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89
289화.
투덜댄 재희가 씩 웃었다.
“일단 재심 청구하고 법정 간대도 최소한 몇 달은 걸려. 전 부장님하고 내가 좀 생각을 해 봤거든. 우리 쪽하고 KTBC, IBS에서도 지금 해직이나 정직 처리된 직원들이 꽤 있잖아.”
다른 방송사 얘기까지 나오는 걸 보니 뭔가 생각한 게 있긴 한 모양이었다. 재희가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자세를 바로 고쳐 앉았다.
“서대문 쪽에 한 50평쯤 되는 공간이 있어. 지하인데 지금 비어 있고, 원래 렌탈 스튜디오 운영하다 나간 지 반년쯤 됐대. 동영상 강의 같은 거 촬영 많이 했다고 하더라고. 일단 기본적인 시설은 갖춰진 자리야. 건물주가 아는 사람인데, 설비 권리금하고 임대료는 저렴하게 주겠다고 얘기가 나왔어.”
재희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던 호형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임대료 얘기가 왜 나와요? 지하에서 뭐 물장사라도 하게요?”
“내가 설마 안 피디한테 그러겠어? 물장사하려면 이거 중요한 거 알지?”
재희가 자기 얼굴을 가리키며 농담인지 진담인지 분간이 안 가는 투로 진지하게 되물었다. 몇 초 정도 그 말을 곱씹던 호형이 곧 분을 터트렸다.
“와, 더러워서라도 내가 이 생에 쌓은 덕으로 내세에는 잘생기게 태어나고 만다.”
그 꼴을 보던 정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끊었다.
“둘이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본론부터 얘기해요. 벌써 피곤해지려고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호형을 조금 더 놀려 볼까 싶어 눈을 반짝이던 재희가 그 말에 퍼뜩 정신이 돌아온 듯 손뼉을 딱 쳤다.
“아, 고마워. 바로 삼천포 갈 뻔했네. 아무튼 그래서 우리끼리 모여서 방송국 차려 보면 어떨까, 그 얘기 한 거지.”
뜻밖의 말에 철진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방송국? 지금 방송국이라고 그랬어요?”
놀라는 팀원들의 얼굴에 재희가 아, 하며 손을 휘적거렸다.
“거창한 건 아니고, 유튜브에서 탐사보도 전문 채널 하나 개설해서 좀 놀아 보면 어떨까 그거야. 지금 해직이나 정직 처리된 사람들 공영방송 1군인데 집에서 노는 건 인력 낭비 아냐. 이미 이쪽에서 인지도 있는 팟캐스트 진행자들이나 유튜버들이 좀 있는데, 그 사람들하고 연계해서 신선한 콘텐츠 뽑아 볼까 하는 생각도 있고. 일단 우리도 훨씬 자유롭다고.”
이미 팟캐스트나 유튜브 쪽에서 정치 콘텐츠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이 거기 뛰어든다는 건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재희의 말처럼 인터넷 방송이라면 확실히 각종 검열이나 심의에서 자유로울 터였다. 공중파에서는 시도하기 어려운 것도 실험해 볼 만했다. 잠깐 생각하던 정언은 흥미롭다는 투로 물었다.
“재밌을 것 같은데. 수익 모델이 있어요?”
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KTBC 팀이 PPL 활용 엄청 잘 했었잖아. 거기 정환일 피디가 원래 광고회사 출신이거든. 우리 방송 터지고 나서 인사위 소환됐다는 얘기 듣고 연락 왔길래 며칠 전에 모여서 얘기했었어. KTBC 해직 멤버들이 오래 전부터 이런 거 기획하고 있었고, 광고 주겠다는 업체 몇 군데 컨택해서 긍정적으로 얘기 중이래. 광고 삽입하면서 제작비 일부 지원하는 형식도 가능하고, 방송 도중에 아예 상품 노출해 주는 것도 있고. 인터넷 방송이라 그런 쪽은 제약 없이 할 수 있으니까.”
이미 생각보다 논의가 상당히 진전돼 있는 듯했다. KTBC와 IBS에서 해직 사태가 벌어진 건 작년 말부터라, 그쪽에서 먼저 꽤 오랫동안 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팔짱을 낀 재희가 말을 이었다.
“거기서는 우리보고 숟가락만 얹어 달라 그거야. 론칭 준비는 거의 다 된 상태고, 콘텐츠 준비해서 오픈할 일만 남았다고.”
“지금 멤버가 누군데?”
