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77
277화.
『자기가 진송신도시 관련해서 엄대진하고 남제선, 이쪽 커넥션 관련된 정보를 갖고 있다는 겁니다. 기자가 그 말 듣고 어떻게 눈깔이 안 돌아가요. 당장 만나자고 했는데 그건 또 안 된대요. 그러면서 자기가 지금 사정이 있다, 일단 다시 연락하겠다. 혹시 이삼 주 지나도 자기가 연락이 없으면 은행 금고에 뭘 맡겨 두겠다고 찾아가라는 겁니다.』
곧 화면에 조창식의 핸드폰이 비쳤다. 스마트폰 갤러리 앱에서 저장된 동영상을 확인하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미리 더빙해 둔 내레이션이 그 위로 깔렸다.
『조씨가 임형원 기자에게 맡긴 것은 핸드폰이었습니다. 그 핸드폰에는 영상 하나가 들어 있었습니다.』
조창식의 핸드폰 속 동영상이 스크린을 채웠다. 엄대진의 얼굴이 또렷했다.
『돈 안 도는 건 조금만 기다려. 민권당에서 검찰하고 국세청 내사 자료 뒤지고 있다는 소문 들어서 내가 당분간만 좀 참아 달라고 했어. 중요한 시즌이라, 알잖아.』
화면 속 엄대진은 느긋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럴 수 있을까. 이 방송을 보고 있는 엄대진의 얼굴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선 지나고 대선 지나고 해서 잠잠해지면 내가 조 군하고 손 사장 서운하게 안 하지. 그리고 내가 조 군한테 따로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이건 다음에 얘기하자고. 현장 진행은 어떻게 되고 있어? 현장에도 문제 있나? 요새 데모하는 건 좀 어때?』
편집된 영상 속 엄대진의 모습은 뉴스에서 늘 보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시청자들에게 이 모습이 어떻게 비칠까. 시장에서 소탈하게 상인들과 악수를 나누며 대화를 주고받던 엄대진은 거기 없었다.
『일정 무리해서라도 좀 바짝 당기라고 해. 엊그제 통화하면서 단가 낮춰서라도 미분양 세대부터 빨리 팔아 버리자, 문제 생기는 건 국토부에서 다 커버 칠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그렇게 얘기했는데 아직도 오더 안 떨어졌어? 남 대표도 나이 먹더니 영 예전 같지가 않아.』
여기저기서 스탭들이 자기 핸드폰을 확인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아마 회사 내부나 기자들로부터 오는 연락인 듯했다. 철진이 다들 핸드폰 끄라는 손짓을 했다. 재희에게로 앵글이 돌아갔다.
“현재 대선 후보인 한선당 엄대진 의원이 이들과 직접 접촉한 동영상이었습니다. 엄 의원은 손경일과 조씨에게 직접 지시를 내리며, 서온건설 경영에도 관여하는 정황을 보입니다. 서온건설 게이트 특검에서 이미 드러났듯, 서온건설은 엄 의원을 비롯한 한선당 의원들과의 커넥션을 통해 이득을 취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감리 조작은 필연적이었습니다. 서온건설의 감리를 전담한 업체는 고원종합기술공사였습니다.”
화면에 이종규 팀장이 보낸 메일 캡처와 이중으로 조작된 감리 확인서가 나타났다. 윗선에서 감리 조작을 지시한 내용이 화면에 상세하게 비쳤다.
“고원종합기술공사 내부에서 확보한 자료입니다. 해당 메일에는 서온건설 상무 출신의 사외이사 윤 모 씨가 직접 감리 조작을 지시한 정황이 드러나 있습니다. 이 고원종합기술공사의 최대 주주는 채기원이라는 인물입니다. 채기원은 서온건설 남제선 회장의 아내 김신옥의 오촌 조카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다시 형원과의 인터뷰 화면이 재생됐다.
『이 사람이 나이가 서른하나밖에 안 됐는데, 국내에서 행적 취재하니까 뭐 별다른 일을 하질 않아요. 임대업자로만 등록이 돼 있고. 그런데 감리업체 최대 주주에, 서온건설이 인수한 대국시멘트 지분 20퍼센트도 이 사람 소유예요.』
『대국시멘트면 중금속 과다 검출된 시멘트 업체 말씀하시는 거죠?』
화면에 수없이 쌓인 관련 서류들이 비쳤다. 그 위로 정언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서온건설 게이트 이후 엄 의원이 조성한 비자금을 추적하던 의 증언입니다. 이들은 엄 의원이 수백 개의 차명 계좌를 이용해 해외로 자금을 반출하는 것으로 추측했습니다.』
형원의 모습이 재차 이어졌다.
