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84
284화.
괜히 받아 준 건가. 때늦은 후회가 잠시 밀려왔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없던 두통이 생기는 것 같아 관자놀이 부근을 누른 정언은 말을 돌렸다.
“인사위원회 소환한다고 그러던데 혹시 명단 왔어? 폰 확인을 못 했는데.”
사과 조각을 집어 먹던 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왔던데요. 우리 팀하고 , 주조, 부조 들어간 엔지니어 분들, 팀까지 거의 다 명단에 있어요.”
“는 왜? 스튜디오 건 때문에?”
정언이 눈썹을 찡그리며 묻자 윤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스튜디오도 그렇고, 우리 팀에 스탭이 없으니까 하고 그쪽에서 지원해 줬거든요. 그거 문제 삼으려고 그러는 것 같아요.”
“인원 엄청날 텐데, 인사위에만 며칠 걸리겠네. 누가 먼저야?”
“강 피디님이요.”
정언은 그 말에 바람 빠지는 소리로 웃었다.
“잘못 걸렸는데. 순서 왜 그렇게 정했대? 선배 혼자 필리버스터(filibuster)48) 하는 인간인 거 몰랐나?”
팀원이라면 누구나 각종 위원회에는 익숙했다. 재희는 그 중에서도 독보적이었다. 대형교회 경영 비리 건 보도로 대형 소송이 걸렸을 때 열린 인사위원회에서 혼자 여섯 시간을 떠드는 통에, 나중에는 위원들이 질려서 제발 그만 말하고 나가 달라고 애원했다는 이야기는 시보국에서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었다.
“가나다순으로 그냥 정한 거라던데요.”
윤이 대답했다. 정언은 머릿속으로 자신의 순서를 계산해 보고는 혀를 찼다.
“그럼 난 며칠 더 있어야 되겠네. 김 피디는 몇 번째야?”
“일곱 번째요. 제 차례 오려면 한 이삼 일 걸릴 거래요.”
별것 아니라는 투였다. 윤의 말투만 들으면 인사위원회가 아니라 가벼운 면담 자리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베드 테이블 위를 손끝으로 두드리던 정언은 눈썹 위를 두어 번 문질렀다.
“사무실 난리일 텐데, 안 나가 봐도 돼?”
팀원들을 떠올리자 가장 먼저 걱정이 밀려들었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입사 이래로 지금 같은 일은 처음이었다. 엄대진에게 상황이 불리해진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회사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세력들이 당장 힘을 잃을 리 없었다.
결국 밀려나는 건 이쪽일 것이다. 반드시 방송을 하겠다고 다짐했을 때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 현실이 눈앞에 닥치자 막막한 기분이었다. 장외로 밀려나면 어떤 방식으로 싸워야 할까. 방송을 준비하는 과정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길고 지루한 싸움이 될 게 분명했다.
“강 피디님이 어차피 일도 없는데 하루 쉬라고 하셨어요.”
긍정적인 건 천성인지, 윤은 느긋했다. 그 느긋함이 어이없는 한편 이상하게 안심되는 기분이라 실없이 웃음이 터졌다. 윤이 의아한 표정으로 정언을 마주 보았다. 정언은 서둘러 짐짓 엄한 표정을 했다.
“오랜만에 쉬면서 여기서 아침부터 죽치고 있는 이유가 뭐냐고.”
“선배하고 있는 게 쉬는 거예요. 들어가서 한숨도 못 잤다니까요.”
“엄청 피곤했을 텐데 왜 잠을 못 자.”
한숨도 못 잤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대번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윤이 손을 뻗어 구겨진 정언의 미간을 눌러서 펴 주고는 입가를 슬쩍 말아 올렸다.
“설레서요. 꿈에 선배 나와서 심장 터질까 봐 잠을 못 자겠더라고요.”
누가 불이라도 붙인 것처럼 단번에 얼굴로 피가 몰렸다. 눈 하나 깜짝 않고 그런 소리를 잘도 하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윤이 평소에도 하고 싶은 말은 절대 안 참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자신이 본 건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자 앞이 막막했다.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빤히 응시하는 시선에 그렇지 않아도 뜨거워진 얼굴이 더 화끈거렸다. 도저히 그쪽으로 눈을 돌릴 자신이 없어, 정언은 이미 덮어 둔 신문 위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글자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민망해한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윤이 말을 돌렸다.
