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79
279화.
『지난번에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저도 더는 힘들어서 못 하겠습니다. 저 집에 애가 둘입니다. 부인하고 애 둘 키우겠다고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박 과장, 지금 사무실이야? 다음 승진에서는 절대 안 밀리게 해 준다잖아.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야.』
『처음에는 한 번만, 그다음에는 또 한 번만, 한 달만, 삼 개월만 더, 그렇게 일 년을 했습니다! 이건 사람 사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승진해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지금 와서 발 빼는 건 더 위험해. 이런 일인 줄 모르고 시작했어?』
『몰랐습니다. 아시잖아요. 저 진짜 몰랐습니다.』
이 녹취를 처음 들었던 순간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스쳤다. 온몸이 떨리던 그 감각은 아직도 생생했다. 죽을 만큼 무섭다는 게 뭔지 처음 깨달았던 순간이었다. 회사로 돌아오는 내내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었다.
그때 자신의 손을 잡아 주던 정언의 체온이 되살아났다. 늘 서늘한 손이 따뜻하게 느껴졌던 순간. 그 순간을 떠올리면 누구라도 그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박씨가 마지막으로 남긴 조창식과의 통화 녹취록입니다.”
재희가 정면을 응시했다. 그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좋은 남편, 다정한 아빠, 성실한 동료로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회사는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했다는 이유로 그를 괴롭혔습니다. 승진이 되지 않고 한직으로 밀려났지만,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가족들을 위해 위험한 출장을 시작했습니다.”
재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어쩌면 그대로 침묵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었다면 그는 지금 살아서 가족들과 함께 이 방송을 보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박규형 씨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침묵하지 않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진실을 말하려 했고, 그걸 원하지 않았던 누군가가 그를 죽였습니다.”
마치 쓸모없어진 물건을 버리듯, 아무렇지도 않게. 그 춥고 어두운 새벽, 아무도 없는 공사 현장에서 죽어 가던 규형이 마지막으로 생각한 것은 가족들이었을 터였다. 자상한 남편이자 다정한 아빠였던 한 사람의 평범한 삶은 이토록 쉽게 무너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박규형 과장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이 거대한 진실게임의 종착역은 대한민국에서 현재 가장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는 한 인물입니다. 지금 이 방송을 보고 계신다면 대답해 주십시오. 엄대진 의원님, 당신은 대통령이 될 자격을 가진 사람입니까?”
윤은 카메라를 향해 물었다. 엄대진과 마주 앉았던 그 순간,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을 자기 물건처럼 다룰 권리가 없다고 말했을 때 그의 얼굴에 스치던 불쾌감을 윤은 결코 잊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는 뭐라고 대답할까.
“누구도 이 평범한 가장의 죽음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남겨진 유가족은 진실을 알고자 했습니다. 저희에게 이 사건을 제보한 이후, 유가족은 사측으로부터 끊임없이 제보를 취소하라는 협박과 회유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도 유가족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재희가 말하는 사이 타임체커가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드디어 이 긴 여정의 마지막이 눈앞이었다. 잠시 사이를 둔 재희가 말을 이었다.
“지금 여기서 시청자 여러분들을 만나기 위해 저희 역시 수많은 고비를 넘어야 했습니다. 지난 17년간 여러분과 함께했던 그 모든 의 순간들은, 어쩌면 오늘을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재희의 말끝이 얼핏 흔들렸다. 이 순간을 각오하고 있었을 텐데도, 막상 거기에 직면하자 밀어닥치는 감정을 컨트롤하기 쉽지 않은 듯했다. 숨을 한 번 들이쉰 재희가 정면을 보았다. 재희의 마지막 멘트였다.
“는 900회를 마지막으로 여러분의 곁을 잠시 떠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지막 인사가 아닙니다. 저희는 이 자리에서 오늘 방송을 시작으로 더 치열하게 나아가겠다고 선언합니다.”
이 단 한순간을 위해 달려온 시간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쳤다. 윤은 카메라에 시선을 주었다. 빨갛게 점멸하는 작은 빛이 동공에 맺혔다. 윤은 입을 열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언제나 침묵하지 않고, 방관하지 않는 국민들에 의해 진보해 왔습니다. 거대한 권력 앞에서 평범한 이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하며 가장 강력한 무기는 진실입니다.”
수십 번을 다시 썼던 마지막 멘트였다. 타임체커가 마지막 30초를 알려 왔다. 자신에게 허락된 30초는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웠다.
“저희가 오늘 이 자리에 앉은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어떤 권력도 침묵을 강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우리 모두가 누구도 진실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 누구도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의 삶을 짓밟지 않는 세상이 매일 조금씩 더 가까워지기를 바랍니다.”
시계의 숫자가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쏟아지는 조명이 순간 시야를 흐렸다. 스튜디오 안의 모든 사람이 사라지고 이 공간에 홀로 앉아 있는 듯한 감각이 차올랐다.
“마지막으로…….”
온몸이 떨렸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그 소리가 귓가를 가득 채웠다. 마지막. 자신의 입으로 방금 발음한 그 단어가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대본의 모든 멘트들이 지워지고, 마침내 단 한 문장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이 마지막 문장은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이었어야 할 저의 존경하는 선배이자 동료 서정언 피디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시계의 숫자가 0을 가리켰다.
“지금까지 타협하지 않는 진실, 의 김윤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상상했던 진짜 마지막이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절대 끝나지 않을 듯한 정적이 지났다.
