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71
271화.
석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곁에 있던 찬수가 황급히 석현을 말렸다.
“야, 야. 뭐하는 거야, 지금. 왜들 이래. 진정해.”
“안 피디, 그만하고 앉아.”
재희가 한마디 하자 호형이 뭐라고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잠시 침묵하던 재희가 예준에게 물었다.
“주 피디, 지금 세트 세팅 중이지?”
“우리가 여기 올 때 세트 이동 시작했으니까 그럴걸요.”
“거기 우 피디 있어?”
“네. 계속 전화오고 난리도 아니에요, 지금.”
예준이 핸드폰을 흔들어 보였다. 스튜디오 세팅을 위해 일단 지혁을 남겨 두고 왔는데, 상황이 어떻게 돼 가는지 모르니 불안해서 연신 전화를 거는 듯했다. 재희가 찬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수술 끝나려면 얼마나 걸린대요?”
“확실히 모르겠다는데. 최소한 서너 시간 생각하나 봐.”
찬수가 한숨을 쉬었다. 가벼운 부상은 아닌 모양이었다. 사고가 났다는 걸 알자마자 경찰에 신고했는데, 정언이 병원으로 이송된 건 보지 못해 상태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 대기실로 올라온 철진이 턱까지 찬 숨을 고르며 손가락으로 아래층을 가리켰다.
“밑에 경찰 왔어요. 서 피디 차 블랙박스 수거해서 봤다는데 너무 명백하게 뒤에서 고의로 받은 거라, 뭐 더 할 얘기가 없다네.”
“운전자가 누구야?”
재희가 묻자 철진이 잠깐 호흡을 고르더니 대답했다.
“손경일이래요.”
그 말에 찬수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손경일이 직접 운전했다고? 지금 상태 어떤데?”
“어깨하고 갈비뼈 골절이라는데 생명에는 지장 없대요. 현장에서 서 피디 차 들이받고 내려서 도망치다가 순찰대 출동해서 잡혔나 봐요.”
“이런 개새끼, 뒈지려면 확 뒈져 버리지.”
호형이 분이 안 풀리는 듯 중얼거렸다. 재희가 호형의 어깨에 손을 짚어 진정시키며 물었다.
“그래서?”
“입원실에서 치료받는 중이라는데 상태 본 뒤에 서로 이송할 건가 보더라고요.”
철진의 대답을 듣기 무섭게 석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 뛰쳐나갈 기세였다.
“그 새끼 지금 어딨어?”
“아니, 뭐 어쩌려고 그래요?”
예준이 서둘러 석현을 끌어 앉히려 하자, 석현이 예준의 손을 뿌리쳤다.
“뭘 어떻게 해, 씨발! 아주 죽여 버려야지! 좆같은 새끼들, 사람 목숨 알기를 아주…….”
내버려 뒀다가는 정말 무슨 일이라도 낼 것 같았다. 예준이 석현을 붙들어 말리는 사이, 재희가 눈썹 위를 문지르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진정해. 진정하고, 일단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자고. 사무실로 가 있든지.”
“지금 이 판에 사무실 가면 우리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해요.”
호형이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재희가 가볍게 손뼉을 딱 치고는 바깥을 가리켰다.
“그럼 커피 한 잔 마시고들 옵시다. 찬바람도 쐬고. 여기 서 있다고 무슨 수 생겨?”
재희가 윤에게 따라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재희를 따라가자, 병원 밖으로 나간 재희가 자판기에서 커피 두 잔을 뽑아 한 잔을 윤에게 건네며 근처 벤치에 걸터앉았다.
윤이 곁에 앉자 재희는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밖으로 나왔는데도 소독약 냄새가 끈질기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도저히 커피를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 두어 모금을 겨우 넘긴 윤은 결국 더 마시지 못하고 컵을 내려놓았다.
“김 피디, 괜찮아?”
