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80
280화.
어릴 적부터 뭔가를 조르는 법이 드물던 정언이었다. 효명은 어린애가 왜 그러냐며 늘 혀를 찼다. 그런데도 현국에게 울면서 그런 말을 했을 정도라면 어린 마음에 어지간히 속이 상했던 모양이었다. 기억을 더듬는 정언에게, 현국이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입구에 풍선 파는 아저씨가 있었는데, 가만히 서서 그것만 계속 쳐다보더라. 사 달라는 말도 못 하고. 풍선 사 줄까? 그랬더니 아니래. 잃어버리기 싫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풍선 하나 사서 손가락에 줄 묶어 줬잖아. 그거 집에도 가지고 와서 내내 방에 띄워 놨던 거 기억나?”
사진 속의 노란 풍선. 퍼뜩 그 풍선이 생각났다. 현국의 말에 흐릿해진 기억 속의 어떤 장면들이 뇌리를 스쳤다. 손가락에 몇 번을 단단히 묶어 두었던 실. 터질까 봐 조심하며 집으로 가져온 풍선은 오랫동안 정언의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정언아, 있잖아.”
현국이 가만히 정언을 불렀다.
“소중한 게 있으면 잃어버릴까 봐 먼저 걱정하지 마.”
정언은 그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소중한 것.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던 것.
현국의 손에는 어느새 노란 풍선이 하나 들려 있었다. 현국이 정언의 손에 그 풍선을 쥐여 주었다. 현국은 그날처럼 정언의 가는 손가락에 실을 매듭지어 주었다.
현국이 고개를 젖혔다. 파란 하늘과 녹색 이파리 사이로 선명한 노란색 풍선이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렸다. 현국이 조용히 말했다.
“지키면 되는 거야.”
지키면 되는 거야.
정언은 그 말을 입 안으로 다시 한 번 되풀이했다. 손을 말아 쥐며 곁을 보았을 때 현국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멍하니 서 있던 정언은 문득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멈칫했다.
“선배, 정신 드세요?”
윤이었다.
여기 어떻게, 하고 생각하며 정언은 눈을 떴다. 방금 전까지 선명하던 시야가 일순간 어둡고 흐릿하게 가라앉았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규칙적인 무늬를 이루는 하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맡에 켜진 조도 낮은 수면 등이 사물과 어둠의 윤곽을 부정확하게 흐렸다.
정언은 고개를 돌렸다. 크게 뜨인 눈으로 이쪽을 응시하는 얼굴이 익숙했다.
“……김 피디?”
정언이 입술을 달싹이자, 잠깐 굳어 있던 윤이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아…… 다행이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정언은 그제야 자신이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조 침대에 앉은 윤이 한쪽 손을 감싸 쥔 채였다. 그 손의 부들부들 떨리는 감각이 둔탁하게 스미다 점차 또렷해졌다.
“선배가 저 못 알아볼까 봐 진짜 걱정했어요.”
윤이 애써 웃었다. 속삭임에 가까운 말은 농담처럼 들렸다. 그러나 정언은 그 너머의 감정들을 쉽게 알아차렸다. 안개가 낀 듯 멍하던 머릿속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한밤중의 도로. 윤에게 걸려 왔던 전화. 손경일. 충돌. 그리고…… 하나씩 되살아나는 기억에 정언은 퍼뜩 소스라쳤다.
“여기…….”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뜻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왼쪽 어깨에서 둔한 아픔이 밀려들었다.
“뭐야?”
반사적으로 튀어나간 물음에 윤이 정언을 달래듯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
“선배 사고 났던 거 기억하세요?”
정언은 대답 대신 윤을 보았다. 윤이 반대편 손으로 주변에 드리워져 있던 커튼을 걷었다. 한밤중의 창가가 눈에 들어왔다. 야경의 빛이 멀리서 반짝였다. 옆자리에 놓인 침대는 빈 채였다.
“여기 병원이에요. 사고 엄청 크게 났어요. 선배 하루 종일 의식 없었다고요.”
