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8
28화.
오전에만 부동산을 열 군데는 돌아본 것 같았다. 이 동네의 어지간한 오피스텔은 다 구경한 기분이었다. 부동산에서 들은 얘기들은 대부분 다 첫 번째 부동산과 비슷했다.
원주민들과 서온건설 측의 대립이 심하다, 언론이 투자 심리를 위축시키고 있다, 현장에서의 자살 사건 때문에 힘들다, 엄대진이 신도시 부지 선정에 상당히 힘을 썼다 하는 이야기는 거의 공통적이었다.
마지막 부동산에서 처음인 양 이미 본 오피스텔을 다시 보고 나왔을 때는 이미 늦은 점심시간이었다. 변변찮은 식당 하나 없는 동네라 점심은 편의점에서 해결해야 했다.
작은 테이블에 컵라면과 삼각 김밥을 놓고 윤과 마주 앉은 정언은 한마디 말도 않고 기계적으로 젓가락만 움직였다. 윤은 눈을 들어 정언을 흘끔 보았다. 젓가락질은 계속하고 있었으나 음식은 그다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내내 돌아다녔으니 밥맛이 있을 리 만무했다. 아침에도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코피를 흘리던 게 떠올라 마음에 걸렸다. 윤은 같이 산 자기 몫의 생수병을 따서 정언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물 좀 드세요.”
“나도 손 있어. 굳이 안 따 줘도 돼.”
정언이 고개도 들지 않고 대꾸했다. 평소였다면 속이 상할 법도 했으나, 아무래도 컨디션이 영 안 좋아 보이는 정언에게 굳이 그런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짐짓 입을 삐죽거린 윤은 장난스럽게 물었다.
“신혼인데 이런 것도 못 하게 하세요?”
다음 순간 사레가 들린 정언이 콜록거리며 근처에 놓인 냅킨을 집어 입을 막았다. 한참 기침을 하던 정언이 입가를 닦고는 뒤에 있던 휴지통에 구긴 냅킨을 쑤셔 넣었다. 장난이 심했나 싶어 슬쩍 눈치를 살피자, 잠시 말이 없던 정언이 윤을 마주 보았다.
“연기 잘하던데.”
“그럼요, 저 학교 다닐 때 연극부였는데요.”
윤의 대답을 들은 정언이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눈썹을 좁혔다.
“진짜야?”
“아뇨, 거짓말이에요. 저 무대공포증 있거든요. 괜찮았어요?”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윤을 본 정언이 기가 찬다는 얼굴로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제멋대로 굴었다고 혼이라도 낼 줄 알았는데 다행이었다. 정언이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손길에 윤은 슬쩍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손을 잡은 건 충동적이었다. 생각보다 더 가늘고 차가운 손이라 내심 놀랐던 것이 떠올랐다.
윤은 컵라면을 마저 먹으며 턱으로 정언의 앞에 놓인 음식들을 가리켰다.
“천천히 드세요. 그렇게 드시면 기운 없어서 못 다녀요.”
“연기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남 걱정도 잘하네.”
“남이면 걱정 안 하죠. 선배니까 걱정하지.”
그 얄팍한 농담 같은 말이 실은 진담에 훨씬 더 가깝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젓가락을 한 번 움직이는 사이 그 사실을 알아차린 윤은 손을 멈췄다.
기실 살면서 딱히 어장관리 같은 데 흥미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친절한 성격 탓에 오해받는 것이 싫어 나름대로 선을 그을 때는 긋는 편이었다. 그러나 정언의 앞에서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가볍게 뱉는 단어들 사이에 떠도는 진심은 윤에게도 낯선 것이었다. 그건 타인의 선 안에 무심코 발을 딛으려는 듯한 감각이었다. 순간 그런 자신이 정언에게 무례하게 느껴질까 봐 조금 겁이 났다. 함부로 선을 넘는 사람처럼 여겨지는 건 싫었다.
곧 이건 사적인 영역의 문제라는 걸 깨달은 윤은 공연히 귀 끝을 만졌다. 뜨거워진 귀 끝이 화끈거렸다.
