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70
270화.
긴 침묵이 흘렀다. 따뜻한 거실로 내려앉은 고요함은 무겁고 짙었다. 두 사람은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은 채 서로를 응시했다.
마침내 그 정적을 깬 쪽은 효명이었다. 효명은 떨리는 손으로 정언의 얼굴을 만졌다. 손끝으로 기억하려는 듯 정언의 얼굴을 몇 번이고 덧그린 효명이 정언을 끌어안았다.
“……방송 끝나면 집으로 와.”
애써 웃는 목소리가 떨렸다.
“너 좋아하는 거 해 놓을 테니까. 알았지?”
정언은 효명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익숙한 엄마의 냄새가 스며들었다. 부드러운 빵 냄새와 오래된 나무의 냄새 같은 것이 뒤섞인 따뜻한 감각이었다. 잠시 숨을 들이쉰 정언은 효명에게 말했다.
“갔다 올게. 내일 방송 끝나고 바로 올게.”
효명을 꼭 안았다 놓은 정언은 몸을 일으켰다. 효명이 현관까지 따라 나왔다. 이따 봐, 하고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손을 흔들어 보인 정언은 몸을 돌렸다.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등 뒤에서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돌아보는 대신 차에 시동을 건 정언은 핸드폰을 꺼냈다. 윤에게 전화를 걸자 신호가 두어 번 가기도 전, 대답이 돌아왔다.
『네, 선배.』
놀란 목소리였다. 정언은 숨을 고르고는 다른 손으로 핸들을 꽉 움켜쥐었다. 손끝이 새하얗게 질렸다.
“나 내일 방송 나가야겠어.”
내뱉은 말에 윤의 목소리가 커졌다.
“내일 생방 대본 나온 거 메일로 나한테 보내 줘.”
『선배, 지금 그게 무슨…….』
“내가 할 거야.”
정언은 윤의 말을 끊었다. 전화 너머로 윤이 짧은 숨을 들이켰다. 정언은 다시 한 번 말했다.
“죽어도 할 거야.”
무슨 뜻인지 단번에 알아차린 듯했다. 잠시 말이 없던 윤이 알겠어요, 하고 대답했다.
“다시 전화할게.”
전화를 끊자, 바로 메일 알림창이 떴다. 윤이 보낸 최종 구성안이었다. 정언은 즉시 차에 앉은 채 구성안을 확인했다. 이미 수도 없이 본 내용이었다. 흐름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머릿속에 멘트를 집어넣는 건 그다음이었다.
정언은 차를 출발시켰다. 익숙한 골목을 빠져나간 차가 한적해진 도로 위를 달렸다. 머릿속은 온통 구성안의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언제나 마지막 멘트는 담당 피디의 몫이었다.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까.
900회. 그 까마득한 숫자가 불현듯 깊게 다가왔다. 이제 이전에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는 미래는 늘 불안했다. 운전하는 동안 내내 기억을 되짚던 정언의 생각이 멈춘 건 한곳이었다.
시간을 달라고 말했던 건 자신이었다. 어쩌면 이미 언젠가부터 결정되어 있었던 대답. 이 방송이 끝나면, 얼마나 긴 시간 동안 가 멈춰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바깥의 삶. 오랫동안 상상해 본 적 없는 그 삶을 생각했을 때, 거기 있는 건 윤이었다.
이 방송이 끝나면 윤에게 대답을 돌려 줄 생각이었다.
차가 고가차도로 접어들었다. 이미 오래전에 퇴근 시간이 지난 한밤중의 도로는 한산했다. 정언은 액셀을 밟았다. 그때 뒤에서 강한 빛이 번뜩였다. 저도 모르게 눈을 찌푸린 정언은 백미러를 보았다.
바로 뒤차에서 켠 상향등의 빛이 직선으로 백미러에 꽂혔다. 시야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상향등을 켤 이유가 없는 도로였다. 뭐지, 하고 생각한 정언은 차선을 바꿨다. 뭔가 이상하다는 예감이 든 건 그 순간이었다.
