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73
273화.
“방송 끝나고 더 많이 자. 일단 지금 별관 스튜디오는 세팅 끝났고, VCR 최종 점검하고 큐시트 정리하는 중이야. 오후에 리허설 한 번 하고, 바로 옷 갈아입고 메이크업 받을 거니까 준비하고 있어. 프롬프터 있어도 멘트 머릿속에 다 들어 있어야 돼. 가능하겠어?”
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어디를 갔다 왔는지 헐레벌떡 사무실로 들어서던 민혜가 윤을 보자마자 달려왔다.
“왔어요? 안 그래도 찾고 있었는데.”
잠시 헉헉거리며 숨을 고르던 민혜가 윤의 어깨를 짚었다.
“마지막 멘트는 담당 피디가 써야 돼요. 우리 방송 본 적 있죠? 어떻게 쓰는지 알지?”
“네, 압니다.”
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 매 방송은 반드시 담당 피디들이 직접 쓴 멘트로 마무리하게 되어 있었다. 수도 없이 본 것이었지만 막상 자신이 직접 써야 한다고 생각하니 등줄기가 바짝 긴장되는 느낌이었다. 민혜가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말했다.
“김 피디가 할 줄 알았으면 미리 쓰라고 하는 건데 할 수 없지. 칼같이 시간 맞추면 마지막 멘트 나가는 시간 30초 정도 될 거예요. 시간 없으니까, 리허설 때는 빼고 본방에서 하는 걸로. 빨리 쓰고 정리해요. 오버하거나 모자라면 강 피디가 서브할 거니까 너무 긴장 안 해도 돼.”
민혜가 재희에게 눈을 주자, 곁에 서 있던 재희가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그 뒤부터 몇 시간은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였다. VCR 점검 사항을 확인하고, 시간을 체크하고, 자막이며 CG 등을 최종 협의하고, 카메라 구도를 논의하는 것만으로도 오후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식사를 챙겨 먹을 시간도 없었다. 배달시킨 햄버거를 맛도 모르고 쑤셔 넣으며 준비를 마치기 무섭게 별관 스튜디오로 이동해야 했다. 생방송 스탭이 역부족인 탓에 스탭들과 스탭들까지 와 있는 통에 스튜디오 안이 바글거렸다.
“임 선배가 스튜디오 메인이고, 부조에는 최 피디하고 민 피디가 들어갈 거야. 다들 위치 점검해!”
재희의 외침에 스탭들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리허설 들어갑시다!”
곧 총지휘를 맡은 찬수의 사인과 동시에 리허설이 시작됐다. 카메라와 조명 등이 완벽하게 맞지는 않는 듯했으나, 실전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인지 막상 멘트를 시작하니 걱정했던 것보다는 덜 긴장되는 게 다행이었다.
곁에 앉은 재희는 멘트를 마칠 때마다 타임체커가 기록하는 시간을 연신 메모하며 사이사이 찬수가 보내는 사인을 확인했다. 재희라고 생방송에 익숙한 건 아닐 텐데도, 능숙하게 현장을 끌어가는 모습에 속으로 감탄이 나왔다.
정확히 80분을 꽉 채운 리허설을 마치자, 아직 방송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기력이 전부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찬수가 마지막 컷 사인을 보내는 것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난 재희가 윤을 보았다.
“잘하는데? 엄살 그만 부려도 되겠네. 가서 빨리 의상 갈아입고, 분장 팀 대기하고 있으니까 스탠바이 해.”
재희가 스탭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윤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옷매무새를 고치기 무섭게 어디선가 분장 팀 두 사람이 달려와 윤을 앉혀 놓았다. 한 사람은 머리를 만지고, 한 사람은 얼굴을 스펀지로 두드려 대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윤이 생전 처음 당해 보는 호사 아닌 호사에 시달리는 사이, 누군가 슬쩍 분장 팀의 뒤를 기웃거렸다. 마침내 분장 팀에게서 풀려나기 무섭게 어깨를 툭 치는 손길에 깜짝 놀란 윤은 그쪽을 돌아보았다. 전한동 부장이었다.
“김윤이랬나? 오늘 서정언 대신 방송 들어간다며?”
“인물 좋네.”
윤을 아래위로 훑어보던 한동이 슬며시 웃었다.
