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85
285화.
입이 마르는지 음료수를 한 모금 더 마신 희경이 병을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정언의 한쪽 손을 잡아 왔다. 따뜻한 손이었다. 가느다란 떨림이 그 체온을 타고 스며들었다. 희경이 입술을 몇 번 물었다 놓고는 말을 꺼냈다.
“사실 제가 처음에 게시판에 글 올릴 때는 진짜 연락 주실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너무 답답하니까, 누구라도 얘기만 좀 들어 줬으면 좋겠다 싶어서 매일 글 올린 거거든요. 피디님들 오셨을 때까지만 해도 확신이 없었고…… 그런데 방송 보고 너무 놀랐어요. 아, 애들 아빠한테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나는 그런 걸 하나도 몰랐는데, 혼자서 꼭꼭 숨기고 어떻게 살았을까 싶고…….”
천천히 말하는 사이 희경의 눈이 새빨개졌다. 윤이 얼른 티슈 몇 장을 뽑아 건네자 희경이 아이고, 하며 창피한 표정으로 서둘러 눈가를 눌렀다.
“제가 아픈 분 병문안 와서 주책이죠.”
“아니에요.”
정언은 희경의 손을 감싸 쥐었다. 희경이 잠긴 목소리로 겨우 말을 이었다.
“보면서 너무 무섭고 겁났어요. 내가 당한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피디님들은 괜찮으실까 싶은 거예요. 방송 보고 잠이 안 와서 뉴스 검색도 많이 해 봤거든요. 그러고 나니까 그 젊은 분들이 이걸 어떻게 하셨을까, 이런 일 하시면서 저하고 애들까지 챙겨 주신 건가 생각하니까…… 제가 제 생각밖에 안 한 것 같아서 정말 죄송했어요.”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용기 내서 글 안 올려 주셨으면 저희가 방송 못 만들었죠. 중간에 포기하고 싶으셨을 텐데 끝까지 잘 싸워 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정언은 거대한 권력과 기업을 상대로 혼자 남겨진 희경이 견뎌야 했을 나날들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언젠가는 자신들이 진실을 알려 줄 거라는 막연한 희망에 기대 버텨 온 희경에게 어떤 존경의 말도 아깝지 않은 건 당연했다.
그 한마디에 있는 힘껏 틀어막으며 격류를 막아 내던 둑이 무너진 듯, 희경이 결국 참으려 애를 쓰던 눈물을 터트렸다. 정언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희경을 달래는 대신 그 손을 더 꼭 잡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윤이 소리 없이 병실 문을 닫았다.
정언은 오랫동안 침묵했다. 자신 앞에서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인 적 없었던 효명이 희경의 모습 위로 겹쳐졌다. 한 인간으로서의 고통을 묻어 둔 채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참아야 했을까. 그 아픔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기에, 굳이 울음을 멈추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에게는 충분히 마음껏 울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한참을 흐느끼던 희경이 겨우 조금 진정됐는지 연신 죄송해요, 죄송해요, 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곁에 앉아 있던 윤이 서둘러 물을 한 잔 따라 주며 마시게 했다. 숨도 쉬지 않고 컵을 비운 희경은 목덜미까지 새빨개져 얼굴을 몇 번이나 닦으며 중얼거렸다.
“아휴, 제가 아픈 분 뵈러 와서 이게 무슨 꼴인지…….”
“괜찮아요. 그동안 고생 많이 하신 거 아는데요. 앞으로도 무슨 일 생기면 꼭 연락 주세요. 저희가 도와 드릴 수 있는 일이면 뭐든 도와 드릴 테니까 부담 갖지 마시고요.”
정언이 웃으며 대답하자 희경이 다시 한 번 눈가를 티슈로 꾹꾹 누르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얼굴 뵈러 왔으니까 그만 갈게요. 제가 가야 쉬시죠. 피디님, 정말 감사해요. 얼른 나으세요. 다 나으시면 제가 꼭 식사 한 번 대접할게요.”
“애들 보러 가겠습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김 피디, 좀 모셔다 드릴래?”
희경에게 가벼운 묵례를 건넨 정언이 윤에게 넌지시 묻자, 윤이 선뜻 네, 하고 대답했다. 희경이 괜찮다며 연신 사양했으나, 자리에서 일어난 윤은 희경을 안내해 병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병실 안이 금방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정언은 반쯤 걷어 둔 커튼 너머의 창가로 시선을 주었다. 아파트와 빌딩 숲 사이로 비치는 하늘이 청량했다. 여름의 햇살이 그 사이로 떨어졌다.