“방송 나가고 집에서 난리 나서 여기 있는 게 차라리 속 편해요.”
“무슨 일 있어?”
같은 문장을 눈으로 세 번째 읽으며 묻자 윤이 소리를 내어 웃었다.
“저 집에 잘리고 로 옮겼다고 말 안 했거든요. 부모님이 생각도 안 하고 계시다가 텔레비전 보고 기절하신 거죠. 쟤가 왜 저기 있냐고. 처음에는 닮은 사람인가 했다가 밑에 제 이름 나가는 거 보고 엄청 놀라셨대요.”
“그걸 왜 말 안 했어?”
정언은 생각도 못 한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여태까지 얌전히 하는 줄 알았던 아들이 뜬금없이 생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걸 봤다면 어느 부모라도 놀라지 않을 리 없었다. 황당해하는 정언의 얼굴에 윤이 멋쩍어하며 대답했다.
“프로그램 잘리고 전보당했다고 그러면 걱정하실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거든요. 제가 방송 타게 될 줄도 몰랐고. 그러니까 집에서 어떻게 된 건지 당장 와서 설명해 보라고 난리가 난 거예요. 너무 바빠서 못 간다고, 나중에 얘기한다고 그랬죠.”
열없이 뒷머리를 긁적이면서도 눈은 여전히 생글거렸다.
“그래 놓고 여기서 이러고 있어?”
“무자식이 상팔자죠?”
선수를 치는 윤의 말에 알긴 아네, 하고 중얼거리자 윤이 쿡쿡 웃었다. 뭐라고 한마디를 하려던 정언은 병실로 들어서는 누군가의 인기척에 말을 멈췄다. 조심스럽게 들어온 사람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열린 커튼 사이로 정언을 보더니 반색했다.
“안녕하세요, 피디님.”
희경이었다. 양손에 빵집 쇼핑백과 주스 선물세트를 든 희경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희경을 알아본 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안녕하세요!”
“저, 이거…….”
희경이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윤이 서둘러 쇼핑백과 주스 상자를 받아 들어 곁에 내려놓고는 얼른 희경에게 자기가 앉아 있던 자리를 권했다. 사양하던 희경은 윤이 재차 앉으세요, 하고 재촉하자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얼굴은 좋아 보여 내심 안심이 되었다. 정언이 자세를 고쳐 앉자, 희경이 얼른 정언을 만류했다.
“편하게 계세요.”
“괜찮습니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세요? 애들은요?”
정언의 물음에 희경이 살짝 민망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방송 보고 제가 연락 드렸었는데 답이 없어서요. 방송에도 안 나오시고 그래서, 혹시 무슨 일 있으신가 싶었는데 작가님이 피디님 사고로 입원하셨다고 얘기하시더라고요. 제가 찾아뵈어도 되냐고 하니까 병원 알려 주시길래 얼굴 뵙고 인사만 잠깐 드리고 싶어서…… 입원한 분 괜히 부산하실까 봐 애들은 언니한테 맡겨 놓고 왔어요.”
“일부러 안 오셔도 되는데, 죄송합니다.”
사고가 난 이후로 핸드폰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더니 연락이 끊겨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공연히 미안한 마음에 정언이 먼저 사과하자, 희경이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사고 났다고 하셔서 제가 너무 놀랐거든요. 혹시 취재하다가 안 좋은 일 당하신 건가 싶어서 오면서 정말 별생각이 다 드는 거예요. 저희 때문에 그러신 거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
희경이 말끝을 흐렸다. 정언은 얼른 그 말을 부정했다.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일부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먼저 인사 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하죠. 어머님하고 수아, 리아 아니었으면 저희 방송 시작도 못 했을 텐데요.”
“아니에요. 피디님들 바쁘신 거 아는데 계속 신경 써 주시고 챙겨 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희경이 고개를 가로젓고는 잠시 머뭇거렸다. 무슨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손끝을 만지작거리던 희경이 마침내 용기가 난 듯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제가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네, 그럼요.”
“그날 수아가 드린 게 뭔지…… 집에 가서 물어봐도 끝까지 대답을 안 하는 거예요. 저한테는 비밀이라고 그러면서. 무슨 이상한 물건 드려서 괜히 폐 끼친 건 아닌지 계속 신경이 쓰여서요.”
“아, 그게…….”
