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98
298화
그 순간 사무실 안이 일제히 고요해졌다. 틀어 놓은 텔레비전의 광고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모두의 시선이 순식간에 윤에게 쏠렸다. 누가 급속 냉동이라도 시킨 것처럼 얼어붙었던 석현이 눈을 껌뻑이다 물었다.
“……누가 뭐가 있다고?”
“아니, 그게…….”
정언이 황급히 윤의 말을 막으려 했으나, 그보다 찬수가 더 빨랐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찬수가 재희의 어깨를 움켜쥐고 흔들었다.
“야, 너야? 진짜 너야? 너 그래서 웃었냐? 이 새끼, 너 언제…….”
“전데요.”
윤은 재희가 미처 해명을 하기도 전, 찬수의 말을 끊었다. 번지수를 잘못 찾은 찬수가 뻣뻣하게 굳어서는 정언과 재희와 윤을 번갈아 보았다.
“에이,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해. 만우절 네 달이나 남았는데.”
호형이 눈알을 굴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마를 짚은 정언이 한숨을 내쉬었다. 장난이 아니라는 걸 그제야 알아차린 듯, 혜주와 희림이 어머, 어머머, 하며 서로 팔을 찰싹찰싹 때려 댔다.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던 석현이 정언을 다그쳤다.
“진짜야? 진짜 김 피디랑 사귄다고? 서 피디가?”
모두의 눈이 정언에게 쏠렸다. 눈썹을 문지른 정언이 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일이 뭐 그렇게 되긴 했는데…….”
지혁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경악하는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누가 뒤통수를 한 대 툭 치면 당장 눈알이 굴러 나올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이라고 그다지 사정이 나아 보이지는 않았다. 호형은 입을 딱 벌린 채 손가락으로 정언과 윤을 번갈아 가리키기를 몇 번째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예준이 손을 내밀었다.
“거 봐, 내가 느낌 이상하다고 그랬잖아. 다들 돈 내놔, 빨리.”
재희를 제외한 나머지 피디들이 아이 씨, 하고 투덜거리며 지갑에서 만 원짜리를 꺼내 예준에게 건넸다. 그 꼴을 본 정언은 대번에 얼굴을 구겼다.
“이건 또 뭐예요?”
예준이 방금 수거한 지폐들을 펼쳐 보이며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아니, 내가 김 피디랑 서 피디 만나는 거 같지 않냐니까 다들 절대 아니래. 저 눈치들로 무슨 시사 프로를 한다고 그러냐. 근데 내가 서 피디 사고 났을 때부터 뭔가 감이 왔거든. 김 피디가 갑자기 전화 받다 말고 눈 돌아가서 미친놈처럼 소리 지르고 경찰에 신고하고 119 부르고 그럴 때까지만 해도 긴가민가했단 말이야.”
정언이 그 말에 윤에게 잠깐 시선을 주었다. 내가 그랬었나, 속으로 생각한 윤은 정언의 눈치를 살폈다.
“근데 김 피디가 밥 먹듯이 병원 드나드는 거 보고 느낌이 좀 이상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혹시 둘이 사귀나? 이러니까 다들 나보고 미쳤냐고, 그게 진짜면 돈 준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무용담을 늘어놓듯 신이 나서 떠들던 예준이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재희에게 휙 시선을 돌렸다.
“아니, 잠깐만. 강 선배는 알고 있었어요?
“주 피디가 아는데 내가 몰라, 그럼?”
재희의 대답에 예준이 기가 찬다는 투로 팔짝 뛰었다.
“아는데 왜 말을 안 해요?”
“뭐가 재밌다고 남 연애하는 걸 떠들어?”
여상하게 대꾸한 재희가 윤에게 한쪽 눈을 슬쩍 찡긋해 보였다. 홧김에 질러 버리긴 했지만 막상 말을 뱉으니 심장이 쿵쿵거렸다. 정작 당사자인 정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앉아 이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는 통에 갑자기 불안해진 건 덤이었다.
“어우 씨, 너무 놀라서 방금 먹은 탕수육 얹힌 거 같아.”
찬수가 명치 부근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 년을 취재하면서 본 것보다 이게 더 충격적이다. 올해의 토픽으로 선정해야겠어.”
“ 901회로 내보내야 되는 거 아니에요?”
호형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답 대신 곁에 앉아 있던 철진이 호형의 입에 깐풍기를 쑤셔 넣었다. 재희가 손뼉을 딱 치며 주의를 돌렸다.