취재를 처음 시작했을 때가 겨울의 끝물이었던 것이 떠올랐다. 회색 하늘, 가라앉은 공기, 차갑고 마른 바람 사이를 지나 도착한 계절이 문득 눈부셨다.
윤이 돌아온 건 십 분쯤 뒤였다. 정언이 창가를 보고 있는 걸 알아차린 듯, 윤은 병실로 들어오자마자 창을 열었다. 바람이 병실 안으로 불어 희미하게 떠도는 소독약 냄새를 멀리 밀어냈다. 창가에서 잠시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손을 내밀어 보던 윤이 다시 정언 곁에 앉았다. 정언은 윤에게 물었다.
“잘 가셨어?”
“네. 병원 앞에서 택시 잡아 드렸어요.”
대답한 윤이 몸을 조금 숙이며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잠시 말이 없던 윤이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방송하고 나서부터 계속 기분이 이상해요.”
“모르겠어요. 그냥…… 신문, 방송 다 우리 얘기로 도배되고, 사람들이 전부 그 얘기 하고 있잖아요. 아무것도 못 바꿀 수도 있다고 각오하고 한 거라 더 그런가 봐요. 이렇게 될 수도 있구나, 내가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한 건가, 뭐 그런 생각도 들고요. 처음 올 때는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거든요.”
정언은 처음 윤을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파란색 PP박스를 품에 안은 채 회의실로 들어서던 윤의 모습이 어제 일처럼 되살아났다.
만약 그때 윤이 로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민혜가 희경이 올린 글을 무시했다면, 자신이 희경에게 동질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쉽게 지나칠 수도 있었던 수많은 우연들이 모여 도달한 곳을 짐작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본인이 몇 달 동안 뭘 했는지 이제 실감이 좀 나?”
피식 웃는 정언의 얼굴을 본 윤이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선배가 다 하신 거죠, 뭐. 전 선배 뒤만 따라다녔는데.”
“겸손이 지나친 거 아냐? 두 번만 따라다녔다가는 김 피디가 내 선배 되겠어.”
“에이, 싫어요. 그냥 후배 할래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내뱉은 말에 윤이 펄쩍 뛰었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정언은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선배 시켜 준대도 싫어? 선배 되면 나 안 따라다녀도 되는데?”
“그러니까 싫죠. 따라다니지도 못하는데 선배 돼서 뭐해요.”
잠깐 말문이 막힌 정언은 윤을 빤히 보았다. 그 시선을 맞받던 윤의 입가가 슬며시 호를 그렸다.
“왜 그렇게 보세요?”
“기가 막혀서.”
“제 얼굴이요?”
정언은 대답 대신 윤의 한쪽 뺨을 잡아당겨 흔들었다. 윤이 아야야, 하며 팔을 휘적거렸다. 정언이 손을 놓아주기 무섭게 윤이 빨개진 볼을 문지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 억울한 얼굴 뭐야?”
정언이 엄한 표정을 하자 윤이 입을 삐죽거렸다.
“이런 사이에 좀 받아 주실 수도 있잖아요. 농담인데.”
남들이 잘생겼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할 때는 민망해하면서, 둘만 있을 때는 꼭 자신의 비주얼을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윤이었다. 평소의 그 태도를 생각해 볼 때 방금 전의 그 말이 농담이라고 단정할 수가 없었다.
매번 장난스럽긴 했지만, 살면서 본 남자 중에 자기가 잘생긴 걸 모르는 남자는 정언의 기억에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재희마저도 자기 얼굴에 자부심이 넘쳤다. 윤이라고 예외일 리 만무했다. 하여튼 이 인간들은,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 정언은 픽 웃으며 되물었다.
“이런 사이가 무슨 사인데.”
“연애하는 사이요.”
투덜거리는 말투였으나 대답은 바로 돌아왔다. 연애. 울림소리가 많은 두 글자의 단어가 눈에 띄지 않는 돌부리처럼 불현듯 마음에 채였다. 낯선 기분이었다. 정언이 잠깐 그 기분의 정체를 생각하는 사이, 갑자기 말이 없어진 정언을 본 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반응 뭐예요? 선배 그런 분이었어요?”
“그런 분은 또 뭐야?”
기가 차서 되묻자 윤이 심각하게 대꾸했다.
“저 잠도 못 잘 만큼 설레게 하시더니 이렇게 심장 떨어지게 그러실 거예요? 선배 저 가지고 노시면 진짜 나쁜 사람이에요.”