물론 자신이 요즘 부쩍 정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걸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기획 서정언.
다섯 글자 뒤에 있는 진짜 정언이 뭔지 자꾸만 궁금해지는 건 왜일까. 이런 감정을 그냥 동경으로 치부하고 묻어 둘 수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윤은 간혹 스스로도 정언에 대한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그것도 점점 더 자주.
윤이 생각에 빠진 사이, 정언은 채 반도 먹지 않은 음식을 치웠다.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윤을 빤히 보던 정언은 아직 따지 않은 자기 생수병을 윤 앞으로 밀어 주었다.
“물 마셔. 체하겠어.”
늘 그렇듯 무심한 말투였으나, 놀랍게도 그건 왠지 약간 다정하게 들렸다. 내내 신혼부부 행세를 하고 다닌 덕분인지 조금 가까워진 느낌이 들기는 했다. 그 사소한 다정함에 초콜릿을 한 입 먹은 듯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다고, 뚜껑 정도는 따 주실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방금 전까지 겁먹었던 걸 또 새까맣게 잊고 병을 따며 공연히 부루퉁한 척을 하자, 정언이 팔짱을 끼었다. 정언의 무감한 얼굴 위로 언뜻 장난기 어린 표정이 지났다.
“신혼에 혼자 뚜껑 두 번 따는 게 불만인 남자랑은 살기 힘들 거 같은데.”
이번에 사레가 들린 쪽은 윤이었다. 마시던 물이 도로 넘어와, 윤은 한참 기침을 하다 겨우 눈물을 닦았다. 픽 웃은 정언이 커피를 사는 사이 윤은 탁자 위를 치웠다.
돌아온 정언이 컵에 든 커피를 하나 내밀었다. 빨대는 이미 꽂혀 있었다. 커피를 받아 든 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선배가 농담하는 거 처음 보는데요.”
“가방 챙겨.”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짧게 뱉은 정언이 몸을 돌렸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정언을 부리나케 쫓아가며, 윤은 재킷 위로 가슴을 한 번 눌러 보았다. 평소보다 빨리 뛰는 비트가 손바닥 안으로 스몄다. 당황했기 때문일까. 놀란 건 사실이었다.
윤은 정언의 뒷모습을 보다 조금 전의 장난스러운 표정을 상기했다. 찰나였으나 그건 어쩐지 정언의 벽 안쪽을 살짝 들여다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얼굴도 할 줄 아는구나, 하고 생각함과 동시에 윤은 까닭 없이 재희를 떠올렸다.
재희에게는 정언의 그런 얼굴이 익숙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삼스럽게 그 사실을 깨닫자 어쩐지 심장 한쪽이 얼음을 깨뜨린 듯 조그맣게 선뜩했다. 왜인지 납득할 수 없는 감각이라, 작은 가시가 박힌 듯 거슬렸다.
윤은 그 감각을 지우기 위해 손에 든 커피를 마셨다. 달고 쓰고 차가운 커피가 목을 타고 내려갔다. 정언의 손에도 같은 커피가 들려 있었다. 그새 다 마셨는지, 정언은 빈 듯한 컵을 쥐고 큰 보폭으로 걸었다. 고개를 두어 번 흔든 윤은 뛰다시피 해서 정언의 곁으로 붙어 섰다.
정언이 향한 곳은 ‘진송신도시 서온 스타일하우스 신축공사현장’이라고 크게 쓰인 현장 게이트였다. 옆의 차도로 때마침 레미콘 트럭 몇 대가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차례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이미 골조가 거의 완성된 건물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웅웅대는 중장비 소리와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흙먼지, 간혹 섞이는 인부들의 고함 소리가 그 살풍경한 골조 사이로 섞여 현장은 마치 거대하고 어두운 철골의 숲처럼 보였다.
정언이 윤을 돌아보았다.
“스케치 잠깐 딸까?”
“아, 네.”
