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81
281화.
“내가 욕심내면 안 될 것 같은데, 내가 가지면 분명히 잃어버릴 텐데…….”
“안 그래요.”
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떨리는 눈동자가 선연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 자신을 보는 그 눈이 언제나 낯설었다. 소년과 남자의 경계를 흐리는 윤의 눈을 마주 볼 때면, 거부할 수 없이 마음이 이끌렸다.
“안 그래요, 선배. 절대 아니에요. 선배가 저 잃어버릴 것 같으면 묶어서 끌고 다니셔도 돼요.”
윤이 정신없이 말했다. 이 순간에도 그 말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졌다.
“본인이 무슨 소리 하는지 알고 하는 거지?”
“몰라요. 저 지금 제가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는데, 상관없어요. 저 좋아한다고 하신 거잖아요. 선배가 저보고 옆에 있어 달라고 하신 거 맞잖아요.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마지막 단어들은 거의 울고 있었다. 대답 대신 윤을 올려다보자, 고개를 숙인 윤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흰 시트 위로 순식간에 스며드는 광경이 슬로 모션처럼 맺혔다. 서둘러 눈가를 문지른 윤이 어색하게 웃었다.
“솔직히 저 방송 끝나면 울 줄 알았거든요. 그때는 잘 참았는데…….”
그새 잠겨 버린 목소리가 끝을 흐렸다. 정언은 농담처럼 내뱉었다.
“이거 가지고도 이러는데 청혼했다간 통곡하는 거 아냐?”
“선배, 제발요…… 저 지금도 기절할 것 같아요.”
진심으로 애원하는 윤의 얼굴에 정언은 짐짓 웃음기를 거뒀다.
“기절하지 마. 기절했다 일어나면 그런 적 없다고 할 거니까.”
“잠깐만요, 잠깐만요 선배. 그럼 녹음할 테니까 지금 한 번만 더 얘기해 주세요. 기절했다 깨도 증거는 있어야 되잖아요.”
윤이 황급히 핸드폰을 찾는 듯 몸을 더듬었다. 아무리 봐도 장난이 아닌 것 같은 그 태도에 결국 다시 웃는 소리가 터졌다.
“안 해도 돼. 나 그냥 하는 말 없는 거 알잖아.”
서 있기가 힘든 듯 침대 난간을 붙잡은 윤이 몸을 숙이며 긴 한숨을 뱉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동안 말없이 서 있던 윤이 손끝으로 정언의 머리칼을 만졌다. 머리칼을 쓸어 올려 주며 이마로 스치는 손끝이 떨었다. 정언은 그 손을 잡아 내렸다. 그러자 긴 손가락이 사이로 스미듯 깍지를 끼어 왔다.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그 말에 윤이 웃었다.
“괜찮아요.”
잠시 정언을 들여다보던 윤이 몸을 기울였다. 얼굴이 가까워졌다. 고작 한 뼘도 되지 않을 듯한 사이에서 가느다란 호흡이 느껴졌다. 숨이 겹쳐지는 거리. 이제 익숙해진 희미한 섬유유연제 향 같은 것이 그 사이로 흩어졌다.
“진짜 다 괜찮아요.”
윤이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정언은 잡힌 손으로 윤의 넥타이를 가만히 쥐었다. 풍선의 실을 놓치지 않으려는 아이처럼 움켜쥔 손길에 윤이 다른 쪽 손을 침대 위로 짚으며 몸을 더 깊이 숙였다. 닿은 입술 사이로 윤의 체온이 순식간에 번져들었다.
정언은 눈을 감았다. 민감해진 감각들 사이로 모든 단어가 자취를 지웠다. 한동안은 어떤 말도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괜찮았다.
모든 것이 전부 다.
안녕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먼저 1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변함없이 를 아껴 주신 시청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간 언론 보도를 통해, 혹은 다른 경로로 공영방송에 가해지고 있는 탄압을 접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저희 역시 그 탄압에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미처 다 언급할 수 없는 수많은 방해 속에서도, 시청자 여러분의 관심과 사랑으로 무사히 900회 방송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저희는 미리 말씀드린 대로 잠시 여러분의 곁을 떠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패배 선언이 아닙니다. 저희는 시청자 여러분께서 오랫동안 보내 주신 신뢰에 보답하기 위해, 방송의 바깥에서 더 치열하게 싸우고자 한 걸음 물러납니다.
돌이켜 보면 는 저희 삶의 가장 큰 행운이자 가장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 저희가 진실의 목격자로서 살 수 있는 행운을 얻었지만, 그 진실의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벅찰 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시청자 여러분 덕분이었습니다. 어둠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기꺼이 동행해 주신 여러분이 계셨기에 저희도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시청자 여러분과 함께하는 매 순간은 저희의 역사였으며, 곧 모두의 역사였습니다. 저희는 역사가 언제나 진보한다고 확신합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 여기까지 함께해 주신 여러분의 작은 목소리가 모여 세상을 바꾸고 이 기나긴 밤을 밝히는 힘이 된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저희는 그 믿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맞설 것입니다.
는 반드시 여러분의 곁으로 돌아옵니다.
901회로 다시 인사드릴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제작진 일동.
“저희도 주말에는 쉬어야죠. 일부러 전화 꺼 놓은 건 아니고요, 일이 있었습니다. 아뇨, 저희가 당장 인터뷰 응할 상황이 아니라서요. 네, 네. 일단 좀 마무리되고 나서, 네.”
