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94
294화
재희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QBC도 공중파였으나 민영 채널이라, 상대적으로 공영방송보다 윗선의 압력에서 자유로운 편이었다. QBC의 간판 시사 프로그램인 는 사내에서 소위 ‘언터처블’로 불린다고 할 정도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민영 방송국이다 보니 시장 경제 논리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정부에서 QBC를 타깃으로 삼고 대기업을 압박해 광고를 떨어뜨릴 수도 있었기에, 언론 탄압 이후로 상당히 몸을 사리는 분위기가 된 것도 사실이었다. 그 물음에 호형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장 선에서 오케이 났대요. 아무래도 정권 바뀔 느낌이라 미리 줄 서려는 거 아니겠어요?”
“줄을 서겠다?”
호형의 말을 되풀이하며 잠깐 생각하던 재희가 눈썹을 찌푸리며 호형에게 스케줄 보드를 가리켜 보였다.
“안 피디, 그거 일단 저기 좀 적어 줘. 내일 회의에서 얘기하자고. 회의에서 할 얘기 엄청 많네. 이거 남들 인터뷰 응하다 시간 다 가겠어. 서 피디, 다음 주 아이템 스케줄 맞출 수 있겠어? 한선당 사찰 건이지? 우리 케이스까지 전부 묶어서?”
호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보드에 QBC 이야기를 적는 사이 정언이 대답했다.
“네. 민권당 쪽에서도 만나자고 하더라고요. 사찰 건 소스 주겠다고.”
“민 의원님은 대선 때까지는 그 일 관련해서 직접 인터뷰 안 하겠다고 하시고?”
“그런 것 같던데요. 당 차원 대응만 있고 본인은 일단 원칙대로 하고 싶다 그거죠. 안 그래도 한선당 쪽에서 계속 정치 공작이라고 발광하니까 빌미 주기 싫은 것도 있을 거고. 굳이 본인이 네거티브 이용하지 않아도 보도가 계속 나가니까.”
“알았어. 그쪽은 서 피디가 팔로우 좀 해 주고, 안 피디, 서온건설 소송 건 다녀온 건? 한교신도시 단지 1,200세대 집단 소송 시작한 거지?”
들고 있던 마카펜을 내려놓은 호형이 재희를 돌아보았다.
“상생변 출신 로펌 투게더로에서 여기 담당한대서 거기 변호사들 내일 만날 거예요. 이번 주말에 한선당 경기도당사 앞에서 서온건설 시공 임대주택 주민들이 촛불집회 시작한다고 하더라고요.”
호형의 말을 들으며 다이어리에 부지런히 메모를 하던 재희가 펜 끝으로 책상을 톡톡 치다 입을 열었다.
“다음 주 목요일에는 서온건설 피해자 모임 집회 있다고 그랬나? 이거 팀에서 나간다고 하니까, 안 피디도 같이 가. 이번 주 토요일에 광화문 시민 집회 있는 것도 좀 챙기고. 이건 우리 팀 다 나갈 거야. 주말에 미안한데 다들 신경 좀 씁시다. 아, 그리고 우 피디, 편집 아르바이트 하나 붙이자고 하는데 공고 좀 올려 줄래? 면접은 우 피디가 직접 보고.”
“저희 인력 충원할 수 있는 상황이에요?”
편집 프로그램을 만지고 있던 지혁이 깜짝 놀라며 묻자, 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라우드 펀딩 들어간 거 추이가 괜찮다던데. 뷰수가 잘 나와서 광고 추가로 협의 중인 것도 있다고 그러고. 회사 다닐 때 생각하면 절대 안 되지만 기대보다는 잘 나오는 것 같아. 일단 우리가 수익 때문에 퀄리티 타협하지는 말자고 했으니까.”
지혁의 표정이 한층 더 밝아졌다. 세상을 다 가진 얼굴을 하는 지혁을 본 재희가 코끝으로 웃는 소리를 냈다. 손을 깍지 끼어 뒷머리를 받친 재희가 의자에 등을 깊숙하게 묻으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어우, 일단 숨 좀 돌립시다. 커피 좀 마시고 하자. 카페인 떨어져서 정신이 하나도 없어.”
