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88
288화.
정언이 그 말에 잠깐 멈칫했다. 정언 역시 자신과의 관계를 남들에게 말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듯했다.
“뭐라고 했어?”
“그렇다고 했죠.”
여상하게 대답하자 정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웃는 것도 아니고, 난처해하는 것도 아닌 느낌이었다. 무슨 뜻일까. 불현듯 가슴이 약간 서늘해졌다. 정언은 쉽게 읽히지 않는 얼굴로 윤을 물끄러미 마주 보았다.
“그랬더니?”
“선배가 저 진짜 좋아하나 보다 그러시던데요.”
윤은 애써 그 서늘함을 외면하며 정언의 눈을 응시했다.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눈동자는 지하 주차장의 창백한 조명 아래서 더 깊게 보였다.
“내가?”
정언이 아주 낯선 말을 들은 사람처럼 되물었다.
“아니에요?”
장난스럽게 놀란 척을 했으나 정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언의 성격을 잘 알기에 평소였다면 굳이 물고 늘어질 일이 아니었지만, 어쩐지 조금 삐딱해진 윤은 공연히 정언을 재촉했다.
“어, 왜 대답 안 하세요?”
“무슨 대답.”
“이러실 거예요?”
자신이 원하는 말이 뭔지 빤히 알고 있을 정언이었다. 윤은 핸들 위에 엎드려 왼쪽 뺨을 묻고는 정언을 보았다.
“대답 안 하시면 저 계속 이러고 있을래요.”
정언의 입매가 슬몃 비틀어졌다. 어린애처럼 굴 생각은 없었지만 다소 투정을 부리고 싶은 기분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속내를 정언이 모를 리 없었다.
“꼭 말로 해야 되나?”
“행동으로 보여 주셔도 괜찮아요.”
선수를 치자 정언이 고개를 까딱여 앞창 너머로 보이는 주차장 표지판을 턱으로 가리켰다.
“여기 공공장소거든.”
“차 안은 사적인 공간이죠.”
“김 피디 차니까 김 피디한테 사적인 공간이겠지.”
“선배하고 전 사적인 관계잖아요.”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하는 윤에게 정언이 짐짓 엄한 표정을 했다.
“나 직장 선배야.”
“여긴 사무실 아니고요.”
유들유들하게 돌려준 말에 정언이 한숨을 섞어 웃었다. 정언의 인내심은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정언이 핸들 위에 엎드린 윤의 이마를 손끝으로 밀었다.
“김 피디님, 밤새 여기 있을 생각 아니면 안전벨트나 하시죠.”
아무래도 원하는 대답을 듣기는 틀린 것 같았다. 윤은 서글픈 얼굴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정언이 먼저 자기 쪽 안전벨트를 당기려는 듯 손을 뻗었다. 윤은 서둘러 정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잠깐만요, 제가 해 드릴게요.”
안전벨트 버클을 잡자 가까이서 희미한 눈의 냄새가 스쳤다. 지금처럼 정언과 가까이 있을 때면 늘 나는 향이었다. 익숙한 감각에 윤은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그 잠깐의 찰나, 정언이 갑자기 윤을 불렀다.
“김 피디.”
시선이 맞닿는 거리가 지나치게 짧다는 걸 자각한 건 직후였다. 본의는 아니었으나, 감각이 민감해지며 느슨했던 차 안의 공기가 당겨졌다. 낮은 숨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이렇게 가까운데도 정언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퍼뜩 셔츠 칼라 위의 목덜미가 서늘하게 긴장했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거 맞아.”
정언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얇은 입술의 움직임에 시선이 머물렀다. 때문에 그 말은 아주 조금의 딜레이를 두고 머릿속에 들어왔다. 조수석의 안전벨트 버클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정언이 손끝으로 윤의 이마를 한 번 더 밀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어지간하면 그런 질문 하지 마.”
