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69
269화.
가끔 현국에게 어떻게 해야 되는 거냐고 묻고 싶은 순간들이 있었다. 지금이 그랬다. 그러나 대답은 이미 정해진 질문이었다. 정언은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선 채 유리 너머의 유골함을 응시했다. 정언아, 하고 부르던 현국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희미하게 맴돌았다.
「정언이 이름은 아빠가 지었지. 거짓말하고 남 속이는 사람 되지 말라고. 우리 딸은 아무리 무섭고 힘들어도 바른 말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을까.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사람 일이라지만, 어쩌면…… 언젠가 그런 날이 올 수도 있다고, 불행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단 한 번이라도 예감한 적 있었을까.
안경 너머로 보이던 현국의 슬픈 눈이 떠올랐다. 언제나 가장 나쁜 순간을 먼저 생각한다는 건, 가장 행복한 시절에도 닥쳐올 불행을 걱정한다는 건 무엇일까. 이제야 현국의 그 표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언은 그 자리에 다리를 접어 주저앉았다. 무릎에 얼굴을 묻은 순간 미처 참을 새도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눌러 참던 흐느낌이 터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정언은 어린아이처럼 소리를 내어 엉엉 울었다. 아주 오랫동안 쌓이고 쌓여 이제 단단해진 줄 알았던 벽이 심장에서 소리를 내며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온몸에 물 한 방울 남지 않을 만큼 울고 나서야 정언은 고개를 들었다. 바닥에 떨어진 눈물이 창백한 조명에 반짝였다. 간신히 몸을 일으키자 현기증이 났다. 속이 완전히 텅 비어 버린 듯한 감각이 아찔했다.
정언은 유골함 위의 유리에 손을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차가운 유리 위로 체온이 닿았다. 손끝을 짚은 자리마다 잠시 하얗게 습기가 어렸다가 곧 사그라졌다. 안개가 낀 것처럼 먹먹하던 머릿속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정언은 숨을 들이쉬었다. 동영상 안의 엄대진이 떠올랐다. 규형은 어떤 마음으로 그 증거를 남겨 놓았을까. 자신이 정말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그럴 수 없었을 게 분명했다.
희경이 아니라 수아에게 메모리카드를 맡긴 건 규형의 마지막 도박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수아가 아무에게나 그걸 주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도.
지금처럼 자신들의 손에 그 메모리카드가 들어올 수 있는 확률은 지극히 희박했다.
수많은 우연들의 연속.
계속되는 우연은 결국 필연이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그건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현국이 아니었다면 시작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마지막에 결국 다시 현국에게 돌아온 건 이렇게 되기 위해서였을 거라고 정언은 생각했다.
마주 본 사진 안의 현국은 웃고 있었다. 입술을 깨문 정언은 봉안당을 나서며 주차장에 세워 둔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다.
한밤중의 거리를 달려 돌아왔을 때, 효명은 막 가게 문을 닫으려던 참이었다. 차를 세운 정언이 안으로 들어서자 놀란 효명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지금 들어오는 거야? 아픈 애가 어딜 갔다 이제 와?”
“엄마, 나 할 말 있어.”
정언은 대답 대신 효명의 팔을 잡아끌었다. 효명이 당황한 얼굴로 후다닥 가게 문을 잠갔다. 영문도 모른 채 집까지 무방비하게 끌려온 효명은 정언의 등을 찰싹 쳤다.
“어머머, 얘가 왜 이래.”
영문을 몰라 하는 효명을 거실 소파에 앉힌 정언은 입술을 깨물었다. 숨을 고르며 효명의 곁에 앉은 정언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나 내일 방송 나갈 거야.”
효명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얼굴로 눈썹을 좁혔다.
“맨날 방송하는 애가 왜 새삼스럽게, 뭐야.”
“내일 방송에 아빠 얘기 나올 수도 있어.”
나지막한 목소리에 효명이 눈을 깜빡였다. 정언의 말이 바로 입력되지 않은 듯했다. 기껏해야 몇십 초, 그러나 마치 몇 시간처럼 느껴지는 긴 침묵이 지났다. 효명이 되물었다.
몸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정언은 말아 쥔 손으로 무릎 위를 꽉 눌렀다. 말해야만 했다. 진실을 안다는 건 때로 고통스러운 일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숨길 수는 없었다.
손등 위에 머물렀던 시선을 든 정언은 효명을 마주 보았다. 맞닿은 시선이 까닭을 모르는 불안감으로 흔들렸다. 다시 한 번 숨을 크게 들이쉰 정언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나 몇 달 동안 계속 취재하던 사건 있었어. 그런데 그게 아빠하고 관련이 있어. 방송 나가기 전에 엄마한테 미리 얘기하는 거야.”