『엄대진 대포통장에서 해외로 나간 자금 추적하려고 우리 팀이 나갔어요. 그리스 소재 페이퍼컴퍼니에서 세탁 한 번 하고, 그걸 다시 스위스로 뺀다 이 정보를 얻어서 그거 확인하러 간 거죠.』
맞은편에 앉아 메모를 하고 있는 정언의 모습이 얼핏 비쳤다. 등 뒤의 VCR이 어떤 장면인지 뻔히 알고 있었기에 입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화면 속의 두 사람 모두 같은 일을 당한 채 병원에 누워 있게 될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리스 페이퍼컴퍼니, 회사 이름이 SO 컴퍼니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신옥 이니셜 S, O일 것이다, 이렇게 짐작을 했죠. 거기 대표 명의가 크리스티안 채라고 돼 있어요. 이 사람이 누구냐, 현지인도 아니고. 그런데 설립에 관여한 법인 취재하면서 그게 채기원인 걸 안 거죠, 우리는.』
성옥의 스케치북이 다시 한 번 올라왔다.
― 실시간 검색어 1위 엄대진
그것을 확인한 재희의 입매가 슬쩍 올라갔다. 형원이 보내 준 SO 컴퍼니 취재 자료들이 화면에 지나갔다.
“SO 컴퍼니는 대체에너지 개발 회사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공개된 공시 자료는 연간 매출액 10억 정도에 불과한 작은 회사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수십 억, 수백 억 돈이 계속해서 투자금 명목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취재 결과 SO 컴퍼니의 수출입 내역은 모두 실체 없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호형이 현지 업체와 통화하며 SO 컴퍼니의 수출입 내역을 확인하는 장면이 등장했다. 부품을 생산한다는 공장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전화 너머의 답변은 명확했다.
“취재를 진행하는 동안 서온건설 하청업체들의 제보가 쏟아졌습니다. 대부분이 원청과 담당 공무원, 지역구 의원에게 제공하는 향응과 뇌물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현장에서 자재를 빼돌리거나 품질이 낮은 것으로 바꿔치기한다는 증언도 나왔습니다.”
윤의 멘트와 함께 청명토목 퇴사자인 신병민으로부터 받은 내부 자료가 화면에 비쳤다. 곧이어 의 이번 주 보도 내용이 자료화면으로 등장했다. 윤은 편집된 자료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의 보도 내용대로 서온건설은 감리 조작을 통해 설계를 변경하고 자재를 속여 왔습니다. 이렇게 쌓인 자금의 일부는 한선당의 정치 자금으로 흘러들어 간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일부 하청업체는 공시지가보다 지나치게 낮은 금액으로 엄 의원에게 토지나 건물 등의 부동산을 매도했고, 엄 의원은 이를 시세의 몇 배로 매도해 큰 차익을 남긴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서온건설 하청업체인 노경건설 대표 이금호가 미성년자였던 엄대진의 막내아들에게 토지를 매도한 증거가 나타났다. 등기부등본의 명의 변경 내역과 당시 공시지가, 이금호가 매도한 가격, 엄대진이 다시 그 땅을 판 가격 등이 차례로 화면 옆에 자막으로 표시됐다.
“엄 의원의 가족들 역시 이 차명 거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었습니다. 제작진은 엄 의원의 부인인 변순철 회장의 차녀 변정화 씨 계좌로 상당한 금액이 입출된 내역을 확인했으며, 변씨가 계열사 계좌를 이용하여 매출을 속이고 하청업체에 무기장을 강요하여 세금 탈루 및 비자금을 확보하는 정황을 발견했습니다.”
호형이 확인한 변정화 계좌 관련 내역들이 재희의 멘트에 맞춰 화면 위로 지나갔다. 곧 엄대진의 돈이 이동하는 과정이 간단한 그림과 함께 화면에 나타났다. 정언의 내레이션이 거기 맞춰 흘러나왔다.
『엄 의원은 이렇게 조성한 자금을 수백 개의 차명 계좌, 소위 대포통장을 이용해 해외 페이퍼컴퍼니인 SO 컴퍼니에서 세탁한 것으로 보입니다. 차명 계좌를 통해 유한회사를 설립하고, 이 유한회사에서 엄대진 소유의 부동산을 고액으로 매수하거나 비상장 주식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돈의 출처를 감추려 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윤은 맞은편 스튜디오 벽에 걸린 시계에 잠깐 눈을 주었다. 곧 클라이맥스로 접어들 시간이었다. 이 스튜디오 바깥에서는 지금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까. 윤은 카메라를 응시했다.