“다들 서 피디가 상장 폐지 주식 버리고 유망주 투자 잘 하고 있는 거 알았으면 먹던 거나 계속 먹어.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못 만날 사이도 아닌데.”
그건 그렇지, 하며 팀원들이 다들 빠르게 수긍했다. 석현이 투덜거리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에이, 중매 잘 서서 술 석 잔 받아먹나 했더니 글렀어. 시시한 놈 만나는 거면 당장 집어치우라고 하고 들이밀어 보려고 그랬는데, 만나도 하필이면 김 피디 같은 놈 만날 건 뭐야.”
“서 피디가 뭐 시시하게 하는 거 봤어?”
공돈이 생긴 까닭인지 한껏 기분이 좋아진 예준이 타박을 놓았다. 사무실 안이 곧 깔깔거리며 웃고 떠드는 분위기로 돌아갔다.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우던 음식들이 바닥을 드러낸 건 한 시간쯤 뒤였다. 몸을 일으킨 재희가 말했다.
“슬슬 들어갑시다. 날도 춥고. 주말엔 푹 쉬고 조금만 더 힘내서 가자고.”
그릇들을 정리해 밖에 내놓고 테이블 위를 치운 팀원들이 퇴근 준비를 서둘렀다. 사무실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서자 매서운 초겨울 칼바람이 불었다. 으, 하고 발을 동동거린 찬수가 먼저 손을 흔들었다.
“나 오늘 버스 타고 가려고. 월요일에 보자.”
다들 인사를 나누고 헤어질 즈음이었다. 버스 정류장으로 종종걸음을 치던 찬수가 갑자기 윤에게 되돌아왔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정언의 뒤를 따라가던 윤은 팔을 낚아채는 손길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찬수가 윤의 옆구리를 쿡 찌르더니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김 피디, 잘 좀 해 줘.”
무슨 말인지는 굳이 되묻지 않아도 뻔한 것이었다. 윤이 멋쩍게 웃자 찬수가 잘 하라고, 하고 되풀이하며 윤의 등을 툭 치고는 후다닥 뛰어갔다. 앞서가던 정언이 의아한 듯 윤을 보았다. 윤이 서둘러 정언의 곁에 나란히 서자 정언이 물었다.
“임 선배가 뭐래?”
“선배한테 잘 하라고 그러시던데요.”
“별소릴 다 하고 그래.”
픽 웃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정언이 두터운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윤은 잠시 머뭇거리다 걸음을 멈췄다.
“혹시 화나셨어요?”
“왜?”
정언이 되물었다. 윤은 정언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대답했다.
“제가 선배들 앞에서 사귄다고 얘기해 버려서…….”
“화났다고 하면 취소하려고?”
눈만 내놓고 묻는 통에 그 표정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입술을 물었다 놓은 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왜 그랬는데?”
돌아온 질문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윤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정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뒤늦게 귀 끝이 뜨거워졌다. 차가운 바람 탓은 아니었다.
“……선배한테 누가 다른 남자 얘기만 해도 돌아 버릴 것 같아서요.”
정언이 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시선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윤은 고개를 숙였다. 가로등에 비친 그림자가 한밤중의 보도블록 위로 길게 늘어졌다.
“어른스럽게 굴고 싶은데 잘 안 돼요. 화나신 거면 죄송해요.”
정언이 이쪽으로 한 걸음 성큼 다가왔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 시선을 들자 정언과 눈이 마주쳤다. 정언이 손을 뻗어 윤의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흩어 놓았다.
“김 피디는 희한하게 가끔 본인을 너무 과소평가해.”
정언이 얼굴을 파묻었던 목도리를 내리며 내뱉었다. 움직이는 입술 사이로 입김이 하얗게 부서졌다.
“나 아무 데나 투자 안 해.”
서늘한 눈매가 장난기 있게 휘었다. 더 가까이 다가온 정언이 눈을 깜빡이는 윤의 등을 꽉 안았다. 인적 드문 건물 뒤편에서 차게 파고들던 바람이 한순간 사그라졌다. 윤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코트 위로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은 다정했다.
“그리고 화 안 났어.”
정언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긴 숨을 내쉬며 정언이 윤의 품에 잠시 얼굴을 묻었다. 문득 이마 위로 차가운 것이 떨어졌다. 손끝을 댄 순간 그 감각은 곧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졌다. 가로등 빛에 드문드문 하얀 입자가 흩날리는 것이 보였다. 늦은 첫눈이었다. 어, 하며 손바닥을 펼치자 눈송이가 내려앉으며 순식간에 조그만 물방울이 맺혔다.
