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9
29화.
“아, 박 과장 물건 정리한 거예요. 제수씨가 찾으러 와야 하는데 그럴 형편이 아닌 거 같고, 우리 쪽에서 부쳐야 되는데 일이 바빠서…….”
“그러면 저희가 대신 이희경 씨한테 가져다드려도 될까요?”
단순한 생각으로 던진 말이었다. 어차피 희경과는 조만간 또 만나게 될 테니, 여기서 차일피일 미루는 것보다는 그게 빠를 것 같아서였다. 약간의 오지랖이 작동한 결과물이기도 했다.
“제수씨 만나 보셨어요?”
용민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자 정언이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이희경 씨한테 제보 받고 이 일에 대해 취재 중이라서요. 방송이 반드시 된다, 이런 건 아닙니다. 그냥 알아보러만 온 거예요.”
“예, 뭐 그러시면…… 어차피 저희도 여기서 저거 신경 쓰기가 좀 힘들거든요.”
윤은 박스를 직접 확인해 보려 자리를 옮겼다. 아무 사무실에나 굴러다니는 흔한 복사 용지 박스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꽤 지저분했다. 누가 걷어찬 건지 선명하게 찍힌 발자국이며 찢어진 흔적이 덕지덕지 붙은 테이프 너머로도 눈에 들어왔다. 윤은 박스를 이리저리 살폈다.
“오래 쓰신 건가 봐요?”
“아마 그럴 겁니다. 물건 되게 아껴 쓰는 친구라서요. 원래 개인용 캐비닛이 따로 있는데, 자기는 그게 편하다고 하더라고요. 박스 낡으면 새 박스 갖다 쓰고 그랬죠. 그거야 사무실에 널린 거니까. 뭐 문서 같은 것도 평소에 거기다 다 정리하고 했어요.”
“그럼 내용물은 대부분 문서인가요?”
윤의 물음에 용민이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아뇨. 아휴, 그러면 큰일 나죠. 문서는 박 과장 죽고 나서 본사에서 나와서 확인하고 다 정리했어요. 거기 있는 건 그냥 개인 물품들이고요.”
윤은 박스를 안아 들고 다시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정언이 용민에게 다시 물었다.
“회사에서는 과로하고 부적응 문제를 얘기했다던데, 직원들하고 사이가 나빴나요?”
용민은 그 말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그때 뒤에 앉아 있던 여직원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박 과장님 되게 성격 좋은 분이셨어요.”
“야, 미스 장!”
아마 안 듣는 척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화들짝 놀란 용민이 고함을 치자 정언은 잠깐만요, 하고 용민을 제지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성격이 좋았다고요?”
미스 장이라고 불린 여직원이 용민의 눈치를 보았다. 용민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긴 한숨을 쉬었다. 미스 장이 주저하다 말을 이었다.
“과장님, 죄송해요. 저기, 근데 박 과장님 일은 진짜…… 저희가 본사에 얘기를 못 했어요. 본사 직원들이 워낙 막 무섭게 그래 가지고.”
“손님들하고 얘기하는데 왜 끼어들어?”
용민이 다시 한 번 미스 장을 나무랐으나 정언이 계속 얘기해 보라는 손짓을 했다. 부루퉁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인 미스 장이 용민을 흘끔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박 과장님 얘기 들으러 오셨다니까 그러죠. 솔직히 본사에서 외부에 함부로 얘기하면 자른다고 그러긴 했어요. 근데 저는 계약직이라 어차피 상관없거든요.”
“어땠는지 얘기 좀 해 주시겠어요?”
정언이 묻자 미스 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 과장님처럼 저희한테도 잘해 주시고 현장에도 잘하고 그런 분이 없어요. 현장 나갈 때도 말도 되게, 왜 같은 말도 좋게 잘 하는 사람 있잖아요. 노가다 판이 워낙 좀 거칠고 그런데, 박 과장님은 말 예쁘게 잘 하셔서 아저씨들도 다 좋아하고 그랬어요. 사내 따돌림 뭐 그런 식으로 기사 나서 우리도 깜짝 놀랐다니까요.”