“KTBC에서는 일단 여기 참여하는 게 팀 전원하고 신수현 아나운서. IBS는 진행하는 김영은 기자 포함해서 열 명 정도 된다고 들었어. 우리는 일단 전 부장님하고 원진솔, 이도하 기자는 무조건 하겠다고 했고, 김진우 앵커도 끼워 달라고 했대. 나도 하겠다고 얘기했고. 에서도 같이하고 싶다는 사람들 꽤 있나 봐.”
KTBC 도 탐사보도 프로그램으로는 빠지지 않는 팀이었다. 의 신수현 아나운서 역시 KTBC의 간판급 아나운서 중 하나였다. 게다가 IBS의 김영은 기자는 IBS 차기 보도국장으로 가장 유력하다고 할 정도의 베테랑 기자였다.
라인업을 들은 석현이 야, 하며 감탄했다.
“김진우에 신수현이면 종편에서 맨발로 달려와서 모셔 갈 라인업인데.”
“그렇지. 안 그래도 신수현 아나운서가 15분에서 20분 정도 라이브로 데일리 뉴스 진행도 할 예정인데, 김진우 앵커랑 같이하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가볍게 대답한 재희가 얼굴에서 곧 웃음기를 거뒀다.
“그런데 정환일 피디 쪽에서 비슷한 미디어를 많이 분석했는데 결과적으로 인지도가 생기고 수익성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시점까지 시간이 상당히 걸린대. 그래서 그쪽에서 바로 우리한테 숟가락 얹어 달라고 한 거야. 네임밸류가 필요하니까.”
“고정적이고 열성적인 시청층이 확보된 프로그램 백 가지고 시작하겠다?”
정언의 물음에 재희가 그렇지, 하고 수긍했다.
“우리가 얼굴 까고 방송해 왔잖아. 인터넷 방송은 공중파랑 달라서 일부러 팔로우하면서 업로드될 때마다 찾아서 보는 코어 시청층이 굉장히 중요한데, 우리가 지금 시사 프로그램 중에는 그게 제일 강하지.”
짧은 한숨을 뱉은 재희가 눈썹 부근을 문지르며 턱을 괴었다.
“문제는 이거야. 지금 그쪽하고 얘기가 된 건 , , 가 돌아가면서 한 주에 한 번씩 새 콘텐츠를 업로드하는 거거든. 하고 팀이 매일 뉴스 담당하면서 현장에서 나오는 5분 정도 짧은 영상 같이 올리고. 이렇게 하면 우리가 이번 방송 내보내면서 다 못 넣은 소스 활용해서 추가 취재 거의 없이 갈 수 있는 건 한 달 정도일 거야. 이 시점이 넘어가면 무조건 비용 발생 시작돼.”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늘 팀원들을 최우선으로 두는 재희에게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건 수익과 관련된 문제일 터였다. 재희가 진지해진 표정으로 팀원들을 둘러보았다.
“솔직히 당장 수익 창출 불가능에 가깝고, 수익이 난다 하더라도 실제로 배분되는 건 열정 페이 수준일 가능성이 높아. 우리가 지금 시청률 10퍼센트라고 가정했을 때 아주 러프하게 추산한다면 대한민국 인구 5백만이 우리 방송을 본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 그런데 유튜브 방송은 시사 프로 특수성 생각할 때 조회수 10만이라도 엄청나게 선방이라고. 엄대진 저렇게 나오는 거 보면 저쪽도 목숨 걸고 할 텐데, 우리가 아무리 특종 터트려도 공중파에서 공론화되는 것도 기대 못 해.”
단순히 재미있겠다는 생각으로 뛰어들지는 말라는 이야기였다. 정언은 코끝으로 웃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 하자는 거예요, 말자는 거예요? 뭐 이렇게 혀가 길어, 강재희답지 않게.”
재희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가 끌고 가진 않겠다는 거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독재할 수 있나. 생계 문제 있잖아. 작가들은 내가 종편이든 케이블이든 자리 나는 데 바로 먼저 꽂아 줄게. 이거 진행하는 동안 수익 배분 가능할 거라는 말 못 해. 거짓말하긴 싫으니까 애초에 확실하게 하자고.”
“어쨌든 난 해요.”
재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언이 대꾸하자, 윤이 곁에서 서둘러 손을 들었다.
“저도 합니다.”
윤에게 시선을 준 찬수가 있는 대로 눈을 흘기며 부러 면박을 주었다.
“아이, 이거 김 피디 눈치 없는 거 봐. 막내가 그러면 선배들 체면이 뭐가 되나? 선배들이 먼저 다 한다고 한 다음에 저도 선배님들 본받고 싶습니다, 이래야 면이 딱 서지. 막내가 선수를 치니까 이거 뭐 안 할 수가 없게 됐잖아.”
“그러니까 눈치게임 하지 말고 바로 손들었어야죠.”