“눈 와요.”
“좋은데. 일 년 다 간 것 같고.”
윤이 속삭이자 정언이 대답했다. 정언의 가느다란 속눈썹 위로 눈송이가 하나 떨어졌다가 녹아내렸다. 그 광경이 슬로 모션처럼 눈에 들어왔다. 정언이 윤을 안고 있던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그동안 수고했어.”
담담한 말투였으나 심장이 빨라졌다. 이대로 잠깐 시간이 멈춰도 좋을 것 같았다. 윤은 이마 위로 흐트러진 정언의 머리칼을 쓸어 올려 주었다.
“크리스마스 다 돼 가는데 말만 하고 선물은 안 주실 거예요?”
농담처럼 던진 말에 정언이 눈을 들어 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고 갈래?”
되로 주고 말로 받은 통에 당황하는 윤의 얼굴을 본 정언이 소리를 내어 웃었다. 정언은 손끝으로 윤의 이마를 툭 밀었다. 윤이 서둘러 그 손을 감싸 쥐자, 정언이 고개를 까딱였다.
“밤새 여기 서 있을 거야?”
물론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잠깐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가로등의 사각지대로 정언을 잡아끈 윤은 그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그새 꽁꽁 언 뺨이 부드러웠다. 서둘러 입을 맞추자 마치 아이스크림이 녹아들듯 차갑고 달콤한 감각이 입 안으로 번졌다.
떨어지는 눈송이가 머리칼이며 코트 위로 내려앉았다. 나누는 숨결 사이로 희미하게 눈의 냄새가 났다. 첫눈이 내리는 거리는 고요했다. 멀리서 익숙한 캐럴의 멜로디가 떠돌았다.
* * *
을지로 근처의 호프집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연말의 시끌벅적한 분위기도 분위기였지만, 오늘 밤은 그것과는 또 다른 묘한 열기가 가게 안을 떠돌았다. 맥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의 눈은 가게 안의 대형 텔레비전에 고정된 채였다.
실시간 대선 개표 방송이 진행 중이었다. 지도 위를 점차 물들이는 파란색이 선명했다. 지역마다 박빙, 약간 우세, 우세, 유력 따위가 쓰인 아이콘이 엎치락뒤치락하며 치열하게 싸우기 시작한 지 이미 네 시간째였다.
맥주잔을 들고 텔레비전 화면을 아예 뚫을 기세로 응시하던 찬수가 마침내 마지막 아이콘이 뒤집히자 잔을 탁 내려놓았다. 지도 위가 거의 전부 파란색으로 뒤덮이며 민주영 의원의 얼굴 옆으로 유력, 혹은 우세 아이콘이 붙었다.
“끝났네. TK도 저만하면 박빙인데.”
여상한 말투였으나 얼굴에서 기쁨을 숨길 수는 없었다. 호프집 안의 사람들은 거의 다 찬수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잔뜩 긴장한 듯 마르는 입술을 축이던 윤이 곁에 앉아 있던 정언에게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뒤집힐 일 없겠죠?”
정언은 손을 뻗어 뻥튀기 조각을 집어 먹으며 대답했다.
“더 벌어지면 벌어졌지 좁혀지긴 힘들지.”
“투표 끝나기 전까지 SNS에 별 얘기가 다 돌아서 불안하더라고요.”
윤이 겨우 안도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SNS에서 지지자들이 오후부터 내내 출구조사 결과 민주영이 근소하게 뒤진다, 엄대진이 근소하게 뒤진다, 젊은 사람들 투표율이 낮다, 나이 든 사람들 투표율이 낮다 하며 치열하게 싸우는 것을 본 까닭이었다. 턱을 괸 정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그래. 여론전이지. 서로 종료 직전까지 자기들이 근소하게 뒤진다고 언론 플레이한다고. 그래야 유권자들이 위기의식 느끼니까. 이젠 거의 끝났다고 봐야지. TK 투표함 다 까서 100퍼센트 엄대진 표라도 힘들어.”
화면이 양쪽으로 분할되며 각각 민권당과 한선당의 캠프 사무실을 비췄다. 분위기가 대조적인 건 당연했다. 민권당 캠프 사람들은 개표 방송을 보며 서로 얼싸안거나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가장 앞줄에 앉은 민주영 의원과 부인은 손을 깍지 끼어 꼭 잡은 채였다. 두 사람은 담담해 보였다. 결과를 예상했다기보다는 거기서 초연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