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72
272화.
민혜가 다 죽어 가는 얼굴로 대답했다.
“정신없으셔. 조금 전에 겨우 의식 돌아와서 얘기한 거야. 정언한테 얘기는 들었다고 하시더라고.”
“아버님 얘기?”
민혜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진이 민혜 곁에 털썩 걸터앉으며 부스스한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어떡하냐, 이걸. 방송 내보내면 어머님 더 충격 받으시는 거 아냐?”
“그래서 하자는 거야, 말자는 거야. 지금 세트는 들어오는 중이고 주조, 부조 다 얘기는 된 상태잖아.”
석현이 끼어들었다. 찬수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야, 이거 진짜 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판은 다 벌려 놨는데, 상황이…… 서 피디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고.”
다시 긴 정적이 흘렀다. 간호사들과 간병인 몇몇이 복도를 지나다니는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렸다가 멀어졌다. 먼저 그 침묵을 깬 건 윤이었다.
“방송하죠.”
일시에 수십 개의 눈동자가 윤에게 몰렸다. 찬수가 되물었다.
엉망진창이던 머릿속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정언이 어머니에게 사실을 얘기했다면, 그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임이 분명했다. 몸을 일으킨 윤은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었다. 새하얗게 질린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선배가 도저히 못 하겠다고 했다가 마음 바꾼 거예요. 박규형 과장님이 블랙박스 메모리 남겨 놓은 거 보고 몇 시간 있다가 바로 저한테 방송하겠다고, 지금 간다고 전화했어요.”
예준이 윤을 만류했다.
“김 피디, 이거 그렇게 쉽게 말할 문제가 아냐.”
“저 쉽게 말하는 거 아닙니다. 제가 선배하고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이에요. 사고 나는 그 순간까지 제가 선배하고 전화하고 있었어요.”
윤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팀원들이 입을 다물었다. 윤은 입술 안쪽을 이로 눌렀다. 정언의 비명 소리가 내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던 비명 소리, 충돌음, 노이즈, 그리고 침묵. 단숨에 온몸을 얼려 버리던 그 공포는 지독히도 생생했다.
바라는 건 결국 이거다. 누구나 겁에 질려 입을 다물게 되는 것. 아무도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는 것.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 모두가 그 어둠의 동조자가 되는 것. 그러나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정언이 그런 걸 원할 리 없다고 윤은 확신하고 있었다.
“엄대진이 제일 원하는 게 이런 상황이에요. 우리 방송 못 하게 만드는 거. 그러려고 이런 짓까지 하잖아요. 선배도 아니까, 엄대진한테 지기 싫어서 방송하겠다고 얘기한 거예요.”
“서 피디 속을 어떻게 아는데. 이 얘기 방송하면 서 피디는 자기 불행 동네방네 전시하는 꼴 되는 거야. 그건 생각 안 해?”
예준이 날카롭게 물었다.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었다. 정언은 자신의 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걸 누구보다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전화했을 때, 정언은 이미 그 모든 걸 다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을 게 분명했다. 윤은 예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사실은 누가 죽였다는 거 알게 된 사람 기분 어떨지 아시겠어요?”
예준이 순간 멈칫했다. 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그거 상상도 안 가요. 여기 있는 분들 아무도 선배가 겪은 일 상상 못 하시잖아요.”
수도 없이 이해하려 노력했던 일이었다. 정언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알고 싶었다. 그러나 수백 번, 수천 번을 상상해도 그 마음을 결코 가늠할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위로는 그만해도 좋다는 게 전부였다. 도망쳐도 된다고, 포기해도 된다고. 그 말에 고맙다고 대답하던 정언의 얼굴이 되살아났다. 윤은 애써 떨림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제가 선배한테 얘기했어요. 방송 안 해도 괜찮다고. 그 서현국 기자님 자료도 선배가 준 거예요. 자기가 직접 확인도 못 해서 저한테 줬다고요. 그런 사람이 직접 방송 나올 생각을 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어머님이…….”