“얘,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얘기를 해.”
효명이 애써 웃었다. 그러나 그 얼굴은 이미 겁을 먹은 기색이 역력했다.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엄대진.”
그 세 글자의 자음과 모음이 입 안을 모래처럼 긁었다. 정언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효명이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엄대진? 국회의원? 대통령 선거 나오는 그 사람? 그 사람이 왜?”
“엄대진이 아빠 죽였어.”
내뱉는 숨이 끝까지 가기도 전 발음한 문장은 짧았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이 흘렀다. 효명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삽시간에 새하얗게 질린 효명이 눈을 크게 떴다. 얼어붙은 눈동자가 떨렸다.
“얘, 너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머릿속의 문장들이 자꾸만 입 안에서 흩어졌다. 이미 아까 몸에 남은 물이라고는 한 방울도 없이 흘린 것 같았는데, 다시 눈가가 뜨거워졌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정언은 효명을 응시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아빠 죽은 거 사고 아냐. 엄대진 비리 취재하다 그렇게 된 거야.”
“서정언!”
효명이 비명을 지르듯 말을 끊었다.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라는 건 누구보다 정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정언은 효명의 손을 잡았다. 늘 따뜻했던 손인데, 지금은 손끝까지 얼어붙은 채였다. 정언은 그 차가운 손을 완전히 감싸 쥐었다. 벌벌 떨리는 감각이 누구의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증인이 있어. 내가 직접 들었어.”
그날, 최창묵의 원룸 안이 고스란히 뇌리에서 되살아났다. 옅은 담배 냄새, 창으로 스미던 어스름, 초췌하던 최창묵의 얼굴, 팔을 잡아 오던 윤의 체온까지도. YBS 서현국 기자. 그 이름이 최창묵의 입에서 나오던 그 순간을 정언은 절대 잊지 못했다.
몇 킬로미터를 쉬지 않고 달린 사람처럼 숨이 가빴다.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감각을 애써 외면하며, 정언은 입술을 달싹였다.
“나 그것 때문에 방송 못 하겠다고 했어. 당장 내일이 방송인데 도망쳤어. 엄마가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봤을 때 도저히 말 못 하겠어서, 엄마가 알면 나처럼 충격 받을까 봐…… 그런데 말해야 될 것 같아서. 내가 엄마한테 먼저 말해야 될 것 같아서 그래.”
머릿속이 완전히 텅 비어 버린 사람처럼, 효명은 넋이 나간 얼굴로 그새 하얗게 마른 입술을 몇 번 달싹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효명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자신뿐이었다. 자신 역시 똑같았기에.
눈을 꽉 감자 눈꺼풀 위로 하얗게 스미던 거실 등의 빛이 새까맣게 잠겨들었다. 어둠. 어둠. 어둠. 그리고 다시 빛.
정언은 현국이 죽은 이후 효명의 마음 어느 곳에서는 결코 새벽이 오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그 밤은 끝없이 길었다. 그러나 어떤 밤도 영원할 수는 없었다. 언젠가는 끝이 나야만 했다. 정언은 머릿속의 단어들을 토하듯 입을 열었다.
“있잖아, 엄마. 어떤 사람이 있어. 부인하고 딸이 둘 있는데, 그런데 우리처럼, 우리랑 똑같이…… 엄대진이 그 사람을 죽였어. 남편이고 애들 아빠인데, 자기 비리 드러날까 봐 그냥 죽여 버렸다고. 그 사람 자기 죽을 거 알고 있었어. 알면서도 진실 말하려고 했어.”
규형이 어떤 마음으로 수아에게 그 메모리카드를 건넸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마지막 인사조차 준비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그 희박한 확률에 도박을 걸 수 있었을까.
진실을 말하는 건 내 몫이 아니라고 외면하기는 쉬웠다. 입을 다물고 눈을 돌리면 그만이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이 그렇게 살 수 없는 건 무엇 때문일까. 왜 전부를 잃을 걸 알면서도 맞서 싸우기를 선택하는 걸까.
“정언아.”
효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효명의 손이 정언의 팔을 붙들었다. 말로 하지 않아도 그 손길이 무슨 뜻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정언은 자신의 팔을 움켜쥔 효명의 손을 떼어 냈다.
“그 사람 아니었으면 아빠 어떻게 죽었는지 평생 몰랐을 거야.”
들끓는 감정들이 심장 안을 뜨겁게 채웠다.
“그러니까 내가 도망치면 안 돼.”