“잘할 수 있지? 김 피디한테 시보국 달려 있다 생각하고 하라고. 오늘 여기 사활 건 사람 한두 명 아니니까.”
알고는 있었지만, 그 말에 다시 한 번 입이 말랐다. 윤이 대답할 말을 고르는 사이, 어딘가에서 귀신같이 나타난 재희가 뒤에서 한동의 팔을 잡아끌며 짐짓 투덜거렸다.
“부장님, 김 피디 2년 차예요. 아직 입봉도 못 한 병아리가 긴장해서 방송 망하면 어쩌시려고요. 부담 주지 마세요.”
“야 인마, 내 올해의 언론인상이 걸려 있는데 어떻게 부담을 안 줘?”
한동이 반 농담으로 그 말을 받아넘겼다. 재희가 웃는 얼굴로 한동을 쫓아 보내고는 윤의 손에 큐카드와 대본을 쥐여 주었다.
“보고 있어. 긴장하지 말고.”
윤이 네, 하고 대답하자 재희가 시계를 확인하고는 몸을 숙여 나지막하게 말했다.
“서 피디 회복실로 옮겼다고 아까 연락 왔어.”
“의식 돌아왔대요?”
윤이 다급하게 묻자 재희는 눈썹을 좁히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이야. 출혈 잡는 것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렸나 봐. 너무 걱정하지 말고, 마지막까지 집중해서 하자고. 알았어?”
윤이 대답 대신 무릎 위에 놓인 손을 말아 쥐자, 가만히 윤을 내려다보던 재희가 물었다.
“진짜 괜찮겠어?”
“선배 저하고 약속했어요. 절대 안 죽는다고.”
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가 약속 어길 사람이라고 생각 안 합니다. 저도 선배한테 선배 없어도 이 방송 어떻게든 할 거라고 약속했고요.”
그건 스스로를 설득하는 말에 가까웠다. 그러나 말하는 사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지금 다른 생각은 사치였다. 오케이, 하며 윤의 등을 두드려 준 재희가 고개를 돌려 지혁을 찾았다.
“우 피디, 유튜브 YBS 채널에서 실시간 스트리밍 나가는 거 확인했어?”
“네. 저녁 뉴스 라이브 제대로 나가고 있어요. 이따 생방 시작하면 바로 연결해 준대요.”
지혁의 대답에 알겠다는 표시를 한 재희는 큐시트를 말아 쥐며 찬수에게 향했다. 윤은 손에 들린 대본으로 눈을 주었다. 몇 달을 취재했던 내용이고, 하루 종일 수백 번은 더 봤을 텐데도 반복해서 읽을 때마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윤은 숨을 고르며 성옥이 가져다 놓은 물을 연신 한 모금씩 마셨다. 입 안이 계속 타들어 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혼자 앉아 연신 대본을 중얼거리며 다시 읽어 보는 사이, 세팅이 완전히 끝난 스튜디오에서 스탭들이 저마다 자리를 잡았다.
김윤 마이크, 하고 찬수가 멀찍이서 외쳤다. 음향 팀이 달려와 윤에게 마이크를 달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민혜가 윤을 손짓으로 불렀다.
“김 피디, 이리 와 봐요.”
윤이 가까이 다가가자 민혜가 손을 뻗어 윤의 넥타이를 바로잡아 주었다. 민혜의 얼굴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민혜가 윤의 재킷 위를 탁탁 털며 몇 번이고 이리저리 살피더니 윤을 올려다보았다.
“잘할 수 있죠?”
“이거 하나 먹어요.”
민혜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윤의 입에 밀어 넣었다. 얼결에 받아먹은 윤이 이게 뭐냐는 표정을 하자 민혜가 심각하게 말했다.
“청심환. 방송 절대 망치지 말라고 주는 거예요. 실수하면 나한테 제일 먼저 혼날 줄 알아.”
아무리 봐도 농담이 아닌 얼굴이라, 윤은 들고 있던 물을 한 모금 마셔 청심환을 넘기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수 안 할게요.”
“멘트 잊어버리면 큰일 나요.”
“리허설 때 보셨잖아요.”
윤이 걱정 말라는 투로 대답하자 민혜가 부러 더 고뇌하는 얼굴로 눈을 가늘게 떴다.
“너무 완벽해서 걱정이야. 실전에서 그만큼 못할까 봐.”