“내가 너 입조심 안 해서 뭔 일 날 줄 알았다.”
용민이 반쯤 포기한 투로 내뱉고는 곤란한 듯 눈꺼풀 위를 몇 번이나 문질렀다. 한참 뜸을 들이던 용민은 마른 입술을 축이며 입을 열었다.
“이거는 진짜, 피디님, 제가 얘기를 할게요. 하는데, 혹시나 이게 방송이 돼도 저하고 여기 직원들 누가 얘기했다 이거는 진짜로 비밀로 해 주셔야 돼요.”
“그건 제가 약속을 드릴게요.”
정언의 말에 용민이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내렸다.
“아, 이게 참…… 박규형 과장이 일이 많았던 건 맞아요. 건설 일이 원래 야근도 많고 접대도 많고, 그거는 아시죠? 본사에 인사 자료가, 그거를 방송국에서 열람을 하실 수 있을지는 제가 모르겠는데, 거기 보시면 아마 기록으로 다 있을 거예요. 인사고과가 좋고 직원 평가도 굉장히 좋은 친구였어요. 근데 이제 건설사 접대라는 게…… 여자분한테 뭐 어떻게 말씀드리기가 좀 그러네.”
용민이 주저했다. 건설사 접대에 술과 여자가 빠지는 법이 없기에, 정언에게 그런 이야기를 노골적으로 하기가 망설여지는 모양이었다. 정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대충은 알고 있어서요. 괜찮습니다.”
“예, 뭐 아신다니까. 그게 뭐 그렇게 깨끗하게 밥 대접하고 술 한 잔 사고, 그런 건 아니잖아요. 제가 그런 말 할 처지는 못 되는데, 아무튼. 그 친구가 승진이 두 번 밀렸는데 그게 접대를 못해서 그랬단 말이에요. 일을 아무리 잘해도 접대를 못하면 무능한 직원, 위에서는 그렇게 생각을 하잖아요. 제수씨 만나 보셨다니 아시겠지만 박 과장이 진짜 엄청 애처가예요. 내가 살다 살다 지 마누라, 자식 그렇게 끔찍이 위하는 사람 못 봤어요.”
용민의 말이 조금씩 빨라졌다. 윤은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희경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없는 누군가를 추억할 때, 사람들이 더듬는 기억 속에서 흐릿한 그림자가 실체를 갖추기 시작하는 그 순간의 감각은 어떤 단어로 설명하기 힘든 것이었다. 용민이 헛웃음을 뱉고는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애들도 크고 그래서 그랬겠지. 생전 그런 말 안 하던 사람인데, 두 번째 떨어지고 나서 다음번 승진에서는 안 밀렸으면 좋겠다 그 소리를 했어요. 사람들도 회사에서 진짜 어지간하면 세 번째는 해 주겠지 그랬고. 애들한테 무슨 일 있는 날은 딱 칼퇴, 그거 말고는 업무가 상당히 좀 많았죠. 출장도 잦았고 매일 혼자서 열두 시, 한 시까지 일하는 날도 많았고. 안 힘드냐 하니까 야근하면서 사이사이에 블로그도 쓰고 한대요. 애들 사진 보면 안 힘들다고.”
윤은 순간 메모를 하던 정언의 손이 종이 위에서 멈춘 것을 보았다. 이 끝으로 입술 안쪽을 잘근거리던 정언이 네, 하고 다시 노트로 시선을 옮겼다. 용민은 정언의 태도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듯 짧은 한숨을 쉬고는 눈가를 비볐다.
“아무튼 뭐 사내 왕따, 그런 거는 사실 말이 안 돼요. 그럴 사람은 진짜 아니거든요.”
“승진 누락 때문에 많이 속상해하거나 한 적은 없었고요?”