재희가 물었다. 윤은 대답 대신 두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되짚으면 되짚을수록 후회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윤은 겨우 입을 열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었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윤은 눈가를 꽉 눌러 애써 그 감각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이희경 씨 혼자 만났어야 됐어요. 선배 오지 말라고 했어야 하는데, 그냥 집에 있어도 된다고 말렸어야 되는데…….”
여기 오는 내내, 대기실에서 앉아 있는 동안에도 계속 그 생각뿐이었다. 처음부터 희경을 혼자 만났으면 됐을 문제였다. 최소한 아까 방송국으로 오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라도 말렸어야 했다. 그랬으면 최소한 오늘 정언이 목표가 되는 건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차라리 자신이 타깃인 편이 나았다. 절대 죽지 말라고 말하던 정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어쩌면 이런 순간을 예상했던 걸까. 정언은 늘 가장 최악의 선택지를 먼저 고려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설령 예상했다 한들, 이런 식은 아니었을 게 분명했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죄책감 탓에 누가 심장을 움켜쥐고 쥐어짜는 기분이었다. 윤이 몸을 작게 말자, 재희가 윤의 어깨를 감싸며 달래듯 말을 건넸다.
“그런 생각하지 마. 서 피디 그랬던 이유 있었을 거야. 말도 없이 회사 이틀이나 결근할 정도로 힘들었던 애가 갑자기 마음 돌렸는데, 김 피디 말 들었을 것 같아?”
물론 정언의 성격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머리로는 재희의 말이 맞다는 걸 알고 있었다.
「죽어도 할 거야.」
그렇게 말하던 정언의 목소리가 생생했다. 정언이 그렇게 결심했다면 자신이 어떻게 말렸어도 소용없었을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진 뒤였다. 재희가 창백하게 질린 윤을 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죄책감 갖지 마. 일 저지른 놈이 나쁜 거지, 김 피디는 아무 잘못 없어.”
네, 하고 대답했지만 재희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술실에 누워 있을 정언 생각을 하면 머릿속이 끓는 것 같았다가, 바로 다시 얼어붙는 것 같았다. 한참을 앉아 있던 재희가 몸을 일으켰다.
“일단 들어가서 다시 얘기해 보자고. 여기서 계속 시간 보낼 수는 없으니까.”
재희가 앞장섰다. 대기실로 돌아가자 그새 삼삼오오 앉아 뭐라고 대화를 나누고 있던 팀원들이 눈을 돌렸다. 이미 자정을 넘긴 지는 한참이었다.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한 찬수가 긴 침묵 속에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선 오늘은 시사 미리 한 편집본 틀면 어때?”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쏠리자, 찬수가 머뭇거리며 짧은 한숨을 뱉었다.
“서 피디 저렇게 됐는데, 어머님도 지금 충격 심하시고…… 그런데 우리가 방송 강행하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어. 일단 기다렸다가 다시 기회 오면…….”
“기회가 오겠냐고요, 지금.”
예준이 말을 잘랐다. 찬수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도 알긴 하는데 상황이 너무 안 좋잖아. 이거 알려지고 자칫하면 우리가 언론 플레이로 역공당할 수도 있다고. 무리하게 취재하려다 이 꼴 당했다 하면서. 걔들 심심하면 우리가 사생활 침해한다, 보도 윤리 어긴다 그러고 거는 게 취미잖아. 서 피디 일 그쪽에서 기획한 건데 계속 숨길 수도 없고.”
“톡 까놓고 그냥 겁난다고 그래요.”
싸늘하게 내뱉는 예준의 얼굴에 찬수의 표정이 굳었다.
“야, 주예준.”
“그게 사실 아닙니까. 임 선배 애들 있고, 그러면 불안한 거 이해해요.”
“너 말을 왜 그렇게 해? 내가 가족 생각하니까 몸 사린다는 것처럼 얘기하잖아, 지금.”
“그게 사실이라도 저 임 선배 비난 안 한다고요. 책임질 가족 있는 사람이 몸 사리는 거 당연하잖아요.”