정언은 윤을 대신 변호했다. 윤이야 당연히 자신이 한다니까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자기도 하겠다고 했을 게 뻔한 탓이었다. 두 사람 쪽을 슬쩍 본 재희가 찬수를 향해 혀를 찼다.
“자발적으로 해요, 자발적으로.”
찬수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나 아주 자발적이야. 와이프한테 당장 내일부터 아무 데나 출근하겠다고 맹세를 했다고. 집구석에 있는 거 꼴도 보기 싫으니까 공원이라도 가라는데 어떡해.”
아무래도 농담이 아닌 듯한 말투에 여기저기서 키득대는 소리가 터졌다. 예준이 에이, 하며 한마디를 보탰다.
“이런 독재면 그냥 합시다. 강 선배는 꼭 굳이 한 번씩 멋있어 보이고 싶을 때마다 우리 의견 묻는 척하더라. 다른 때는 독재 잘만 하면서.”
“그러니까. 맨날 지 맘대로 위에 가서 들이받아 놓고 우리는 죄도 없이 도매금으로 상종도 못 할 놈들 되고 말이야.”
찬수가 거들자 재희가 정색하며 되물었다.
“솔직히 다 같은 마음인 거 내가 혼자 뒤집어썼다는 생각은 안 하는 거야, 다들?”
“보통 사람은 생각만 하지 너처럼 행동으로 옮기질 않아, 이 새끼야.”
“이러니까 잘해 줘 봐야 소용이 없다니까.”
툴툴거리는 재희를 향해 코웃음을 친 현진이 됐어 됐어, 하며 손을 내저었다.
“누가 들으면 진짜 엄청 잘해 준 줄 알겠다. 야, 프로 옮길 거 같으면 그냥 내가 알아서 옮겨. 어디서 어린 자식이 어르신 걱정을 해?”
“내일모레 불혹인데 나 아직 새파란 연하남 취급해 주는 건 한 작가님밖에 없네, 역시.”
재희가 감동받은 표정을 하자 현진이 되도 않은 소리 한다는 얼굴로 재희의 옆구리를 쥐어박았다. 재희가 아야, 하며 옆구리를 문지르는 사이 현진이 말했다.
“어차피 나도 우리 문 닫으면 잠깐 쉬려고 했는데, 노느니 소일거리 한다 생각하고 하지, 뭐. 혜주나 희림이, 성옥이는 내가 다른 자리 소개해 줄 거니까 거기 가 있어. 안 그래도 우리 셔터 내렸다니까 작가들 좀 보내 달라는 데가 한두 군데가 아냐.”
“왜요, 저희도 같이하게 해 주세요.”
희림이 볼멘소리를 했으나 현진은 딱 잘라 거절했다.
“안 돼. KTBC 하는 거 보니까 지금 항소 중인데 백 퍼센트 상고까지 가게 생겼어. 지금 5개월째라고. 상고까지 가면 올해 다 지나, 이것들아. 우리도 마찬가지일 텐데 프리랜서가 반 년 쉬면 진짜 손가락 빨아야 되는 거 몰라? 얘가 돈 못 받는다고 얘기할 정도면 진짜 굶으면서 해야 돼. 젊은 애들 열정페이 받고 일하면 있던 열정도 없어져. 그 열정 아꼈다가 우리 방송 다시 시작하면 그때 와.”
“사람이 어려울 때 밑바닥 본다는데 어떻게 저희만 가라고 하세요?”
“장판 안 보려다가 구들장까지 들어내려고 그래?”
“지금 갈 만한 데면 다 하고 싶은 말 못 하고 참고 살아야 되는 데잖아요. 저 그런 데서 일하기 싫어요.”
희림의 항변에 현진이 혀를 차며 재희를 돌아보았다.
“이 새끼 때문에 애들 다 버렸어, 하여튼. 사람이 맨날 안 참고 어떻게 살아?”
재희는 그 말에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현진이 골치 아파 죽겠다는 표정으로 머리칼을 흩으며 희림에게 말했다.
“하여튼 생각 잘 해 봐. 생각 잘 하고 다시 얘기해.”
재희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현진을 거들었다.
“나 사비 털어서까지 월급 못 줘. 나 진짜 아무 말도 안 했다.”
“여기 누가 강 피디님한테 월급 달란 사람 있어요?”
새침하게 대꾸하는 혜주의 얼굴에 피식거리는 웃음이 터졌다. 정언은 손을 휘적대며 화제를 돌렸다.
“생각 잘 해 볼 수 있게 자세한 사항이나 알려 줘 봐요.”
재희가 앉아 있던 테이블에서 내려오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