자신의 팔과 시트 사이에 완전히 갇힌 채로도 정언은 그다지 의식하는 기색이 없었다. 서늘했던 목덜미로 열이 확 몰렸다. 진짜 좋아하는 거 맞아. 담백하기 그지없는 단어들이었으나 순식간에 심장이 부풀었다.
가슴 뛰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아 윤은 숨을 참았다. 짧은 정적이 지났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코앞에서 정언을 들여다보자, 정언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왜 그렇게 봐?”
윤은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사적인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사적인 행동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죠.”
정언이 웃는 소리를 냈다.
“언제까지 이러고 생각할 건데?”
“지금 생각 끝났어요.”
버클을 잡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그 손이 헤드레스트를 지나 정언의 뺨과 목덜미를 완전히 감쌌다. 몸을 조금 더 기울이자 입술이 쉽게 닿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달싹이는 정언의 입술을 이 끝으로 가볍게 누르듯 물자 단어 대신 얇은 숨이 순식간에 뒤섞였다.
세 번 깜빡인 속눈썹이 곧 내려앉았다. 푸르스름한 지하 주차장의 조명이 차 안으로 스몄다. 눈을 감자 눈꺼풀 위로 빛무리가 떠돌았다. 린넨 셔츠의 어깨 부근으로 정언의 손끝이 닿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윤의 어깨 위를 배회하다 등을 안았다.
스며드는 체온이 깊어졌다. 공기가 멈춘 듯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대답은 이걸로 충분했다.
회의실에 모여 앉은 팀원들은 텔레비전을 틀었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엄대진의 기자회견이 곧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수많은 기자들이 모여 있는 당사 강당에 엄대진이 나타난 건 중계가 시작되고 몇 분쯤 지나서였다.
엄대진은 검은 정장에 검은 넥타이 차림이었다. 수척해진 얼굴과 충혈된 눈은 평소의 엄대진처럼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런 외양조차 철저히 계산된 연출일 게 분명했다. 고개를 숙이며 단상 위로 올라간 엄대진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가 부들거리며 떨렸다.
『국민 여러분, 저는 지금 참담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정계에 뛰어든 이후 단 하루도 저 자신만을 위해 살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오로지 국민 여러분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있는 힘껏 달려왔습니다.』
첫마디가 떨어지기 무섭게 팀원들 사이에서 실소가 터졌다. 몰려 있는 취재진들 중 몇몇이 뭐라고 소리치는 것이 들렸으나, 엄대진은 그 말을 무시하고는 계속해서 발언을 이어 나갔다.
『지금 저를 둘러싼 수많은 의혹에 대해 이 자리에서 모두 해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의혹들 중 무엇도 사실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일 그 혐의 중 하나라도 사실로 밝혀진다면 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연인 엄대진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현진이 더 이상 못 참겠다는 얼굴로 코웃음을 치며 내뱉었다.
“하이고, 지랄도 풍작이지요? 자연인으로 왜 돌아가? 하나라도 사실이면 감방 가야지.”
“그러니까요. 뇌물, 횡령, 배임, 사기, 살인교사, 살인미수, 의약품관리법 위반, 또 뭐 있지? 아무튼 뭐라도 걸리면 바로 철창행이구만 자연인은 무슨.”
그 말에 맞장구를 친 호형이 팔짱을 끼었다. 어디 무슨 소리를 하는지 계속 들어 보자는 태도였다. 엄대진은 미리 준비한 듯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두어 번 찍었다. 혀를 내두른 석현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을 했다.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면서 우는 척하기엔 HD 화질이 너무 정직하지 않냐? 인간적으로 안약이라도 넣고 오는 성의는 있어야지.”
“여태 성의 없이 잘 해먹었는데 기자회견에 뭐 그런 성의까지 보이겠어.”
대꾸한 재희가 입가에 손가락 하나를 살짝 댔다. 감정을 추스르는 듯 잠시 말을 멈췄던 엄대진이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분, 저는 지금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은 대한민국을 이끌어 가기 위한 시험대 앞에 서 있습니다.』
그 말투는 다시 평소의 엄대진으로 돌아와 있었다. 마치 잘 짜인 연극 한 편을 보는 듯한 태세 전환이었다. 지금 이 기자회견을 위해서 초 단위로 시간을 재며 수십 번도 더 연습했을 게 분명했다. 엄대진이 힘을 주며 목소리를 높였다.