정언은 대답하려다 순간 망설였다. 규형이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감하고 블랙박스 메모리를 수아에게 주었다는 이야기를 해도 좋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정언의 얼굴에 나타난 짧은 주저를 읽었는지, 희경이 먼저 물었다.
“혹시 애들 아빠 블랙박스 메모리 같은 거였나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멈칫하는 정언을 본 희경이 애써 웃는 얼굴을 했다.
“방송에서 마지막에 애들 아빠 목소리가 나왔잖아요. 차 안에서 찍힌 영상인 것 같아서요. 그런데 제가 그런 걸 본 적도 없고, 드린 적도 없어서 어디서 구하셨을까 하다가 그 생각이 나더라고요.”
희경의 목소리 끝이 약간 잠겼다. 희경이 무릎 위에 놓인 손을 꼭 말아 쥐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정언이 뭐라고 선뜻 말을 꺼내기 어려워한다는 걸 눈치챘는지, 윤이 얼른 냉장고에 들어 있던 음료수며 과일 따위를 꺼내 올려놓았다.
“네. 수아가 말하면 안 된다고 해서 저희가 따로 말씀을 못 드렸어요. 박 과장님께서 이걸 다른 가족분이 가지고 계시면 혹시 경찰 조사 받거나 할 때 그쪽으로 넘어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수아한테 주셨던 것 같아요. 과일 좀 드시죠. 주스도 드시고요. 애들은 괜찮죠? 상담은 계속 받고 계시고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린 윤은 음료수 병의 뚜껑을 따 희경 앞에 밀어 놓았다. 희경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말했다.
“아빠 생일파티 한 이후로 확실히 많이 좋아졌어요. 요즘은 수아하고 리아가 자꾸 강아지 키우고 싶다는 얘기도 하고, 원장님도 애들 정서에 좋다고 하셔서 주말에 유기견 센터 같이 가 보기로 했어요.”
“강아지 키우면 손 많이 가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자기들이 잘 돌보겠다고, 어디서 배웠는지 각서까지 썼어요. 목욕도 잘 시켜 주고 청소도 잘 하겠다고요.”
희경이 핸드폰을 꺼내더니 사진을 한 장 찾아 정언과 윤에게 보여 주었다. 삐뚤삐뚤한 글씨로 쓴 각서였다. 색색의 색연필로 ‘1. 강아지를 잘 돌보겠습니다. 2. 청소를 잘 하겠습니다. 3. 목욕을 우리가 시켜 주겠습니다. 4. 엄마 말씀 더 잘 듣겠습니다.’라고 꾹꾹 눌러쓴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아래는 박수아, 박리아라는 이름 석 자도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두 사람이 웃는 것을 본 희경이 조금 민망한 표정으로 가방에 핸드폰을 도로 넣고는 따라 웃었다.
“애들 조르는 건 못 당하겠더라고요. 참, 방송 나가고 하니까 몇 군데서 다른 일자리 소개시켜 주시겠다는 연락도 왔어요. 방과후 교사 월급이 워낙 적으니까, 조금 더 많이 받는 자리로 옮기면 어떻겠냐고요. 그리고 상생변이라는 데서 서온건설에 소송하자고, 도와주시겠다고 하시고요. 최, 뭐라고 하셨는데. 여자분. 제가 잘 몰라서…….”
“최유림 변호사님이요?”
“아, 네. 맞아요. 아는 분이세요?”
정언이 되묻자 희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생변에서 어려운 분들 많이 도와주시거든요. 최 변호사님 믿을 만한 분이고, 박 과장님하고도 진송신도시 현장에서 여러 번 만나신 적 있다고 들었습니다. 소송 생각 있으시면 도움 많이 되실 겁니다. 서온건설 측에서 다른 얘기 있었나요?”
“조금 아까 보상금 관련해서 만나고 싶다고 메시지가 오긴 했거든요. 어떻게 할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시댁하고도 얘기해 봐야 할 것 같고요.”
“그러면 일단 최 변호사님한테 연락하셔서 메시지 보여 드리고 의논하시면 어떨까 싶은데요. 제 생각에는 소송 진행할지, 회사하고 합의할지 그런 부분은 전문가하고 얘기하시는 게 좋을 것 같거든요.”
정언의 말에 희경이 네, 네,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언은 그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길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면 그대로 잊어버릴 듯한 평범한 사람. 그러나 정언은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때로 얼마나 강인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