찬수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마음을 정한 이상 더 시간을 끄는 건 낭비였다. 윤은 즉시 말을 끊었다.
“선배가 이미 얘기했다면서요. 방송 나가기 전에, 어머님한테 먼저 말하고 회사로 오려던 거라고.”
동의를 구하듯 민혜 쪽을 보자 민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윤은 단호하게 말했다.
“어머님이 그거 못 견디신다고 생각했으면 선배가 이 내용 방송에서 빼라고 했을 거예요. 자기가 방송할 생각도 안 했을 테고, 어머님한테 끝까지 숨겼겠죠. 선배한테는 아버지지만 어머님한테는 남편이에요. 선배가 그 정도 생각 안 했을 리 없습니다.”
물을 끼얹은 듯 모두가 조용해졌다. 윤은 팀원들과 시선을 맞췄다. 불안, 분노, 좌절, 공포, 확신 없는 흔들림. 윤은 그 모든 감정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만큼 두려운 적은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정언이 잘못되면. 그런 가정조차도 하기 싫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입이 말랐다. 까끌대는 입술을 말아 잘근거리던 윤은 숨을 들이쉬었다.
“선배가 방송 못 하겠다고 했을 때 제가 그랬어요. 팀 믿어 달라고. 선배 없다고 이 방송 못 하게 되는 거 아니라고요.”
정언을 안심시키려 한 빈말이 아니었다. 윤 자신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그러니까 저 이 방송 해야겠습니다.”
방송하자고 말한 순간부터 이미 마음은 결정돼 있었다. 윤은 못 박힌 듯 이쪽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재희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된다고 하시면 저 혼자서라도 나가서 방송 진행할 겁니다.”
재희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손목시계의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정적이 지났다. 그 서늘한 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윤은 짐작하지 못했다. 그러나 재희가 어떤 결정을 하든 이미 윤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긴 침묵을 지키던 재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알았어. 그렇게 하자.”
“선배!”
놀란 호형이 재희를 불렀으나, 재희는 바로 호형의 말을 잘랐다.
“김 피디 말 맞아. 서 피디가 한다고 했는데 우리가 여기서 지금 하네 마네 하는 거 의미 없어. 방송 안 한다고 해서 엄대진이 우리 내버려 둔다는 보장도 없고. 무서워서 못 한다는 거 말 안 돼. 진짜 겁나면 더 방송해야지. 그리고 이거 우리 팀만 걸려 있는 거 아니잖아. 하고 주조, 부조 엔지니어들, 교양국, 미술팀까지 다 걸려 있어.”
그 말에 다들 정신이 번쩍 든 듯했다. 이 방송에 회사 전체가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만약 이 방송을 못 하게 된다면 가장 먼저 위험해지는 건 였다. 먼저 포문을 터 준 사람들을 절벽 끝에서 떠미는 꼴로 만들 수는 없었다.
방금 전까지 다 죽어 가던 민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엉망이 된 머리를 다시 하나로 모아 질끈 묶은 민혜가 빨개진 코끝을 슥슥 문지르고는 손뼉을 딱딱 쳤다.
“그럼 일단 혜주랑 희림이 여기 있으라고 하고, 우리는 바로 다 회사로 가자. 준비하려면 빠듯해. 세팅된 거 확인하고, 리허설도 해야 되고. 기술 쪽하고도 얘기 맞춰 봐야 될 거 아냐. 만에 하나 위에서 방송 막으려고 하면 어떻게 할지도 얘기해야 되고.”
다른 팀까지 걸려 있는 일에서 물러난다는 건 불가능했다. 마음을 정했는지, 찬수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중얼거리며 가자는 손짓을 했다. 팀원들을 따라 내려가던 재희가 윤을 돌아보았다.
“그레이 계열 슈트 가지고 있는 거 있어? 핏 좋은 걸로.”
왜 갑자기 그런 걸 묻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윤이 얼떨결에 네, 하고 대답하자 재희가 손목에 찬 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는 씩 웃었다.
“아, 다행이네. 본인 옷 입어야 그림 잘 나오거든.”