“내가 갔다 올게요. 커피 드실 분 메뉴 보내요.”
그 말을 들은 정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핸드폰을 흔들어 보였다. 윤이 서둘러 정언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같이 가요, 선배.”
입구를 나서자 아직 더운 기색이 남은 오후의 공기가 지하 계단 아래까지 스몄다. 두어 걸음 앞질러 가는 정언의 곁에 나란히 서자, 정언이 손을 올려 햇빛을 가리며 윤을 보았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다, 진짜. 더뉴원랩 건은 어떻게 됐어?”
“아직 엠바고 걸려 있는데 더뉴원랩 오정구 대표가 검찰 조사에서 엄대진하고 커넥션 있었던 거 자백했다는데요. 신약 허가 관련해서 특혜 받은 증거 제출했다고 오전에 원진솔 기자님이 검찰 출입기자 통해서 들었대요.”
검찰은 부작용이 심각하다는 걸 알면서도 엄대진이 신약을 유출해 변순철에게 복용하게 한 데는 명백한 살인 의도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 이야기를 전해 준 진솔은 더뉴원랩 대표가 결국 커넥션에 대해 자백하는 바람에 엄대진이 혐의를 피하기 어려울 거라고 보고 있었다. 자백 이야기를 들은 정언은 놀란 듯 약간 눈을 치켜떴다.
“그래? 변은화랑 변정화 소송 진행은 잘 되고 있나?”
“변정화 쪽 변호사들이 줄줄이 사임하고 있어서 그쪽이 좀 어려운 것 같더라고요. 에서 신환석 라인 터트려 버리겠다고 협박중이라 신환석계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면서요. 지금 여론이 최악이라 그것까지 터지면 청와대 다 뒤집힌다고, VIP 선에서 엄대진 버리라고 가이드라인 나온 것 같대요.”
“VIP가 엮인 게 많아서 엄대진 버리면 엄대진도 이판사판일 텐데.”
정언이 흠, 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윤은 그 말에 웃었다.
“전 부장님한테 여쭤보니까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된다고 하시던데요.”
“떡 너무 거하게 먹는 거 아닌가 벌써 설레네.”
재미있다는 투로 대꾸한 정언이 근처 단골 카페로 들어섰다. 정언은 핸드폰으로 그새 들어온 메시지를 보며 카운터에 주문을 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란데 사이즈 더블 샷으로 일곱, 아이스 카페라떼 톨로 둘, 바닐라라떼 톨 둘, 페퍼민트 티도 하나 주세요. 아, 아이스 아메리카노 벤티 트리플 샷 하나 추가해 주시고. 김 피디는 아이스 카페모카 마실 거지? 아이스 카페모카도 하나 주시고요. 휘핑 많이 올려서.”
숨도 쉬지 않고 말한 정언은 진동 벨을 받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인간들은 뭘 이렇게 다양하게 시켰어, 도대체.”
맞은편에 앉은 윤은 투덜거리는 정언을 가만히 보았다. 한여름에도 핏기 없는 얼굴은 여전했다. 반쯤 걷어 올린 린넨 셔츠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이 새삼 가늘었다. 하드한 스케줄 때문인지, 하루가 다르게 실시간으로 말라 가는 게 눈에 보였다.
“선배 요새 너무 마르는 거 아니에요?”
윤이 걱정스럽게 묻자 눈을 감은 채 소파에 등을 묻고 있던 정언이 내뱉었다.
“본인이나 잘 챙겨. 엊그제 에서 왔다가 우리 팀에 모델 있냐고, 그 키 크고 엄청 마른 남자 누구냐고 물어봤다는 거 못 들었어?”
엄청 마른, 을 유독 강조하는 통에 윤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프론트라인에 들어온 후로 살이 좀 빠진 건 사실이었다. 때보다 훨씬 바빠진 탓이었다.
“모델 되려면 아직 더 빼야 될 것 같은데요.”
심각하게 대답하자 눈을 뜬 정언이 정색했다.
“지금도 충분히 말랐으니까 실없는 소리 하지 마.”
그 성격에 남의 체중에 이렇게까지 심각한 게 낯설었다. 윤은 나오려는 웃음을 눌러 참으며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에이, 보셔서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뼈밖에 없는 건 선배고요. 제가 저번 주에도 집에서…….”
