지 달려온 정언은 세워 둔 자기 차에 시동을 걸었다.
금요일 퇴근 시간의 도로를 뚫고 달려간 곳은 서울 외곽의 한 절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정언은 법당에서 먼 봉안당으로 향했다. 현국의 기일이 아니면 거의 오지 않는 곳이었다. 어스름이 내린 뒤의 절은 고요했다. 멀리 법당의 등만이 손님을 맞았다. 추모관 앞의 경비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지만 사람은 없었다.
추모관 안으로 들어서자 천장까지 빽빽하게 똑같이 짜 넣은 안치단이 눈에 들어왔다. 안치단의 유리문 안쪽으로는 조그마한 유골함들이 나란했다. 간간이 걸린 색색의 조화들이 알록달록하게 눈을 어지럽혔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간 정언은 발을 멈췄다.
이렇게 서면 꼭 눈높이가 맞는 곳에, 아무 무늬 없는 유골함이 놓인 것이 눈에 들어왔다. 고 서현국. 이름과 생년월일만 적힌 유골함은 조촐했다. 누가 두고 간 것인지, 위로 걸린 작은 조화 리스의 꽃잎 끝은 살짝 바래 있었다.
정언은 유골함이 놓인 유리문 안쪽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유골함 곁에는 작은 액자가 있었다. 한 장의 가족사진. 열한 살 즈음, 세 식구가 공원으로 소풍을 나갔다가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 젊은 부부와 어린 소녀는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활짝 웃는 얼굴이었다. 소녀의 손에 들린 노란색 풍선이 선명했다.
정언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사진 속의 세 사람에게 이런 순간들은 더 오래, 더 많이 지속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깨져 버린 지 오래였다. 젊은 아내는 십수 년간 지워지지 않는 죄책감 속에서 살아야 했다. 어린 소녀에게는 아빠와 마지막 인사를 나눌 단 5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단 한 사람이, 오로지 자신의 욕망 하나만을 위해 얼마나 많은 가족을 그렇게 망가뜨린 것일까. 묻혀 버린 진실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엄마와 자신처럼 고통받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