『대한민국이라는 침몰 직전의 배를 기꺼이 맡아 되살릴 선장이 과연 누구겠습니까? 바로 저 엄대진입니다. 국민 여러분, 이 최악의 정치 공작 앞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결국 진실은 밝혀집니다. 저는 현재 야당과 일부 종북 언론이 야합하여 제기하는 저에 대한 추문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카메라 너머로도 선명했다.
『의원님의 진실이 뭡니까!』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책상에 걸터앉아 있던 정언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로 알아차렸다. 임형원 기자였다. 형원의 외침을 필두로 여기저기서 진실을 말하세요, 변명하지 마십시오, 하는 고함 소리와 조용히 좀 하라고 윽박지르는 소리들이 뒤섞였다.
단상 앞에 서 있는 엄대진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찰나였으나 정언은 그 순간을 분명히 알아보았다. 소란스러워진 장내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엄대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의 정치 생명을 끊으려는 공작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저는 그때마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는 생각으로 묵묵히 견뎌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만은 침묵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마침내 국민 여러분을 위해 이 한 몸 바칠 준비가 된 지금, 누구도 저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드리려 합니다. 국민 여러분, 저는 이 레이스를 반드시 끝까지 완주하겠습니다.』
대선은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소리였다. 한국선진당 내부에서 결국 다른 대안이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엄대진은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했다.
『보수의 마지막 희망 저 엄대진이 여러분과 함께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말을 마친 엄대진이 바로 돌아서 자리를 떴다. 대변인이 급히 단상으로 올라와 마이크를 잡았다.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오늘 기자회견은 이상으로 마칩니다.』
현장의 기자들 사이에서 불만 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화면은 현장을 더 보여 주는 대신 즉시 오후 뉴스로 전환됐다. 모니터에 눈을 고정하고 있던 찬수가 기가 찬다는 투로 헛웃음을 뱉었다.
“야, 누가 쟤 보수의 마지막 희망 시켜 줬냐? 내가 진성 보수인데 그런 적이 없는데?”
“엄대진 말 못 들었어요? 우리 보고 종북이라잖아요. 선배 종북 언론 핵심 멤버예요. 아주 진성 좌빨이라고, 진성 좌빨. 진성 보수는 무슨. 아직도 자기 정체성을 그렇게 모르나?”
재희가 찬수에게 면박을 주었다. 왁 터지는 웃음에 찬수가 짐짓 정색을 했다.
“진성 좌빨이라니 말이 심하네. 우리 아버지 들으시면 나 다리몽둥이 분지르려고 쫓아오셔, 인마. 아직도 거실에 박정희 사진 붙여 두시는 분인데.”
“그런 분이 자식이 피디인 걸 여태 가만히 뒀습니까? 그 다리 몇 번은 분지르고도 남았겠네.”
재희가 농담처럼 받아치자 찬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아버지 전화 오면 안 받잖아.”
“무자식이 상팔자네요.”
“사돈 남 말 한다.”
“나 무자식이라 선배랑 사돈 못 됩니다.”
재희는 손가락질을 하는 찬수의 말을 여상하게 넘겼다. 저 새끼는 한마디를 안 져, 하고 구시렁거리는 찬수를 보며 낄낄대던 호형이 곧 심각하게 물었다.
“근데 당장 내일부터 우리 어디 가서 손가락 빨죠?”
“내가 아까 그냥 놀게 안 한다고 말했잖아. 팀장 말을 아주 귓등으로 들어?”
재희가 의자에 느슨하게 기대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정언이 재희가 앉아 있는 의자를 툭 차며 내뱉었다.
“무슨 플랜이 있으면 빨리 얘기를 해요, 그러니까.”
“하여튼 성질 급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