“저 실전에 더 강하니까 걱정 마세요.”
민혜를 안심시키기 위해 씩 웃어 보이자, 민혜가 마주 웃고는 세트를 가리키며 가서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윤이 자리에 앉자 스탭들이 앵글과 조명을 다시 확인했다. 성옥이 윤의 앞에 잘 정리된 큐카드를 밀어 놓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민혜가 뒤를 돌아보며 프롬프터를 가리켰다.
“프롬프터는 바로 정면이에요. 긴급 상황 생기면 성옥이가 바로 알려 줄 거고.”
찬수의 옆자리에 앉은 성옥이 스케치북을 들어 보였다. 찬수가 윤에게 크게 말했다.
“스튜디오로 전환될 때 내가 사인 줄 거니까, 아까 해 봤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사인만 정확히 보면 문제없을 거야. 김 피디한테 붙는 거 2번 카메라니까 그쪽 보고. 고정이니까 괜히 여기저기 시선 안 돌려도 돼. 강재희는 어디 갔어? 시간 다 됐는데.”
“노조 사무실에 잠깐 들렀다 온대요.”
성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희가 스튜디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숨을 고른 재희가 세트에 앉았다. 음향 팀이 재희의 마이크를 점검하는 사이 찬수가 물었다.
“준비됐어?”
재희가 마이크를 달며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주조하고 부조 쪽 출입구 아예 잠갔어요. 시보국에서 만에 하나 대비해서 출입 통제하고. 여기 별관 스튜디오는 교양국에서 막는 중이에요.”
“주조 못 건드리면 남산에서 끊으려고 하진 않겠지?”
“그렇게까진 못 해요. 생방 나가는 도중에 끊으면 바로 실시간 검색어 찍고 핫이슈 올라온다고. 아무리 엄대진이라도 그건 자살이지.”
서둘러 물을 한 모금 마신 재희가 말을 이었다.
“낮에 시사본 예고 나갔대. 위에서는 상상도 못 하나 봐. CM 나갈 때 파일 바로 내리기로 했어. 그쪽에는 시사본 백업 없고, 설령 구한다고 해도 업로드하는 데 시간 걸릴 테니까. 생방송 시작하는 대로 하단에 긴급 생방송으로 편성 변경한다고 슈퍼 넣어 준다고 했고.”
분장 팀이 그새 살짝 흐트러진 재희의 머리를 다시 한 번 만지고는 세트 밖으로 빠졌다. 모니터에 비치는 얼굴을 확인한 재희가 성옥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작가, 김 피디 큐카드 전부 확인했지? 순서 맞게 줬어?”
성옥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벽에 걸린 디지털시계를 보자 방송까지 몇 분 남지 않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심장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카메라 앵글을 확인한 찬수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야, 지금 둘이 비주얼 완전 드라마네. 교양국이라 그런가, 조명 아주 교양 있어. 지금 조명발 완전 끝내줘.”
“시보국에서 이런 비주얼 보니까 가슴이 막 벅차고 그래요?”
재희가 받아넘긴 말에 찬수는 질색하는 얼굴로 대꾸했다.
“사람이 칭찬을 하면 너도 1절만 해라, 좀.”
“부정은 안 하네? 하긴 나 재수 없다고는 욕해도 얼굴로 욕하는 사람은 없더라.”
짐짓 턱을 만지며 모니터를 확인하는 재희를 본 찬수가 더 말 섞기 싫다는 표정으로 손을 휘적였다.
“그래, 너 잘났다. 시청자 카페에 아주 초 단위로 캡처 올라오게 찍어 줄 테니까 실물하고 너무 다르다고 욕먹을 각오나 하고 있어, 인마.”
스튜디오 안에 웃는 소리가 터졌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가벼운 농담 덕에 바짝 긴장된 분위기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앞에 놓인 대본을 다시 한 번 빠르게 넘겨보고는 눈으로 시계를 확인한 재희가 윤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온 에어 들어오면 실전이야. 정신 똑바로 차려.”
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계를 확인한 지혁이 외쳤다.
“스탠바이 들어갑니다!”
마침내 스튜디오의 온 에어 램프가 켜졌다. 조명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새하얀 빛에 눈이 부셨다. 윤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모든 공기가 달라졌다.
드디어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