“이 차명 계좌와 엄 의원 사이의 관련성을 찾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취재진은 오랜 추적 끝에 해당 의원실의 안영균 보좌관과 그 부인 정 모 씨가 이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정씨는 어게인라이프라는 노숙자 자활 재단과의 봉사 활동을 통해 손쉽게 노숙자들의 명의를 도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희는 명의를 도용당한 한 피해자와 접촉했습니다.”
반석교회의 신찬호 목사가 화면에 등장했다.
『아무튼 자기들 사무실에 한 번 방문해라, 그러면서 그 급식 봉사 하시는 여자분이 교회에서 목욕도 시켜 주고 새 옷도 주고 그랬답니다. 그 여자분 차를 타고 강남 사무실에 갔는데, 인적사항 적으라고 하고 사진 찍고 하더니 며칠 있다가 민증을 주더라는 거예요. 주소는 뭐 대충 급식소 주소로 쓰고 한 모양입니다.』
『본인이 아닌데 주민등록증 발급을 받아 왔다는 거죠?』
『그렇죠. 그때 20만 원인가를 받았대요. 나중에 경찰인지 변호사님인지 누가 찾아보니까 이 분 이름으로 계좌 개설한 증명서, 뭐 그런 게 있었답니다.』
찬호의 말이 끝나자 곧 모자이크 처리된 홍구영의 모습이 등장했다. 정언이 그의 곁에 앉아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분이 어르신 그 사무실로 데려가신 것 맞습니까?』
『예, 맞아요. 그게, 그랬죠. 아마 나 말고도 몇 명 더 그렇게, 그때 아마…… 잘은 모르겠네, 지금은. 내가 기억이, 이렇게 막 선명하지가 못해서.』
『어르신 말고 다른 분들도 그 사무실에 가서 통장 만들고 그랬었다는 거죠?』
구영의 인터뷰 화면 직후 은행 인근에서 찍힌 정보현의 CCTV 화면이 재생됐다. 곧 화면이 분할되며, 교회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던 정보현의 사진과 CCTV 속 인물의 비교 분석 결과가 나타났다.
“정씨가 타인 명의 계좌를 개설한 날 은행 인근에서 찍힌 CCTV 영상입니다. 전문가들은 분석 결과 CCTV 속 인물과 사진 속의 인물이 동일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윤의 멘트가 끝나자 다시 화면이 바뀌며 채기원의 EX 빌딩 전경이 비쳤다. 스크린 속 카메라는 EX 빌딩 바깥에 붙은 간판들을 하나씩 확대했다. 카메라는 ‘사단법인 어게인라이프’와 ‘국회의원 성재춘 사무실’ 간판에 특히 오래 머물렀다.
“이 어게인라이프라는 단체는 노숙자 자활을 돕기 위한 재단으로 설립되었으나, 그 실체는 엄 의원의 자금 세탁용 재단이었습니다. 이 단체와 한선당 성재춘 의원의 사무실은 같은 건물에 있으며, 이 건물의 소유주는 SO 컴퍼니 대표 채기원입니다. 우연의 일치일까요?”
재희의 질문을 받은 윤이 말을 이었다.
“이 단체의 발기인 중 한 사람은 서온건설 게이트 당시 한선당 의원들 가운데 유일하게 처벌받은 최창묵 전 의원입니다. 저희는 오랜 설득 끝에 최창묵 전 의원과의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화면에 창묵의 초췌한 얼굴이 나타났다. 하단에 선명하게 ‘최창묵 전 의원’이라는 자막이 박힌 채였다. 창묵의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발기인으로 등록된 몇 사람, 뭐 이미 조사하셨으니까 아시겠지만 전부 엄대진이나 서온건설하고 관련 있는 사람들이죠.』
『어게인라이프가 어떤 목적의 단체인지 알고 계셨습니까?』
『처음에는 몰랐죠. 정말 노숙자 자활 지원 단체인 줄 알았습니다. 비례 받고 난 뒤에 안 거죠. 사실상 저는 거기 이름만 올려 뒀으니까, 활동은 직원들이 알아서 하겠거니 한 겁니다.』
『노숙자들 이용해서 명의 도용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걸 나중에 아셨다는 거죠?』
『네. 그런 방식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를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이때까지만 해도 정언에게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는 걸 떠올리자 입이 썼다. 윤은 서둘러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후반부로 달려갈수록 스튜디오 안의 공기가 점점 더 팽팽해졌다. 창묵의 말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