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96
296화
“선배 먼저 쓰세요. 저 괜찮은데.”
“나 숨 좀 돌리게.”
스툴에 걸터앉은 정언은 텔레비전을 틀었다. 윤이 네, 하고는 곧 자기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문 너머로 희미한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정언은 그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뉴스 채널에 눈이 잠시 머물렀으나 몸도 마음도 피곤했다. 클래식 공연 채널에 리모컨을 멈춘 정언은 테이블 위에 턱을 괴며 멍하니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었다. 에어컨 바람 때문에 접어 올린 셔츠 소매 아래의 팔로 얕게 한기가 돌았다.
서늘해진 팔을 문지르는 사이, 샤워를 마친 윤이 안에서 나왔다. 이미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였다. 윤은 거실에 가득한 클래식 음악이 이상했는지 정언을 돌아보았다.
“클래식 좋아하세요?”
“가끔 듣는 것만. 음악 잘 몰라. 그냥 듣기 좋아서.”
정언의 대답에 아직 젖은 머리에 대충 수건을 덮어쓴 윤이 맞은편에 앉으며 웃었다.
“분위기 좋은데요.”
“계속 좋아야 될 텐데 김 피디 분위기 맞춰 줄 수 있을지 걱정이네.”
농담을 던진 정언은 씻고 올게, 하며 몸을 일으켰다. 욕실로 들어서자 아직 습한 공기 속에 무겁게 남은 향의 입자들이 밀려들었다. 윤이 쓰는 바디용품과 클렌저 따위의 향이었다.
이럴 때면 갑자기 윤과의 사이가 실감나곤 했다. 타인의 가장 사적인 공간에서 경계를 넘어와 있다는 건 정언에게 낯선 일이었다. 샤워부스 안에서 물을 틀자, 위에서부터 쏟아지는 뜨거운 물에 머릿속이 씻겨 나갔다.
서둘러 샤워를 마친 정언은 옷을 갈아입고는 젖은 머리를 대강 말렸다. 욕실 문을 열자 아직 아까의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스툴에 앉아 테이블 위에 엎드린 윤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 몸을 숙이자, 그새 잠들었는지 얕은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김 피디, 괜찮아?”
가만히 묻자 윤이 퍼뜩 눈을 떴다. 잠든 것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눈가를 약간 찡그린 윤이 고개를 들며 곁에 서 있던 정언을 올려다보았다.
“남 걱정할 때가 아니네.”
혀를 차자 윤이 나른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긴장 풀려서 그런가 봐요. 이거 시작하고 거의 하루도 못 쉬었더니…….”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윤이 연이어 작게 하품을 했다. 하기야 자신도 이러다 죽겠다 싶을 정도인데 윤이라고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안쓰러운 마음에 정언은 윤의 팔을 잡았다.
“침대에서 자. 여기서 이러지 말고.”
그러자 윤이 몸을 일으키는 대신 정언의 허리를 안으며 품에 얼굴을 묻었다. 길게 내쉬는 숨이 얇은 티셔츠 안으로 스며들었다. 멈칫한 정언은 윤을 내려다보았다. 윤이 얼굴을 들지 않은 채 나지막하게 말했다.
“잠깐만 이러고 있을게요.”
정언은 자리를 찾지 못하고 허공에서 멈춰 있던 손을 윤의 등에 얹었다. 잠시 머뭇거리다 달래듯 등을 토닥거리자 윤이 한숨처럼 속삭였다.
“……미치는 줄 알았어요, 진짜.”
평소와 약간 달라진 말투였다. 그걸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허리를 안은 윤의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눈앞에 있는데 아무것도 못 하니까 완전 고문당하는 기분이에요.”
투정을 부린 윤이 고개를 들어 정언을 쳐다보았다. 정언은 손끝으로 아직 젖은 윤의 머리칼을 만지며 픽 웃었다.
“뭘 그렇게 하고 싶은 게 많은데?”
“선배가 상상하시는 거 전부 다요.”
정언은 대답 대신 윤의 이마를 툭 쳤다. 소리를 내어 웃고는 안고 있던 정언을 놓아준 윤이 몸을 일으켰다. 윤은 리모컨을 집어 들어 텔레비전을 껐다. 집 안이 순식간에 적막 속으로 가라앉았다. 희미하게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만이 그 정적을 채웠다.
손을 뻗어 거실 스위치를 내린 윤이 정언의 손을 잡았다. 침대 옆에 켜 둔 스탠드 덕에 아주 어둡지는 않았다. 정언을 끌어 침대에 눕힌 윤이 곁으로 들어오며 턱을 괴고 정언을 마주 보았다. 느슨하고 가벼운 공기가 사이로 떠돌았다.