마침내 온 에어 램프가 꺼졌다. 스튜디오 안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온몸이 그대로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카메라를 내팽개치고 달려온 찬수가 윤을 꽉 끌어안았다. 웃음소리와 울음소리가 한데 뒤엉켰다. 찬수가 뭐라고 외치는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 소란스러운 침묵 속에서 윤은 눈을 내리감았다.
한 방울의 물.
이것으로 충분했다.
방향을 구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정언은 무작정 걸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멍한 머릿속으로 끝없이 걷던 정언의 눈에 마침내 작은 문이 하나 보였다. 이 문을 열면 어디로 가게 될까. 그런 의문을 떠올리기도 전, 손이 먼저 문을 밀었다.
문이 열리자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팔을 올려 눈가를 가린 정언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 경계를 선뜻 넘어갈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던 정언은 머뭇거리며 팔을 내렸다. 빛에 익숙해진 시야로 들어온 건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풍경이었다.
봄날의 공원이었다. 푸르른 잎이 나무마다 무성했다. 정언은 문밖으로 한 걸음 나섰다. 등 뒤에서 문이 닫혀 돌아보자 이미 문은 그 자리에 없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정언을 스쳐 지나갔다.
“서정언.”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정언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먼발치의 벤치에 앉은 남자가 손짓을 했다. 정언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눈을 깜빡였다.
현국이었다. 조금 덥수룩한 머리에 뿔테 안경, 갈색 재킷과 체크무늬 셔츠. 기억 속에 언제나 남아 있던 모습 그대로였다.
정언은 현국에게 달려갔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일 텐데도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마침내 현국의 앞에 멈춰 섰을 때, 앉아 있던 현국이 정언을 올려다보았다.
정언은 내내 떠올리던 현국의 얼굴을 문득 상기했다.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던 그 모습. 그러나 지금 눈앞의 현국은 그렇지 않았다. 안경 너머의 눈은 웃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우리 딸 못 본 사이에 너무 커서 못 알아보겠다.”
“거짓말.”
입을 열자 가빠진 숨소리에 섞여 부루퉁한 말이 튀어 나갔다. 현국이 옆자리를 손으로 두어 번 쓸며 앉으라는 표시를 했다.
“기자가 거짓말을 왜 해.”
정언은 현국의 곁에 풀썩 주저앉았다. 앉기 무섭게 피로감이 몰려왔다. 내내 어둠 속을 걸었던 탓인 듯했다.
“그때랑 똑같은데.”
공연히 창피해져 툴툴거리자 현국이 정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도 세상에서 제일 예쁜 최효명 여사 다음으로 예뻤는데, 지금은 더 예쁘네.”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
질색하는 정언의 얼굴에 현국이 소리를 내어 웃었다. 정언은 고개를 돌려 현국을 물끄러미 보았다.
마흔다섯. 죽기에는 젊은 나이였다. 현국은 나이보다 몇 살쯤 덜 먹어 보이는 편이라 더 그랬다. 마지막 기억은 영안실 침대에 누워 있던 싸늘하고 창백한 얼굴이었다. 그때로부터 십수 년이 지났는데도 전혀 변함없는 모습이 어쩐지 생경했다.
“기분이 이상해.”
정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현국이 웃음기 어린 투로 물었다.
잠시 말이 없던 정언은 시선을 돌렸다. 어린아이들이 깔깔대며 달려간 길 위로 하얗게 햇살이 부서졌다. 정언은 혼잣말처럼 나지막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이렇게 컸는데 아빠는 그대로잖아.”
말을 하는 동안 현국이 자신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마흔다섯 그대로일 거라는 사실을 깨닫자, 불현듯 심장 부근으로 지끈거리는 감각이 스쳤다. 정언은 애써 웃었다.
“몇 년만 더 있으면 아빠랑 친구 되겠다. 한 십오 년 지나면 아빠가 나보다 어려지겠네.”
“영원히 젊은 거 맘에 드는데.”
농담처럼 대꾸한 현국이 손을 깍지 끼어 뒷머리를 받쳤다. 오랫동안 공원의 풍경을 응시하던 현국이 입을 열었다.
“힘들었어?”
마치 지난 몇 달 사이 벌어진 일들을 다 알고 묻는 것 같았다. 정언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조금.”
아니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여상한 척하며 대답하자, 현국이 다시 물었다.
“지금은 어때?”
“모르겠어.”
정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힘들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지만, 모든 걸 다 놓아 버릴 만큼은 아니었다. 돌아가야 되는데, 하고 생각한 건 그때였다.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손끝을 만지작거리던 정언은 현국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빠는 후회 안 해?”
“그럴 거였으면 시작 안 했지.”
현국은 앞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부전여전이라며 펄펄 뛰던 효명이 떠올랐다. 웃음을 터트리자, 현국이 왜 그러냐는 듯 정언을 보았다. 정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빠 보러 갔었는데, 나 어릴 때 찍은 사진 있어서 옛날 생각났어.”
“너 열한 살 때 소풍 가서 찍은 사진? 아빠가 맨날 바빠서 안 놀아 준다고 막 울어서, 회사에 휴가 내고 갔던 건데.”
현국이 씩 웃는 얼굴에 정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그랬다고?”
“생전 뭐 조르는 적이 없었는데 그러니까, 내가 딸한테 너무 못해 줬구나 미안했지.”
그랬었나. 정언은 기억을 되짚었다. 지금은 희미해진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