“진짜 나쁜 사람 못 만나 봤어?”
정색하는 정언의 얼굴에 윤이 몸을 숙이며 쿡쿡거렸다. 한참 웃던 윤이 정언의 손을 잡아 마디 위로 살짝 입술을 대었다. 가는 숨이 손끝에 닿는 감각이 생생했다. 저도 모르게 깜짝 놀란 정언이 손을 빼려 하자, 윤이 그 손을 더 꽉 쥐며 입술을 댄 채 시선을 들어 정언을 응시했다.
“그만 들었다 놨다 하세요. 장난으로 던진 돌에 맞아 죽는 개구리 생각도 해 주셔야죠.”
목소리에 남은 웃음기와 달리 눈은 진지했다. 병실 안의 느슨했던 공기가 한순간 확 당겨졌다. 그 묘한 긴장감에 정언은 순간 숨을 멈췄다. 물끄러미 정언을 마주 보던 윤이 씩 웃었다. 이럴 때면 매번 속을 들여다보이는 기분이었다. 정언은 눈썹을 좁혔다.
“지금 김 피디 얼굴 되게 마음에 안 드는데.”
그 말을 들은 윤이 잡고 있던 정언의 손을 놓아주고는 자기 뺨을 만지며 심각한 표정을 했다.
“어, 속으로만 생각했는데 얼굴에 보였나? 너무 티 났어요?”
“무슨 생각?”
“공공장소에서 하기엔 약간 불건전한…….”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 정언은 윤의 다른 쪽 뺨을 아까보다 더 세게 쥐어 잡아당겼다. 윤이 아아, 하고 파닥대면서도 실실 웃는 통에 맥이 풀린 정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소리 하고 싶어서 여태까지 어떻게 참았어?”
“저 인내심 장난 아니죠?”
“원래 그런 스타일이야?”
“이런 남자 싫어하세요?”
말로 싸운다면 재희를 이길 자신도 있었지만, 윤에게는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정언은 말을 말자는 표정으로 손을 휘적거렸다. 자신이 이겼다는 걸 직감했는지 의기양양해진 윤이 의자를 당겨 조금 더 가까이 앉았다.
아까 열어 둔 창에서 바람이 스며들었다. 윤이 흐트러지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벽에 걸린 시계에 잠깐 눈을 준 정언은 가벼운 한숨을 섞어 윤에게 말했다.
“진짜 여기 안 있어도 되니까 들어가서 쉬어. 방송 준비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연차 써 놓고 여기서 뭐하는 거야.”
윤이 에이, 하며 대꾸했다.
“집에서 선배 괜찮은가 걱정하는 게 더 답답해요. 눈에 보여야 마음 편하죠.”
“계속 이러고 붙어 있을 거면 아예 들고 다니지, 왜.”
“그래도 돼요?”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윤이 눈을 반짝였다. 그러라고만 하면 정말 들고 다니기라도 할 기세였다. 어이가 없어 되긴 뭐가 돼, 하고 타박을 놓자 윤이 진심으로 실망한 표정을 했다.
“저 또 설잖아요. 허락해 주시면 진짜 들고 다니려고 그랬는데.”
“어디에 어떻게 들고 다니려고?”
“제가 있는 모든 곳에 소중하게 잘…….”
아무래도 또 뺨을 움켜잡힐 것 같았는지, 말하면서 윤이 몸을 슬슬 뒤로 뺐다. 눈 하나 깜짝 않고 그런 소리를 잘도 하는 그 얼굴에 이젠 화를 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실없는 소리 하는 거 보니까 인사위 걱정은 아예 안 되나 보네.”
“처음 불려갔을 때나 겁났지, 두 번째 되니까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혀를 차며 내뱉은 말에 윤이 웃으며 대답했다.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 하긴 그간의 일을 생각해 보면 재희와 자신을 능가할 정도로 간이 부었다고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애초에 아무리 친구 일이라도 이사진들 보라고 글을 올리는 그 대범함이 어디 갔을 리 없었다. 정언은 자기 배를 가리키며 심각하게 물었다.
“간 잘 있어? 배 밖으로 나온 거 아니고?”
“요새 누가 무겁게 간 넣고 다녀요. 집에 잘 두고 왔죠.”
마치 예상 질문지를 미리 뽑아 놓기라도 한 양 대답이 즉각 돌아왔다. 윤의 유들유들한 얼굴에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진짜 말이나 못하면.”
그러자 윤이 얼굴의 웃음기를 지우며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