정언은 윤의 눈가를 만져 보았다. 긴 속눈썹이 스치는 감각이 희미했다. 그 손끝을 잡아 내린 윤이 손톱과 마디 위에 가벼운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피부와 옅은 숨결이 섞인 감각에 불현듯 목덜미가 오싹했다. 에어컨 탓은 아니었다.
“피곤해 보여.”
정언이 나지막하게 말하자 윤이 씩 웃었다.
“조금요.”
“진짜 괜찮아?”
“지금이 제일 괜찮을걸요.”
연신 가느다란 손가락을 쥐고 장난치듯 입을 맞추던 윤의 입술이 손바닥 위로 닿았다. 곧 손목 안쪽으로 호흡이 먼저 미끄러지고 뒤이어 입술이 따라왔다. 핏줄이 그대로 비치는 창백한 손목 위로 입을 맞추던 윤이 눈만 들어 시선을 떼지 않는 정언을 응시했다.
“왜 그렇게 보세요?”
“그냥.”
짧은 대답에 윤의 눈매가 호를 그렸다. 손을 대는 순간 녹아 버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모두에게 친절한 윤이지만, 이런 얼굴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 얼굴에 잠시 눈을 사로잡힌 정언은 이마 위로 흘러내린 윤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아직 물기가 어린 머리칼이 손가락에 습하게 말렸다가 부드럽게 풀려나갔다.
“그렇게 안 웃었으면 좋겠는데.”
“왜요?”
“넘어갈 것 같아서.”
윤이 짐짓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도 안 넘어오셨다는 소리예요?”
순간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고개를 숙이자 윤의 이마가 닿았다. 손목으로 조금 전까지 닿아 있던 입술 대신 긴 손가락이 스며들었다.
가는 손목을 휘감는 감각에 눈을 들자, 그새 윤이 위에서 한쪽 팔을 짚어 정언을 내려다보았다. 조도 낮은 스탠드의 빛에도 단정한 얼굴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윤이 몸을 더 숙였다.
“안 돼요?”
거의 호흡이 닿는 거리에서 윤이 숨소리로 물었다. 정언은 재미있다는 얼굴을 했다.
“안 된다고 하면 어쩌려고?”
“구석에서 슬퍼하면서 밤새 울죠, 뭐.”
대답하는 윤의 눈꼬리가 내려갔다. 물론 윤을 그렇게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푹 웃은 정언은 팔을 올려 윤의 목을 감았다. 선선해진 공기 때문인지 가장 먼저 느껴진 서늘함 뒤로 곧 체온이 녹아들었다.
윤이 입술을 겹쳐 왔다. 눈을 감자 얇고 민감한 피부가 맞닿고 비끄러지는 감각이 생생했다. 무심코 한숨처럼 내뱉은 숨결을 빼앗긴 건 그다음이었다. 입 안에서 부드럽고 뜨거운 혀가 뒤엉켰다. 숨을 쉬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머릿속이 몽롱하게 가라앉았다. 윤을 안은 팔이 떨렸다. 윤이 정언을 끌어당겨 완전히 품으로 가뒀다. 맞닿은 가슴에서 빠르게 튀는 비트가 느껴졌다. 누구의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멍하니 그 감각들을 받아들이던 정언은 아직 젖은 윤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다 입술이 닿은 채로 속삭였다.
“……덜 말랐어. 감기 걸리겠다.”
윤이 웃었다.
“백 번 걸려도 상관없어요.”
손을 뻗은 윤이 스탠드의 스위치를 내렸다. 달칵, 짧은 소리와 함께 방 안이 완전히 어둡게 잠겨들었다. 적막 속에서 서로의 체온이 스며들었다. 삼원색의 한가운데처럼, 다채로운 감각들이 뒤섞여 이루는 어둠이 짙었다. 아직 새벽이 오려면 한참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로 채워진 밤은 길었다.
53.
난방을 최대로 돌려도 한겨울 지하 스튜디오 특유의 냉랭한 기운은 어쩔 수가 없었다. 천장에서 돌아가는 히터 탓에 공기가 건조했다. 윤은 입구에 놓인 가습기의 다이얼을 최대로 돌렸다. 하얀 습기가 안개처럼 쏟아졌다.
프론트라인 론칭 이후 처음으로 팀원 전부가 저녁 스케줄이 없는 날이었다. 재희가 모처럼의 회식을 제안했으나, 추운데 나가지 말고 그냥 시켜 먹자는 찬수의 말에 다들 사무실에서 중국 음식을 한 상 가득 차려 놓고 옹기종기 앉아 있는 중이었다. 민혜와 현진은 피곤하다며 먼저 집에 들어간 뒤였다.