윤은 바로 카메라를 꺼내 켜고는 현장을 촬영했다. 액정에 천천히 그 스산한 풍경이 담겼다. 끝없이 펼쳐진 골조의 숲을 한 바퀴 돌고 앵글을 내리자 컨테이너 박스에 마련된 현장 사무실과 간이 주차장의 모습이 담겼다. 현실감 없는 풍경이었다.
“여기 일반인 들어오면 안 되는데, 어떻게 오셨습니까? 모델하우스는 저쪽으로 가셔야 되는데요. 안내 못 받으셨어요?”
작업복과 작업모를 착용한 사람이 현장 안쪽에서 두 사람을 알아보고는 바로 달려왔다. 가슴의 명찰에는 ‘과장 현용민’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정언은 윤에게 카메라 넣으라는 눈짓을 하고는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용민이 명함을 받아들고 잠시 눈을 찡그리며 명함을 들여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들었다.
“피디님이세요? 사전에 촬영 얘기 들은 게 없는데…….”
“박규형 과장님 아십니까?”
말을 끊으며 들어오는 정언의 질문에 용민이 눈에 띄게 멈칫했다.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정언이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저희가 몇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요.”
“제가 지금, 지금은 좀 그런데요.”
용민이 말을 더듬었다. 정언이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서자, 용민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정언은 다시 한 번 말했다.
“시간 많이 안 뺏을 겁니다. 정말 몇 가지만 여쭤보고 싶어서 그래요.”
“아, 저희가 곤란한데…… 이거 사전에 연락을 주고 오셔야 돼요. 이러시면 진짜 곤란해요.”
“오늘 촬영하러 온 거 아니고, 그냥 정말 주변 분들한테 얘기만 좀 들으려고 온 겁니다. 저희가 사전에 공문 보내고 촬영 오는 게 더 편하시겠어요? 그러면 정식으로 본사에 공문 보내고 방문하겠습니다. 저 소속입니다.”
정언이 명함을 내밀었다. 프로그램 이름을 들은 순간 용민이 한숨을 뱉으며 눈가를 벅벅 긁었다. 아무래도 골치 아프게 됐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용민이 한쪽에 세워진 컨테이너 사무실을 가리켰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시죠. 이게, 윗분들이 보시면 아주 좀 그래요.”
모호하게 뭉뚱그리는 단어들 사이로 까닭 모를 두려움이 비쳤다. 두 사람은 용민을 따라 사무실로 향했다. 현장사무실 팻말이 붙은 내부로 정언과 윤을 안내한 용민은 문을 닫았다.
앉아 있던 여직원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조금 더 앳돼 보이는 여직원이 조심스럽게 용민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손님이세요? 커피 드릴까요?”
“방금 마시고 왔어요. 괜찮습니다.”
정언이 먼저 거절했다. 용민이 손짓을 하자 여직원들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사무실 안에는 책상이 몇 개 놓여 있었으나 여직원 두 사람의 자리를 빼고는 거의 다 비어 있었다. 정언과 윤이 낡은 소파에 나란히 자리를 잡자 용민이 맞은편에 앉아 미간을 문질렀다.
“경찰도 몇 번 왔었는데…… 제가 뭐 드릴 말씀이 별로 없어요, 진짜로.”
그 말에 정언이 고개를 약간 까딱였다.
“그냥 편하게 말씀하세요. 저희가 취조하고 이럴 거 아니니까요. 제가 약속드린 대로 몇 가지만 여쭤볼게요. 박규형 과장님하고는 어떻게 아는 사이시죠?”
“여기 현장 올 때부터 같이 일한 동료예요.”
“박 과장님도 이 사무실에 같이 계셨나요?”
“저기, 창가 쪽 저 자리가 박 과장 자립니다. 아직 다 치우지를 못했어요.”
대답을 들은 윤은 몸을 조금 일으켜 용민이 가리킨 쪽을 넘겨다보았다. 텅 빈 책상 위에는 박스테이프로 입구를 봉한 복사 용지 박스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윤이 용민에게 물었다.
“저 박스는 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