사진 속 현국의 웃는 얼굴을 보았을 때부터 이미 마음은 정해져 있었다. 정언은 효명의 어깨를 쥐며 자신을 보게 했다. 효명의 눈은 젖은 채였다. 그 눈가를 손끝으로 만지자 그것이 무슨 신호라도 되는 듯 효명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언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빠가 죽은 거 엄마 잘못 아냐. 절대로. 엄마가 무슨 짓 했더라도 엄대진 못 막았을 테니까.”
고개를 흔들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던 효명이 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정언을 끌어안았다. 정언은 그 등으로 팔을 둘렀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떨리는 팔이 정언을 놓지 않을 것처럼 몇 번이고 끌어당겼다. 효명이 정신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정언아, 너 어떻게 하려고 그래. 응? 너 무슨 일 생기면…….”
“내가 할 거야.”
정언은 효명의 말을 끊었다.
“내가 한다고. 내가 엄대진 막을 거야. 그 새끼가 다신 이런 짓 못 하게, 내가 그렇게 할 거라고. 내가 누구 딸인데.”
“정언아!”
효명이 비명을 지르듯 정언을 불렀다. 그러나 이미 물러날 마음 따위는 깨끗하게 버린 뒤였다.
“그 새끼한테 지기 싫다고! 그냥 있으면, 내가 이 방송 안 하면 지는 거야! 엄마 평생 죄책감 가지면서, 엄마 때문에 아빠 죽었다고 생각하면서! 그거 아니라고, 엄마 잘못 없다고 내가 증명할게. 우리처럼 잘못 없이 죄책감 느끼면서 사는 사람들 더 안 나오게, 그런 새끼들이 사람 죽이는 거 더 못 하게 만들 거야. 사람들이 이유도 모르고 가족 잃는 일 없게 할 거라고!”
자신이 여기까지 온 건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였다. 엄대진을 막아야 했다. 두 번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했다. 그게 왜 자신의 몫이어야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지금 여기 있는 자신이 바로 그래야 할 사람이었다.
“너 어떻게 되면, 너까지 어떻게 되면 나 어떻게 살라고 그래!”
효명이 흐느끼며 정언의 등을 다시 한 번 움켜 안았다. 그러나 그 팔에는 힘이 없었다. 딸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건 효명 자신이었다. 정언이 한 번 결정한 이상 절대 마음을 돌리지 않으리라는 걸 효명 역시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엄대진이 지금 제일 바라는 게 뭔지 알아? 내가 입 다무는 거. 그 새끼 내가 누구 딸인지 다 알아! 아빠가 죽은 거 그 새끼 말 안 들어서라고. 아빠가 돈도 권력도 다 싫다고, 진실 밝히겠다고 해서! 내 입까지 막으려고 그러는 거 그냥 참아? 그냥 지금처럼 무서워하고 떨면서 평생 살아? 엄마가 자기 탓하면서, 나는 또 그런 사람들 생기는 거 그냥 지켜보면서 죄책감 가지고?”
효명이 멍하니 정언을 마주 보았다. 정언은 똑바로 그 눈을 응시했다.
“나 그렇게 살기 싫어. 그렇게는 절대 안 살아. 엄대진이 바라는 대로 안 해. 그런 놈이 대통령 되면 사람들이 침묵하는 거 당연해져. 아빠가 왜 죽었는지, 왜 어떤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야 되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그랬으면 좋겠어?”
팔을 움켜쥐고 있던 효명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정언은 효명을 떼어 내며 흠뻑 젖은 그 얼굴을 감싸 닦아 주었다. 손으로 스며든 습기는 따뜻했고, 곧 차가워졌다. 정언은 거의 속삭이듯 입술을 달싹였다.
“엄마, 나 믿어. 난 절대 안 죽어. 끝까지 살 거야. 끝까지 살아서 엄대진 감옥 보낼 거야. 내가 엄마한테 약속한 거 어긴 적 있어?”
그 말에 효명이 겨우 고개를 저었다.
“자기 아빠, 자기 남편 왜 죽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 계속 생기면 안 되잖아.”
지금까지 만났던 많은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가 영사기의 필름처럼 차례로 지났다. 소중한 사람을 한순간 잃어버리고 남겨진 이들.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상처. 말하지 못하는 진실들.
“엄마처럼 죄책감 가지고 사는 사람들 더 많아지면 안 되는 거잖아.”
그 필름의 마지막은 현국의 얼굴이었다. 정언은 잠시 눈을 감았다. 아빠의 마지막 순간이 언제나 궁금했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순간, 아빠는 뭘 남기고 싶었을까.
이제는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