그 단어를 입 안으로 곱씹자 그제야 사라졌던 현실감이 생겨났다. 정언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과 윤 둘뿐인 병실 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철제 침대와 링거 걸이 따위가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옮기자 한쪽 손에 연결된 링거가 보였다.
정언은 그쪽 손을 움직여 보았다. 손등에 꽂힌 주사바늘에서부터 뻐근한 통증이 희미하게 번졌다. 반대편 벽에 시계가 걸려 있었다. 어둠 때문에 문자판은 확실히 보이지 않았다. 시계. 정언은 순간 떠오른 생각에 다급하게 물었다.
“방송은? 지금 몇 시야?”
목소리가 잔뜩 잠긴 채였다. 정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윤이 짐짓 투덜거렸다.
“그게 제일 먼저 걱정되세요? 한밤중에 여기 앉아 있는 사람은 걱정 안 되시고요?”
정언이 멈칫하자 윤이 곧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농담이에요. 지금 일요일 새벽 세 시 반이에요. 방송 끝나자마자 왔어요. 어머님이 한숨도 못 주무셔서 제가 대신 있겠다고 했어요. 잠깐 주무시고 아침에 오신대요.”
“방송 한 거야?”
일요일 새벽 세 시 반. 방송이 끝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윤이 그 말에 아까워 죽겠다는 표정을 했다.
“선배가 방송 보셨어야 되는데. 저 완전 장난 아니었다니까요.”
“김 피디가 방송을 했다고?”
정언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재희가 굳이 윤을 생방송에 앉혔다니, 방송이 어떻게 나갔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정언의 불신을 읽었는지 윤이 어깨를 으쓱했다.
“몰랐는데 제가 화면발 잘 받더라고요.”
정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윤이 쿡쿡거리며 웃는 소리를 냈다.
“농담이에요. 근데 선배가 보셨으면 진짜 깜짝 놀라셨을걸요.”
“저 좀 멋있었거든요.”
옅은 수면 등의 빛으로 윤의 얼굴에 음영이 졌다. 가만히 윤을 쳐다보던 정언은 윤이 아직 메이크업도 지우지 않았다는 걸 곧 깨달았다. 공들여 만진 머리에 소매를 걷어 올린 흰 셔츠, 파란색 넥타이. 병실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주얼이었다.
정언이 윤을 빤히 응시하자, 걱정하는 줄 알았는지 윤이 서둘러 정언을 안심시켰다.
“방송 잘 끝났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조간 1면으로 엄대진 비자금 기사도 나간대요. 인터넷이 난리예요. 사무실로 전화 너무 많이 와서 다들 아예 선 뽑아 버렸어요.”
실감이 나지 않았다. 눈을 깜빡이던 정언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위에서는?”
“방송 중간에 밖에서 충돌 있었대요. 주조하고 부조 쪽 출입 아예 통제하고 우리 스튜디오도 다 잠가 놓고 방송 들어갔거든요. 월요일에 이사회에서 가만 안 둔다고 그랬다는데, 모르겠어요. 사실 뭐라고 하든 말든 관심도 없고요. 각오 안 한 거 아니니까.”
윤이 여상하게 대답했다. 정언은 나지막하게 긴 숨을 뱉었다. 안도감과 허전함이 묘하게 뒤섞인 이상한 감정이 속에서부터 차올랐다. 정언이 침묵하자, 가만히 정언을 보고 있던 윤이 물었다.
“아픈 데는 없으세요?”
“조금. 심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나 많이 다쳤대?”
정언이 묻는 말에 윤이 잠깐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선배 차 절반이 다 날아가서 119 왔을 때 다들 운전자 죽었을 거라고 그랬대요. 병원 들어왔을 때도 출혈이 많았는데 큰 혈관이 손상돼서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왼쪽 어깨 골절이라 당분간 움직이기 좀 불편할 거라는데, 그래도 이 정도인 게 천만다행이라고…… 방송 끝나자마자 병원 달려왔더니 선배 아직도 의식 없다고 그러잖아요. 혼자 별별 생각 다 했다니까요.”
왼쪽 어깨의 통증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거의 하루가 넘도록 의식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멍하니 윤을 쳐다보던 정언은 입술을 달싹였다.