열 통째가 넘어간 이후로는 숫자 세는 것을 포기했기에, 방금 걸려 온 게 몇 번째 전화인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재희는 아침부터 내내 울려 댄 탓에 뜨거워진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다른 팀원들이라고 사정이 나은 건 아니었다. 끊임없는 벨소리와 진동으로, 월요일 아침부터 사무실은 시장 바닥을 방불케 하는 수준이었다. 귓전을 때리는 전화벨에 예준이 부리나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네, 누구…… 아, 박 기자님. 아니, 벌써 말씀드렸잖아요. 아이고, 제가 박 기자님만 피하고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제가 뭐 안 만나드리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진짜 저희가 지금 그럴 시간이 없어요. 잠깐만요, 다른 데서 전화가 또 들어와서.”
예준이 한쪽 어깨에 수화기를 끼우고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확인하는 사이, 전화를 받고 있던 찬수는 말 돌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니, 무슨 말을 해 달래. 그냥 우리 방송 나간 게 다야. 비자금 그건 원래 가 하던 거고. 그거 메인이 서정언 피디인데 지금 부재중이야. 난 진짜 뭐 아는 게 없다니까. 나는 아주 조금, 조금 서포트만 했고…… 이 인간이 속고만 살았나, 왜 이래.”
이 소란함 속에서도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 우아하게 커피를 홀짝이던 현진이 마침내 더 이상은 못 참겠는지 벌떡 일어나며 고함을 쳤다.
“야, 다들 전화 좀 끊어! 아주 시끄러워 죽겠어!”
우아한 건 겉보기뿐이었던 듯했다. 황급히 수화기를 내려놓은 철진이 항변했다.
“전화가 오는 걸 어떡해요. 핸드폰을 꺼 놓을 수도 없고.”
“도대체 다들 여태 어디서 뭐하다가 우리가 모가지 내놓고 방송하니까 뒷북을 찢어지게 치냐?”
현진의 말에 재희가 웃는 소리를 냈다.
“뒷북이라도 쳐 주니까 얼마나 다행이에요.”
사실 방송을 내보낸 뒤 가장 걱정했던 건 반대의 상황이었다. 자신들을 제외한 모두가 침묵하고, 그런 보도는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되어 버린다면 그거야말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이었다.
이렇게까지 한 것도 아무 보람 없이, 의 몇몇과 자신들, 가 역풍을 맞고 그대로 묻혀 버릴 가능성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때문에 월요일 아침부터 쏟아지는 연락과 엄대진에 대한 뉴스들은 차라리 안심이었다.
그때 지혁이 오늘자 조간신문을 품에 한 아름 안고 사무실에 나타났다. 근처 편의점에서 신문이란 신문은 다 쓸어 온 모양이었다. 십수 종의 신문을 탁자 위에 차곡차곡 펼쳐 놓는 지혁의 곁으로 팀원들이 모여들었다.
가장 먼저 선명한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였다.
‘“엄대진, 장인까지 살해했나”…… YBS 보도 파문’.
장인 살해. 입 안으로 뇌어 본 말은 조미료를 듬뿍 친 음식처럼 입에 착착 붙는 느낌이었다. 하여튼 선동 실력은 알아줘야 돼,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 재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서온건설 게이트 제2막 개봉, 엄대진 어디로 가나’, ‘YBS , 잇따른 추가 폭로 예고’ 따위의 제목들을 훑어보던 현진이 팔짱을 끼었다.
“헤드라인 좋고, 웬일이래? 덮고 넘어갈 줄 알았는데. 서온건설 게이트 때도 일주일 내내 1면에 싣는 놈들이 하나도 없더니.”
“변순철이 걸렸잖아요. 유력 대권주자가 장인 죽였다는데 안 물어뜯을 수 있나.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진짜 크지. 에서 바로 장인 살해로 헤드라인 뽑은 거 봐요. 가 이렇게 나오면 나머지도 따라가게 돼 있어요.”
재희의 대답에 현진이 휙 휘파람을 불었다.
“실직 일보 직전인데 출발은 좋네.”
바람 빠지듯 웃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이미 일요일 오전에 인사위원회 소환 예고 문자가 모두에게 날아온 뒤였다. 월요일까지 기다리지도 못하고 문자부터 보낸 걸 보니, 위에서 어지간히 난리가 났나 보다 짐작은 하는 중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또 어디 기자인가 싶어 무심코 시선을 내리자, 충민의 이름이 보였다. 재희는 충민에게 들어온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인사위원회 소환 명단 지금 붙었다네.”
그 말이 신호라도 된 양 곧이어 다른 피디들의 핸드폰도 연달아 진동했다. 메시지로 온 명단을 확인한 찬수가 코웃음을 쳤다.
“아주 작정했는데? 우리하고 에 주조, 부조, 교양국 최진수 부장에 그 팀 스탭들까지 싹 다 소환했네.”
“오륙십 명은 되겠는데? 아이고, 아주 날밤 까고 인사위원회 하라고 그래. 그 사람들 언제 다 하나하나 불러서 소명하는 거 들으려고?”
“그러니까. 삽질한다 삽질한다 하니까 진짜 삽질하고 있어, 이것들이.”
찬수가 현진과 주거니 받거니 하며 투덜대는 사이, 재희는 손끝으로 스크롤을 하며 명단을 보았다. 하단에는 ‘오늘 오후부터 가나다순으로 소환 예정, 순서는 명단대로’라고 적혀 있었다.
명단 가장 위에 선명히 박힌 자신의 이름을 확인한 재희는 과장된 동작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매도 먼저 맞겠네, 이거.”
“선배 맷집 좋잖아요. 미리 많이 맞고 인사위 진 좀 빼요.”
“대신 맞아 준다는 말은 못할망정 우리 의리가 이것밖에 안 돼?”
재희는 철진의 말에 눈을 부릅떴다. 철진이 낄낄거리는 사이, 사무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야, 강재희.”
한동이었다. 문틈으로 손짓하는 한동을 본 재희는 어, 하며 바로 한동에게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