집에서, 까지만 말했는데도 정언이 바로 자세를 고쳐 앉으며 미간을 좁혔다.
“그건 오픈된 공간에서 하기에는 아주 부적절한 발언 같은데.”
다음 말이 뭔지 이미 뻔히 알고 하는 소리였다. 윤은 의뭉스럽게 웃으며 되물었다.
“이따 밀폐된 공간에서 할까요?”
정언이 대답 대신 손가락을 까딱여 가까이 오라는 제스처를 했다. 윤이 앞으로 몸을 내밀자 정언이 바로 윤의 한쪽 볼을 쥐어 잡아당겼다. 허튼소리 하지 말라는 무언의 협박이었다. 진심이 담긴 손길에 윤은 아 선배, 하고 투정을 부렸으나 먹힐 리 만무했다.
짐짓 부루퉁한 표정으로 잡혔던 뺨을 문지른 윤은 시계를 보았다. 이미 점심시간은 한참 지난 오후였다. 정언과 예준이 5시에 인터뷰가 있다고 했으니, 재수 없으면 저녁시간도 넘길 것 같았다. 윤은 고개를 들어 정언을 마주 보았다.
“점심 안 드셨죠?”
“아, 잊어버렸어.”
정언이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취재 다닐 때 보통 대충 먹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눈에 보일 정도로 말라 가니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윤은 카운터 옆의 샌드위치 쇼케이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뭐 좀 드실래요?”
“아냐, 생각 없어. 나중에 배고프면 그때 먹을게.”
정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윤은 얼굴을 찌푸리며 정언을 나무랐다.
“그러니까 안 그래도 없는 살이 더 빠지죠. 한 손으로도 들겠어요.”
윤의 말에 실없이 웃는 소리를 낸 정언이 기지개를 켜고는 작게 하품을 했다. 이번 주 내내 거의 사무실에 들어와 있지 못할 정도로 바빴었다. 정언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렇게 부담 없이 들고 갈 수 있을 것 같으면 이따 밤에 나 좀 갖다 놓고 가든가. 오늘은 진짜 집에 갈 기운도 없을 것 같아.”
“저희 집에 갖다 놔도 돼요?”
반쯤 진심인 소리를 농담처럼 하자 정언이 픽 웃었다.
“갖다 놓고 뭐하려고.”
“오픈된 공간에서 대답하기엔 좀 부적절한 행동이요.”
양쪽 볼을 다 잡힐 발언이라, 윤은 미리 몸을 뒤로 빼며 대답했다. 정언이 윤을 아래위로 훑어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더 상대해 줄 기력도 없다는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곤란하겠는데. 나 일 년 치 체력 지금 다 당겨쓰고 있으니까.”
그게 빈말이 아니라는 건 윤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팀원들도 입을 모아 인정할 정도로 체력 좋은 정언이었으나, 연초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쉰 적도 없이 달려온 상황이었다.
회복하는 속도보다 소진되는 속도가 훨씬 빠른 탓에, 간만에 쉬는 주말이면 죽은 듯이 잠드는 게 일이었다. 그것도 요즘 같은 상황에는 주말까지 스케줄이 거의 꽉 찬 터라 불가능했다. 속으로 한숨을 뱉은 윤은 정언을 마주 보았다.
“주말에 저희 집 놀러 오세요. 맛있는 거 해 드릴게요.”
뭐라도 해서 먹여야 할 것 같아서였다. 정언이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아까 선배 얘기 들었잖아. 토요일에 집회 취재 나간다고.”
“취재 끝나고 오시면 되잖아요. 일요일도 주말인데.”
“자고 가라고?”
일부러 돌려 말했으나,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정확히 눈치챈 정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윤은 대답 대신 재차 물었다.
“오실 거죠?”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진동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정언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손가락 사이로 새까만 머리칼이 스몄다가 흩어졌다. 그게 표정을 감추고 싶을 때의 버릇이라는 걸 윤은 잘 알고 있었다.
“생각해 보고.”
잠시 사이를 두고 정언이 짧게 대답했다. 씩 웃은 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말의 메뉴를 뭘로 할지 벌써부터 머릿속이 분주해졌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