찬수가 그 말에 멈칫했다. 예준이 아이 씨, 하고 혼잣말로 내뱉으며 머리를 감싸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 정도까지 한 적 없으니까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냥 협박 전화, 사찰, 이런 거 다 무시하겠는데 사람을 진짜로 죽이려고 하잖아. 더한 짓은 못 하겠어요? 서 피디는 우리가 알고 증거라도 남았지. 다음에는 증거도 못 잡을 수도 있는데.”
“아니, 이 새끼들이 진짜 왜 이래?”
현진이 성질을 냈다. 다들 건드리면 바로 터질 것처럼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 때문에 일부러 잠깐 소강시키려 자리를 떴던 건데, 돌아와서도 그다지 해결된 건 없어 보였다.
재희가 그만들 해, 하고 두 사람을 말렸을 때였다. 귀신이라도 본 듯 핏기가 완전히 빠진 민혜가 복도 저편에서 나타났다. 민혜를 먼저 알아본 호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송 작가님!”
고개를 돌려 그쪽을 본 재희가 멈칫하더니 황급히 달려가 민혜를 부축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휘청거리던 민혜가 재희의 손길에 이끌려 의자에 앉았다. 재희가 몸을 숙이며 물었다.
“괜찮아? 본인이 환자야, 지금.”
그러나 민혜는 재희의 말을 듣지도 못한 듯했다. 초점이 나간 눈을 깜빡이던 민혜가 고개를 들었다.
“다들 알고 있었어?”
밑도 끝도 없는 물음에 현진이 되물었다. 민혜가 대답 대신 팀원들을 둘러보았다.
“나만 몰랐니?”
무슨 말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팀원들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충격이 심해서 그런가, 하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민혜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정언이 서현국 기자님 딸이었던 거 나만 몰랐어?”
몸을 반쯤 돌리고 있던 예준의 눈이 커졌다. 민혜가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어머님이…… 어머님이 그러시더라고. 정언이 아빠 때문에 그랬다고. 자기가 아빠 얘기 방송해야 된다고 그러고 나갔다고. 내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아빠 때문에, 그게 무슨 소리냐고 그러니까 어머님이…… 아버님이 서현국 기자님이래. 나 내가 뭐 잘못 들은 줄 알았어.”
“진짜야?”
예준이 민혜를 다그쳤다. 얼어붙은 얼굴로 서 있던 찬수가 바로 재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강재희 너 알고 있었어?”
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재희에게 쏠렸다. 침묵하던 재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뱉었다.
“서 피디가 비밀로 해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도 굳이 얘기 안 한 거고.”
“아니, 진짜…….”
찬수가 이마를 짚었다. 호형이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서 있다가 재희에게 물었다.
“최창묵 인터뷰 따고 나서부터 서 피디 결근한 거 그것 때문이에요?”
대답을 기다린 질문은 아닌 듯, 호형은 즉시 윤의 팔을 잡아채 자기를 보게 했다.
“김 피디는 알고 있었어?”
“인터뷰 딴 뒤에 강 피디님한테 들어서…….”
머뭇거리던 윤의 대답이 미처 끝나기도 전 현진이 재희를 향해 고함을 쳤다.
“씨발, 강재희! 너 제정신이야? 이 미친 새끼야, 여태까지 숨길 게 따로 있지! 상황이 이렇게까지 됐는데 왜 그 얘기를 안 해! 엄대진 이 새끼가 그러면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거 아냐? 서정언 그게 서현국 딸이니까 죽이려고 한 거 아니냐고!”
“……내가 생각 짧았어요. 엄대진이 서현국 기자님 죽였다는 얘기 그땐 몰랐잖아. 뻔히 다 알고 있다고는 생각 못 했던 거지.”
한숨을 섞어 내뱉은 재희가 미간을 눌렀다. 복도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다들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듯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재희는 민혜에게 눈을 돌렸다.
“어머님은 뭐라고 하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