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95
295화
광화문 앞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손에는 저마다 ‘서온건설 폐업하라, 한선당은 해산하라’, ‘엄대진은 사퇴하라, 청와대는 사죄하라’ 같은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며 초, 야광 스틱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데모라기보다는 축제에 가까운 분위기로 진행되던 집회가 끝을 알린 지 이십 분쯤 지났지만, 아직 광화문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는 중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캠코더를 가방에 넣은 재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처에서 촬영을 하던 정언도 집으로 돌아가는 집회 참가자들의 모습을 마저 찍고는 카메라의 전원을 껐다. 몇 시간째 집회 풍경을 찍고, 시민들과 인터뷰를 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찬수와 함께 가까이 다가온 재희가 정언에게 물었다.
“오늘 사람 장난 아니다. 지금 경찰 추산 인원 나왔어?”
“지난주보다 훨씬 늘어난 것 같아요. 분위기 이런데 엄대진이 대선 완주할 수 있을까?”
정언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묻자 재희가 글쎄, 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여기까지 왔으면 엄대진도 더 물러날 데 없지. 지금 그만두면 혐의 전부 인정하는 건데. 정권 바뀌는 순간 감방행이야.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보려고 하지 않겠어? 신환석계가 그동안 하도 깽판을 쳐 놔서 검찰에서도 내분이 장난 아니라던데.”
정언은 재희의 말을 들으며 핸드폰으로 실시간 기사를 검색했다. ‘안전한 세상 만들기 광화문 범국민 집회 50만 모여’라는 제목의 기사가 모바일 메인에 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정언은 재희에게 기사 내용을 보여 주었다.
“오늘 경찰 추산 50만인 것 같은데요.”
“실제로는 더 되겠는데, 그럼. 집회 시작하고 매주 기록 경신이네. 대선 때 되면 백만 명 나올 수도 있겠다.”
재희가 정언이 내민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때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지, 꺼진 초를 들고 있던 두 여학생이 가까이 다가왔다. 대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학생들의 손에는 근처 커피 전문점의 테이크아웃 캐리어가 들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
한 여학생이 눈치를 보다 쭈뼛거리며 말을 걸었다. 핸드폰에 눈을 두고 있던 재희가 퍼뜩 놀라 그쪽을 돌아보았다.
“아, 네.”
재희를 보자마자 두 사람은 맞아, 맞아, 하며 자기들끼리 소곤거렸다. 처음 말을 걸었던 여학생이 순식간에 새빨개진 얼굴로 물었다.
“저기, 맞으시죠? 강재희 피디님 맞죠?”
정언과 찬수는 재빨리 한 발 떨어져 그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멈칫한 재희가 네, 하고 대답하기 무섭게 여학생들이 손에 들고 있던 캐리어를 내밀었다. 안에는 커피 네 잔이 들어 있었다.
“이거 드세요.”
“저 주시는 건가요?”
재희가 당황한 얼굴로 되묻자 여학생들이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얼결에 캐리어를 받아 든 재희가 정언과 찬수에게 어떻게 좀 해 달라는 눈빛을 보냈으나 두 사람은 모른 척 재희를 외면했다. 당황하는 강재희라니, 돈 주고도 못 할 구경을 포기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사이 여학생들이 재희의 팔을 덥석 잡으며 눈을 빛냈다.
“저기, 사진 한 장만 찍어 주시면 안 돼요?”
“저요?”
“네, 네! 저희 엄청 팬이라서요. 진짜 열심히 보고 있어요! 강재희 피디님 완전 좋아하거든요!”
농담으로 자신의 인기를 어필하는 게 취미인 재희였으나, 막상 광화문 한복판에서 이런 상황을 맞이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물론 이전에도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피디 아니냐며 알아보는 일은 심심찮게 있었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얼결에 양쪽에서 여학생들에게 붙들린 재희는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다 곧 비즈니스 모드로 들어갔다. 조금 전의 놀란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산뜻하게 웃으며 셀프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주는 재희를 지켜보던 찬수가 하여튼 난놈이야, 하고 혀를 내둘렀다.
사진을 몇 장이나 찍고 나서야 재희를 놓아준 여학생들은 미리 준비한 듯 가방에서 매직펜을 꺼내 핸드폰 뒷면을 가리켰다.
“여기, 여기 사인도요.”
여기서 재희를 만날 걸 알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왔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재희가 순순히 펜을 받아 들어 핸드폰 뒷면에 사인을 하고 돌려주자, 두 여학생이 발을 동동거렸다.