뒤차가 상향등을 켠 채 따라붙었다. 비어 있는 차선을 두고, 왜 하필이면. 퍼뜩 머릿속이 서늘해졌다.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액정에 선명하게 윤의 이름이 떴다. 정언은 귀에 꽂은 핸즈프리의 버튼을 눌렀다. 귓가로 윤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어디까지 오셨어요?』
“지금 가는 중이야. 거의 다…….”
액셀을 밟던 정언은 말을 멈췄다. 따라온다. 올라간 속도만큼 뒤차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정언은 손을 뻗어 백미러를 조절했다. 강한 상향등의 빛 탓에 후방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속도를 늦추자 뒤차도 마찬가지로 느려졌다.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목덜미가 선뜩하게 긴장했다.
백미러를 몇 번 움직이자, 짧은 순간 뒤차의 번호판이 눈에 들어왔다.
『선배, 전화 안 들리세요?』
잠깐의 침묵이 이상했는지 윤이 물었다. 정언은 숨을 들이쉬었다.
“지금 내가 차 번호 하나 부를 테니까 받아 적어.”
정언이 바로 번호판의 번호를 반복해 부르자, 까닭도 모른 채 윤이 그 번호를 되풀이했다.
『무슨 일 있어요?』
“누가 따라와.”
정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윤이 되물었다.
곧바로 윤이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어디세요? 제가 갈게요. 선배, 어딘지 얘기해 주세요. 빨리요!』
“못 멈춰. 세우면 더 위험해져.”
『선배!』
뒤로 붙은 차가 가까워졌다. 검은색 SUV. 강한 상향등의 빛에 정언은 팔을 올려 눈을 가렸다. 따라오던 차가 옆으로 바짝 붙었다. 고개를 돌린 정언의 눈에 들어온 건 어쩐지 낯이 익은 옆모습이었다. 이상한 기시감에, 정언은 바로 창을 조금 더 내렸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정언을 곁눈질했다. 열려 있는 그쪽의 조수석 창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누구였더라. 찰나에 스친 물음에 답을 찾은 건 직후였다. 착각이 아니었다. 정언은 핸들을 움켜쥐었다.
“성산고가차도 지났어. 만약에 무슨 일 생기면 바로 경찰에 신고해.”
『선배, 전화 끊지 마세요. 계속 켜 놓고 계세요!』
그 얼굴을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핸즈프리로 고함을 치는 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언은 있는 힘껏 액셀을 밟았다. 똑같이 속도를 올리는 옆 차의 엔진 소리가 굉음처럼 귓가를 파고들었다. 다음 순간 운전석으로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비명이 터졌다.
『선배!』
잡은 핸들을 놓친 건 그때였다. 다시 한 번 옆을 들이받는 감각에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귀에 꽂고 있던 핸즈프리가 그대로 날아갔다. 선배, 하고 다시 한 번 외치는 윤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러나 더 이상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세 번째의 충격이 가해졌다. 창에 머리가 부딪친 순간 모든 사고가 그대로 정지했다. 상황을 판단하는 건 불가능했다. 강한 소용돌이에 빨려드는 것처럼 세상이 계속해서 회전했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차체가 충돌한 건 직후였다. 에어백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스위치를 내리듯 의식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바닥을 모르는 어둠 속으로 몸이 끝없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득한 빛이 점점 멀어지며 마침내 점이 되어 사라졌다. 마지막 암전 직전 정언은 생각했다.
이미 결정되어 있던 대답이라면 말할 걸 그랬다.
좋아한다고.
내 곁에 있어 줬으면 좋겠다고.
이 순간 이후의 삶이 자신에게 허락된다면.
그런 가정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빛, 어둠, 빛, 다시 어둠.