“나랑 같이 스튜디오 들어가자. 서 피디 자리에 김 피디가 앉아.”
재희의 말을 듣자마자 순식간에 현실감이 밀어닥쳤다. 윤의 굳은 얼굴을 본 재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도 처음 촬영할 때 엄청 떨었어. 지금 보면 진짜 한심해. 김 피디가 뭘 해도 그것보단 나을걸. 그리고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얼굴 잘생긴 사람 나와야 시청률이 0.1퍼센트라도 더 오르지. 그 얼굴 뒀다가 뭐하려고 그래? 우리도 갖고 있는 거 다 써 보자고.”
“그래, 맞아. 김 피디 딕션도 좋더라.”
뒤를 따라오던 민혜가 추임새를 넣자, 그래? 하고 되물은 재희가 윤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럼 더 잘 됐네. 한숨도 못 잤지? 일단 들어가서 좀 자고 나와. 완전히 밤새면 정신도 없고 얼굴 엉망이라 이따 생방 못해. 좀 자고 열 시 맞춰서 옷 가지고 출근해. 셔츠는 화이트, 넥타이는 네이비나 블루. 그래야 스튜디오에서 볼 때 세트 컬러하고 어울려. 오후에 리허설 들어갈 거니까 그 전까지 멘트 숙지 완벽하게 하고.”
바로 몇 시간 후면 의 스튜디오에 자신이 앉아 있게 된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장면이었다. 선뜻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 그 모습을 애써 떠올리던 윤은 마르는 입술을 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주차장으로 내려온 재희가 민혜를 자기 차에 태우고는 이따 봐, 하며 먼저 출발했다. 심호흡을 한 윤은 차를 가지고 집으로 향했다. 윤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옷장을 열어 재희가 말한 대로 슈트와 셔츠, 넥타이를 챙겼다.
대강 씻은 윤은 커튼을 잡아당겨 친 뒤 알람을 맞추고 침대에 누웠다. 긴 하루였다. 죽을 만큼 피곤했지만 쉽게 잠이 오지는 않았다. 눈을 감자 귓가에 정언과의 마지막 통화가 계속 환청처럼 맴돌았다.
침착하게 차 번호를 부르던 목소리. 그러나 그 순간 정언은 이미 뭔가 잘못됐다는 걸 예감했을 게 분명했다.
전신에 스몄던 공포감은 분노로 바뀐 지 오래였다. 윤은 가슴 위를 꾹 눌렀다. 최후의 반격. 위협적이라고 생각했기에 제거하려고 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기대에 부응해 줄 생각이었다. 엄대진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를 그의 눈앞에 들이밀어서.
죽은 사람들에 대해 알지 못하고 알 필요도 없다고 말하던 엄대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언 역시 그 알 필요도 없는 사람들 중 하나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도록 눈 뜨고 지켜보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윤은 몸을 말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머리가 무거웠다. 생각을 지우려 노력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최대한 단순해져야 했다. 방송을 하고, 진실을 말한다. 그것만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이었다.
알람이 울린 건 서너 시간 뒤였다. 제대로 잔 것 같지는 않았으나 눈은 바로 뜨였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챙겨 둔 옷과 차 키를 집어 든 윤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조금 전 혜주로부터 온 단체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 서 피디님 수술 끝났어요 아직 의식은 없대요
윤은 현관에 멈춰 선 채 그 메시지를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절대 죽지 않는다고 맹세하겠다던 정언이었다. 정언이 자기 입으로 한 약속을 어길 리 없었다. 입술을 깨문 윤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바로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방송국에 도착해 사무실로 올라가자, 수화기를 한쪽 어깨에 끼운 채 연신 분주하게 뭔가를 확인하던 재희가 손짓으로 윤을 불렀다. 곧 수화기를 내려놓은 재희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빨리 왔네. 좀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아?”
“네. 많이 잤습니다.”
그 말에 재희가 코끝으로 웃는 소리를 냈다. 속이 빤한 거짓말인 걸 들여다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