“실물이 훨씬 잘생겼어요!”
누가 보면 연예인 팬미팅인 줄 알 게 분명했다. 재희가 웃는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저희 방송 소문 많이 내 주세요.”
찬수가 질색하는 표정으로 정언에게 속삭였다.
“저 새끼 저럴 때 쓸데없이 목소리도 좋지 않냐?”
“선배가 얼굴도 좀 쓸데없이 괜찮긴 하죠.”
정언이 심각하게 대답하자 찬수가 구시렁거렸다.
“그러니까, 나쁜 새끼. 피디가 얼굴 잘생기고 목소리 좋아서 뭐할 거야.”
“뭐하긴요. 저기서 저런 거 하지.”
두 사람이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거나 말거나 팬미팅 현장은 다른 세계였다. 재희의 말에 여학생들이 목이 떨어져라 고개를 끄덕였다.
“해시태그 엄청 걸어서 올릴 거예요. 진짜 재밌다고, 저희 친구들한테도 이거 꼭 보라고 영업 되게 많이 하거든요. 학교 커뮤니티에도 올릴게요! 다시 하시는 거죠?”
“그럼요, 방송국 정상화되면 저희도 돌아가죠.”
씩 웃은 재희가 캐리어를 들어 보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커피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여학생들은 힘내세요, 하고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숨을 돌린 재희가 커피 한 잔을 정언에게 먼저 건넸다. 커피를 받아 든 정언은 웃겨 죽겠다는 표정으로 재희를 훑어보았다.
“아주 아이돌이네, 아이돌이야. 기획사 하나 알아보지 그래요?”
“십 년만 젊었어도 그러는 건데 아쉽네.”
재희가 짐짓 안타깝다는 투로 대꾸했다. 재희가 내민 커피를 받자마자 뚜껑을 열어 쭉 들이켠 찬수가 면박을 주었다.
“십 년 젊어도 서른이 목전이다, 인마.”
“이거 왜 이래요, 나 유치원 때부터 날렸던 남자야. 십 년 전에도 꾸준했다고.”
“아이고, 오죽하시겠습니까요.”
“오죽하지 않은 거 방금 봤잖아요.”
그새 언제 당황했냐는 듯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재희가 주위를 둘러보다 턱짓으로 정언의 등 너머를 가리켰다.
“진짜 아이돌 저기 오네.”
정언과 찬수는 뒤를 돌아보았다. 윤이 인파를 헤치고 이리로 오는 중이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덕에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쉽게 눈에 띄었다. 본인은 전혀 모르는 듯했으나, 주변 사람들이 윤이 지나갈 때마다 저도 모르게 쳐다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세 사람이 자신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는 걸 가까이 와서야 알아차린 윤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집회 내내 돌아다닌 탓인지 상기된 뺨에 이마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으나, 그게 결코 그 얼굴에 마이너스가 되지는 못했다. 찬수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세상이 왜 이렇게 불공평하냐?”
“왜요?”
이유를 모르는 윤이 물었다. 정언은 대답 대신 웃음을 눌러 참으며 하나 남은 커피를 건넸다.
“아냐. 커피 마셔.”
목이 말랐는지 윤은 그 자리에서 바로 컵 절반을 비웠다. 한숨 돌린 윤이 정언을 마주 보았다.
“웬 커피예요?”
“선배 팬들이 주고 갔어. 오늘부터 선배 시사프로계의 아이돌로 부르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알아.”
정언이 재희를 보며 놀리는 투로 대꾸하자 윤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진짜요?”
태연한 척했어도 민망하긴 했는지, 재희가 그 말에 윤의 어깨를 툭 쳤다.
“뭐가 진짜야, 진짜는.”
헛기침을 한 재희가 서둘러 말을 돌렸다.
“ 팀에서 내일 영상 올린다니까 이따 그쪽 메일로 원본 가지고 있는 거 다 전송해 줘. 아까 한 작가님이 SNS에 올릴 만한 사진이나 영상 짧은 거 있냐고 찾던데, 폰으로 찍은 것도 괜찮으니까 현장 분위기 잘 나온 거 있으면 한 작가님한테 보내 주고. 토요일까지 고생 많았어.”
찬수가 시계를 보더니 재희에게 제안했다.
“야, 한잔하고 갈래? 다른 애들 아직 있잖아. 종로에 우리 자주 가는 거기 갈까?”
“좋죠.”