“걱정했겠네.”
“저하고 약속하셨잖아요. 절대 안 죽을 거라고.”
윤이 다시 웃는 얼굴을 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 끝이 언뜻 떨렸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다는 게 눈에 빤히 보였다. 윤이 정언의 시선을 피하며 멋쩍게 눈썹 위를 긁적였다.
“그래서 그냥 그동안 피곤했으니까 이참에 푹 쉬시나 보다 그랬죠. 덕분에 선배가 제 앞에서 자는 거 원 없이 구경도 했고.”
공연히 눈가를 문지른 윤이 서둘러 말을 돌렸다.
“더 주무셔도 돼요. 푹 자야 빨리 낫죠.”
윤이 조금 흐트러진 이불을 다시 고쳐 덮어 주었다. 정언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현국이 손에 쥐여 주었던 풍선이 생각났다. 손끝을 움직이자, 풍선 대신 그 손을 잡고 있던 윤이 가만히 차가운 손끝을 감싸 왔다. 스며드는 체온이 따뜻했다.
“김 피디.”
정언이 나지막하게 부르는 소리에, 윤이 의아한 듯 정언을 보았다.
“……있잖아.”
입 안이 말랐다. 정언은 눈을 내리감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어릴 때 아빠랑 엄마랑 공원에 소풍을 간 적이 있거든. 근데 거기서 파는 풍선을 보고 그게 갖고 싶은데, 말은 안 하고 쳐다보기만 했대. 아빠가 사 줄까, 하고 물어봤는데 아니라고 했다는 거야. 잃어버리기 싫다고.”
윤은 말없이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정언이 숨소리를 섞어 말을 이었다.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는 없어질 것 같으니까, 그러면 더 속상하잖아. 처음부터 없었으면 안 그래도 되는데.”
윤이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감은 눈으로 희미한 빛이 스며들었다.
“예전부터 그랬어. 그래서 뭘 욕심내는 게 성격에 안 맞는 거야. 그게 갖고 싶어도,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고 싶어도…… 없어져 버리면 내가 못 견딜 것 같아서.”
그게 편했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늘 먼저 밀어냈다. 그러면 누구도 다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마지막 순간 느꼈던 건 결국 후회였다. 끝없이 떨어지는 의식 속에서 바람은 단 하나뿐이었다.
이 순간 이후의 삶이 허락된다면.
“방송 내가 하겠다고 얘기하고 가는 길에 계속 생각했었어. 끝나면 김 피디한테 말해야겠다고.”
윤이 황급히 정언의 말을 끊었다.
“선배, 잠깐만요.”
윤은 초조한 얼굴로 마르는 입술을 축이더니 정언에게 물었다.
“저 마음의 준비 좀 해도 돼요?”
“싫은데.”
“딱 5분만요. 저 잠깐 나가서…….”
정언이 사이를 두지 않고 대답하자,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 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일 거라고 짐작한 듯했다. 정언은 정말 병실을 나가려는 윤의 등에 대고 말했다.
“죽는 건가 생각하니까 그게 후회됐어.”
윤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김 피디가 전화했을 때 말할 걸 그랬다.”
정언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좋아한다고.”
긴 침묵이 지났다. 돌아선 윤의 얼굴이 창백했다. 윤이 떨리는 손으로 침대 난간을 꽉 움켜쥐었다. 손끝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였지만 알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 옆에 있어 주면 안 되냐고.”
감고 있던 눈을 뜬 정언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윤과 시선을 맞췄다.
― 소중한 게 있다면 잃어버릴까 봐 걱정하지 마. 지키면 되는 거야.
현국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정언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잃어버릴까 봐 겁났어.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적 없었으니까.”
곁에 두면 다치게 할까 봐 무서웠다. 윤이 생각해 본 적 없는 평범한 삶의 순간들을 자신에게 끌어들일 때마다, 그 순간들을 언젠가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더 두려워졌다. 그래서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두 번 다시 그런 후회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어둠 속에서 바란 지금 이후의 삶. 그건 이 말을 하기 위해 허락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