지혁이 한 손으로는 짜장면 그릇의 랩을 뜯으며 다른 손으로는 텔레비전 리모컨을 눌렀다. 때마침 저녁 뉴스가 방영되는 시간이었다. QBS 송선민 앵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다음 뉴스입니다. 오늘 오후 서온건설 진송신도시 현장 과장 박 모 씨의 살인 사주 및 부하 직원 살해 혐의 등 여러 건의 살인 및 살인미수, 살인교사 혐의로 구속 수감되었던 용역 업체 사장 손 모 씨와 공범인 직원 이 모 씨에 대한 1심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그릇의 랩을 벗기는 데 열중하고 있던 팀원들이 일제히 어, 하며 고개를 들었다. 손경일과 이원욱에 대한 공판이 진행 중인 건 당연히 알고 있었으나, 다른 일로 워낙 바빠 공판 결과가 오늘 나온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송선민 앵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법원은 검찰에서 주장하는 대부분의 혐의를 인정하였으며, 그 죄질이 극악하고 오랫동안 유사 범행이 반복되어 온 점, 피고인이 법원에서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고 증거를 인멸하려 한 점 등을 들어 손 모 씨에게 징역 30년, 공범 이 모 씨에게 징역 18년을 각각 선고하였습니다. 두 사람에게 실형이 선고되면서, 이들에게 범행을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는 서온건설 남제선 회장과 한국선진당 엄대진 의원에게도 검찰의 칼날이 돌아갈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화면을 뚫어지게 보던 석현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손경일은 진짜 핵심이잖아. 쟤가 실형 받아 버리면 남제선하고 엄대진도 감방 익스프레스 아냐? 손경일까지 그냥 버리고 가기로 한 건가?”
“걔들이 아무리 손경일 빼내려고 했어도 재판부에서 여론 부담스러워서 그렇게는 못 했을걸. 박규형 과장 건이 워낙 화제였어서 에서 방송했을 때도 시청률 꽤 나왔다잖아. 안 그래도 허주경 사장 건도 국가 배상 판결나서 검찰 분위기 개판이라는데. 공판 들어가고 인터넷에 공판 후기하고 판사 이름 이런 것까지 다 뜨는데 압박 심했겠지.”
재희가 그새 탕수육 한 점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그사이 다음 뉴스가 시작됐다. 광화문을 가득 메운 시민들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났다. 촛불과 플래카드, 피켓 따위를 들고 집회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을 찍은 장면 위로 기자의 목소리가 더해졌다.
『안전한 세상 만들기 범국민 광화문 집회가 날로 열기를 더해 가고 있습니다. 검찰 조사 중인 서온건설 남제선 회장은 오늘 오후 결국 직접 기자회견을 열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과 재발 방지를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합니다.』
집회에 참여한 한 시민이 화면에 나타났다. 가족과 함께 나온 평범한 중년의 여인이었다. 여인은 손에 플래카드를 꼭 움켜쥐고 있었다. 어느덧 겨울로 접어든 날씨에,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 마디마다 빨개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는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서온건설이 정치인들하고 짜고서 그랬다는 게 용납이 안 되는 거고요. 서민들을 농락했다고요. 서민들은 정말 평생 돈 모아서 내 집 장만 하나 하는 게 목표잖아요. 나랑 내 가족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집, 그게 어떤 사람들한테는 평생의 꿈인데 그걸 그렇게 짓밟은 거거든요. 애들이 그렇게 병 걸리는 집에 어떻게 살겠어요. 임대 주택도 그렇잖아요. 그게 없이 사는 사람들 희망인데, 그걸 그따위로 사람 살지를 못하게 지어 놓고. 없이 산다고 곧 무너질 집 지어서 돈은 똑같이 받고 팔아먹는 게 말이 돼요?』
울분에 차 말하는 여인의 얼굴에 시선이 머물렀다. 윤은 손을 멈춘 채 인터뷰 화면을 보았다. 저렇게 평범한 사람들이 광화문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사회의 부조리에 분노하는 사람들의 힘이 문득 두려워졌다. 화면은 광화문에 넘실대는 촛불의 빛을 보여 주다 곧 다시 스튜디오로 전환됐다.
『서온건설에 대한 집단 소송이 줄을 잇는 가운데, 검찰은 남제선 회장의 부인 김신옥 씨가 한국선진당 의원들의 정치 자금 세탁 용도로 그리스에 페이퍼컴퍼니를 개설했다는 혐의를 제기했습니다. 김신옥 씨의 오촌 조카인 채 모 씨가 대표로 있는 이 기업은 대체에너지 사업 회사로 등록되어 각종 조세 혜택을 받아 왔으나, 검찰은 내부 자료 조사 결과 해당 업체의 거래 내역 등이 전부 거짓인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