“아이, 피디님도 직장 다니시잖아요. 그게 어떻게 속이 안 상합니까. 고과가 나쁜 것도 아니고, 뭐 이유가 없는데요. 그래도 그걸 막 밖으로 티를 내고 그런 사람은 아니었어요. 근데 왜 자살을 했는가, 그거는 솔직히 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 속을 누가 알겠어요. 겉으로는 웃고 다녀도 속은 썩어 문드러질 수도 있고 그런 거지.”
용민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 자신도 확신이 없는 것이다. 윤은 그 사실을 쉽게 알아차렸다. 어느 날 갑자기, 한밤중에 건설 중인 현장에 올라가 뛰어내린 동료. 이 사무실 안의 사람들은, 최소한 용민과 미스 장은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 불현듯 자살을 결심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전조도 느끼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섰다. 목에 걸친 수건으로 안전모 아래 이마를 닦으며 들어선 중년의 남자가 뜻밖의 손님들에 발을 멈췄다.
“웬 손님이 이렇게 있어요?”
그의 물음에 용민이 눈에 띄게 긴장하더니 어물거렸다.
“방송국에서, 저기, 박 과장 일 때문에 오셨다는데…… 피디님, 여기는 조창식 계장님이라고, 현장 관리하시는 분이에요.”
“방송국?”
창식의 표정이 굳어졌다. 조창식 계장, 하고 입 안으로 뇌어 본 윤의 뇌리에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희경을 인터뷰하러 갔을 때, 남편이 죽었다고 가장 먼저 연락한 사람이 조 계장이었다고 했다. 윤은 창식에게 물었다.
“박 과장님 돌아가셨을 때 이희경 씨한테 제일 먼저 연락하신 분이 조창식 계장님 맞습니까?”
“아니, 그 건에 대해서 나는 말하고 싶지가 않아요. 현 과장, 이거 사전에 뭐 연락이 있었습니까? 방송국에서 이렇게 나와서 이 얘기 물어보고 이러는 거 본사에서 알아요?”
불쾌한 티를 역력하게 내는 창식의 얼굴에 윤이 당황하자, 곁에서 정언이 윤의 소매 끝을 슬쩍 당기며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촬영은 아니고요, 그냥 몇 가지 여쭤보고 싶어서 온 겁니다. 명함 드릴 테니까 혹시 뭐 생각나는 거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언이 윤의 손에 명함 두 장을 쥐여 주고는 여직원들 쪽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윤은 얼른 여직원들에게 명함을 한 장씩 주었다. 미스 장이 명함을 보더니 눈을 들어 윤에게 시선을 주었다.
“여자 피디님 명함이죠? 피디님 명함은 없어요?”
곁의 여직원이 얘가, 하며 옆구리를 찌르자 미스 장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윤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이 팀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명함을 못 찍었거든요. 얘기하실 거 있으시면 이쪽으로 연락 주시고요, 그때 명함 나오면 드릴게요.”
“그러면 생각 좀 해보고요.”
미스 장이 새침하게 농을 쳤다. 윤이 웃자 정언이 이쪽을 한 번 흘끔 보더니 용민과 창식에게도 명함을 건넸다. 창식이 명함을 받지 않으려 하자 정언은 억지로 그의 손에 명함을 쥐여 주었다.
“돌아가신 분이 혹시 억울한 게 있으시면 그거 저희가 밝혀 드리고 싶어서 그런 거고요,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미리 연락 못 드리고 와서 불쾌하신 것 이해합니다. 죄송합니다.”
깍듯한 정언의 태도에 창식이 마지못해 약간 누그러진 태도로 대꾸했다.
“아니, 진짜로 우리는 뭐 아는 게 없어요. 나도 그날 아침에 현장 나왔다가 보고 너무 놀라서 119 연락하고, 박 과장 집에 연락한 게 다예요. 본사에서 알면 큰일 나니까 빨리 가세요.”
“알겠습니다. 김 피디, 가자.”
정언은 두말 않고 윤에게 나가자는 눈짓을 했다. 박스를 든 윤은 후다닥 정언의 뒤를 따라 사무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