한 점의 빛도 없는 어둠이 그대로 정언을 집어삼켰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유독 더 민감하게 느껴졌다. 무슨 정신으로 병원까지 달려왔는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대기실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던 윤은 얼굴을 감쌌다. 핸드폰 너머로 들리던 정언의 비명 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김 피디, 괜찮아?”
넋을 놓고 있던 윤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곁에 앉은 재희가 걱정스럽게 윤을 보았다. 며칠 밤샘한 처지는 마찬가지라, 재희의 얼굴도 어지간히 초췌했다. 윤이 네, 하고 입술을 달싹였으나 그게 말뿐이라는 걸 뻔히 아는 재희가 혀를 찼다.
그때 아래층에 내려갔던 찬수가 계단으로 올라왔다. 초조한 표정으로 대기실 안을 왔다 갔다 하던 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찬수에게 쏠렸다. 찬수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수술실 들어갔어. 머리를 부딪쳤고 출혈이 심해서 자기들이 뭐라고 말을 못 하겠다는데. 일단 들어가 봐야 안대.”
팀원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긴 한숨을 뱉은 재희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어머님은요?”
“응급실에 누워 계셔. 송 작가랑 희림이 가 있고.”
연락을 받고 달려온 효명은 그 자리에서 혼절하고 말았다. 때문에 민혜와 희림이 일단 응급실에 있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분을 못 이긴 호형이 벽을 걷어차며 욕을 내뱉었다.
“이 씨발 새끼들 진짜!”
아무도 호형을 말리지 못했다. 말만 안 했을 뿐 어차피 심정은 다 같았다. 예준이 미치겠다는 듯 마른세수를 하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야, 이거 정말 돌아 버리겠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냐.”
“서 피디가 마지막 타깃이었겠지. 죽여 버리려고 작정하고 받았는데, 뭐.”
석현이 가라앉은 투로 대꾸했다. 예준이 기가 찬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이사진이 시사까지 했잖아요! 자기들이 내용 확인했으면 됐지, 우리가 생방하는 것도 모르는데 애를 왜…….”
“서 피디가 이 건 메인인 거 알고 있었고, 위험 요소는 전부 제거하고 싶을 테니까.”
대신 대답한 건 재희였다. 대기실 안이 조용해졌다. 사이를 둔 재희가 말을 이었다.
“아직 대선까지 시간 있잖아. 우리 쪽 싹 날리고 흐름 다시 가져올 방법 있다고 생각한 거지. 그게 이거고. 살고 싶으면 입 다물어라.”
윤은 심장 위를 꽉 눌렀다. 숨이 막혀 올라오지 않는 느낌이었다. 눈앞이 아찔하게 돌아, 윤은 잠시 몸을 숙이며 눈을 감았다. 대기실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을 깬 건 호형이었다.
“이거 방송 꼭 해야 돼요?”
울분에 찬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사람 하나 수술실에 눕혀 놓고 지금 이 방송 하는 게 맞아요?”
누구도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아무리 라고 해도 방송을 강행한다는 건 무리였다. 재희도 그 때문에 입을 열지 않는 듯했다. 호형이 씩씩거리며 내뱉었다.
“내가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라, 아니 뭐 솔직히 안 무섭다면 그것도 거짓말이긴 한데, 씨발, 아 진짜…… 목숨 걸고 취재해 오니까 진짜 목숨 날려 버리는데 어떡하냐고요. 나 지금 솔직히 병원 의사들도 못 믿겠어요. 엄대진 지시 받았으면 서 피디 수술실에서 어떻게 하는 거 일도 아닐 거 아냐.”
그 말을 듣자마자 석현이 호형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안호형! 너 지금 어디서 주둥이를 그따위로 털어? 말조심 안 해?”
“말이 그렇다는 거 아니에요, 나도 답답하니까 하는 소리죠!”
“답답해도 할 소리가 있고 못 할 소리가 있지, 이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