선뜻 대답한 재희가 정언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 피디는?”
아무 생각 없이 그럴까, 하고 대답하려던 정언은 등 뒤에서 셔츠 자락을 당기는 손길에 말을 멈췄다. 윤이 토요일 집회 취재 끝나고 집에 오라고 했던 것이 그제야 떠올랐다. 어색하게 웃은 정언은 고개를 저었다.
“피곤해서 안 될 것 같아요.”
“그래? 하긴 뭐 워낙 바빴어야지. 들어가서 내일은 푹 자. 요새 서 피디 얼굴이 말이 아냐, 아주.”
다행히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 혀를 차는 재희의 얼굴에 정언은 미간을 좁혔다.
“그 정도예요?”
“전 부장님이 서 피디 왜 날로 피골이 상접하냐고 나보고 뭐라고 하시더라. 너 애들 굶기냐고. 나 욕 먹이지 말고 잘 자고 잘 먹고 그러고 다녀.”
안 그래도 윤이 왜 그렇게 마르냐고 한마디 한 이후로 그게 내내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아직 버틸 만은 했으나, 남들이 보기에도 그런 소리를 할 정도라면 효명이 봤을 때는 오죽할까 싶어서였다. 촬영 전날 라면이라도 먹고 잘까, 하며 부질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재희가 윤에게 말했다.
“김 피디가 좀 데려다줘. 괜찮지?”
“아, 네.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윤에게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일 터였다. 기다렸다는 듯 덥석 대답하며 인사하는 윤을 본 재희가 빨리 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자고. 들어가.”
재희와 찬수가 인파 사이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윤이 정언의 팔을 잡고는 차를 세워 둔 인근 빌딩 쪽으로 향했다. 빌딩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정언은 윤의 차에 타며 툭 내뱉었다.
“아주 오늘만 기다렸지?”
윤이 시동을 걸며 되물었다.
“그러면 안 돼요?”
물론 그러면 안 될 이유는 없긴 했다. 정언이 입을 다물자 윤이 에어컨을 틀었다. 달력은 이미 가을로 접어든 뒤였지만 아직 더위가 기승이었다. 후덥지근하게 갇혀 있던 공기가 빠르게 서늘해졌다. 윤이 빌딩 주차장을 빠져나오며 투덜거렸다.
“프론트라인 들어오고 선배 얼굴 볼 시간 더 줄어든 것 같아요.”
“매일 보면서 뭘 더 보려고 그래. 24시간 붙어 있고 싶어?”
정언의 말에 윤이 심각하게 되물었다.
“진짜 집착하는 남자 만나 보실래요?”
자기 딴에는 진지한 것 같았으나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졌다. 정언이 웃기 시작하자 윤이 정색했다.
“농담 아니라니까요.”
겨우 웃음을 멈춘 정언은 숨을 고르며 창밖의 도로를 가리켰다.
“나 여기서 내려서 집에 가?”
협박할 생각은 아니었으나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바로 기세가 꺾인 윤이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턱을 괴며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가린 정언은 애써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들으라는 듯 한숨을 폭 쉰 윤이 말없이 자기 집으로 차를 몰았다. 왜 저렇게 쓸데없이 귀엽게 구는 걸까. 내내 생각해도 답이 없는 질문을 떠올리던 정언은 차에서 내렸다.
윤의 집 현관문을 열자 익숙한 섬유유연제 향이 밀려들었다. 소파 옆에 카메라와 여분의 옷이 든 가방을 내려놓자, 긴장이 풀렸는지 어깨가 뻐근했다. 무심결에 어깨를 주무르자 윤이 돌아보며 바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괜찮으세요? 계속 아파요?”
“무리하면 약간. 일단 움직이는 데는 지장 없으니까. 언제 치웠어? 시간 없었을 텐데.”
여상하게 대꾸한 정언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집 안은 머리카락 한 올 안 보일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였다. 바쁘기는 다들 마찬가지인데, 언제 시간과 기력이 남아 청소를 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에어컨을 튼 윤이 그 물음에 웃었다.
“오늘 나오기 전에요. 일단 뭐 드실래요?”
“아니. 시간 늦었는데 내일 먹지, 뭐. 물 한 잔만 줄래?”
윤이 냉장고에서 생수 병을 하나 꺼내 컵에 따라서는 정언의 앞에 내려놓았다. 정언은 물을 마시며 윤에게 턱으로 욕실 쪽을 가리켰다.
“먼저 씻어.”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