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299
299화
한선당 캠프 사무실은 조용했다. 엄대진계 의원들이 자리를 지키고는 있었으나, 이미 패색이 완연한 상황을 되돌리기 쉽지 않다는 걸 잘 알 터였다. 카메라가 앞에 앉은 엄대진과 변정화의 모습을 비췄다. 변정화가 애써 웃는 얼굴로 엄대진의 팔짱을 끼었다.
“한선당 완전 초상집이겠지?”
철진이 치킨 한 조각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석현이 그렇지 뭐, 하며 철진의 말을 받았다.
“한 한 달 전부터 캠프 실무자들은 필패라고 판단했다는 얘기 있더라고. 분위기 아주 안 좋았다는데. 눈으로 보면 충격 더 심하겠지. 처음에 캠프 얘기 나올 때까지만 해도 서로 가고 싶어 했다는데 이젠 뭐 완전 썩은 줄 잡은 꼴 아냐.”
듣고 있던 정언이 한마디를 보탰다.
“흐름 한 번 타면 뒤집기 힘드니까. 물은 엎질러졌는데 주워 담지도 못하고 닦지도 못하고, 상황 애매하죠. 그런데 선배는 거기를 또 부득불 기어갔어요? 누가 반긴다고.”
정언의 마지막 말에 앉아 있던 팀원들이 낄낄거렸다. 재희는 한동과 정환일 피디, 김영은 기자와 함께 한선당 당사 앞에서 프론트라인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러 나가 있는 중이었다. 찬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성격 누가 말려. 지금 전 부장님이랑 둘이 아주 작당을 했어. 실시간으로 촬영하면서 하도 약을 올리니까 조금 전에 보좌관들이 쫓아 나와서 제발 좀 가라고 사정했대. 안에서 의원들이 엄청 빡쳤나 보더라고.”
“그러다 언제 칼 맞아 죽지.”
정언이 혀를 차자 찬수가 정언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아이고, 남 말 하고 있다.”
왁 웃는 소리가 터졌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언은 피식 웃으며 다시 화면으로 눈을 주었다. 대도시 광장마다 설치된 대형 스크린 앞에 모여들어 실시간으로 개표 방송을 지켜보는 시민들의 얼굴이 차례로 지나갔다. 석현이 거기 시선을 둔 채 말했다.
“사실 대선 이긴다고 당장 뭐 되는 건 아닌 거 알면서도 사람 마음이 그렇다. 이사진 싹 쳐내고 회사 물갈이하는 데 몇 달은 걸릴 텐데 기분은 벌써 방송국이야, 아주.”
“크리스마스 선물 거하네 싶다니까요.”
호형이 맞장구를 치자 석현이 그치, 하고 수긍했다. 그때 철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유력 떴다!”
드디어 민주영 의원의 얼굴 옆에 ‘당선 유력’이라고 쓰인 아이콘이 박혔다.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졌다. 화면이 급하게 민주영 캠프 사무실로 돌아갔다. 지금 소감이 어떠냐고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민주영 의원이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결과는 마지막까지 하늘에 맡기겠습니다. 저는 국민 여러분께서 선택하시는 길을 겸허하게 따라가려 합니다.』
차분한 목소리였다. 국민이 선택한 길. 그 길이 어떤 길인지는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다. 개표 방송을 진행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시끌벅적한 호프집 안을 채웠다.
『전국 개표 55퍼센트가량 진행 중입니다. 현재 득표율 38.8퍼센트로 기호 1번 민권당 민주영 후보 당선이 매우 유력한 상황입니다. 기호 2번 한국선진당 엄대진 후보는 현재 23.2퍼센트의 득표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선진당은 현재 대구·경북 지역 개표율이 낮은 것에 희망을 걸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대구·경북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현재 민주영 후보가 우세해 결과를 뒤집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크, 하며 잔에 남은 맥주를 단숨에 들이켠 찬수가 손을 들었다.
“어우, 맥주가 아주 물처럼 들어가네. 여기 피처 하나 더 주시고 순살 두 개 추가요!”
신이 난 찬수를 본 예준이 면박을 주었다.
“누가 보면 선배가 당선된 줄 알겠어요.”
“사실상 기분은 거의 그 수준 아니냐?”
찬수가 심각하게 되물었다. 다들 그 심정을 잘 알기에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추가한 피처 하나와 치킨 두 마리를 깨끗하게 해치운 팀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난 건 한 시간쯤 뒤였다.
“선배가 다들 고생했다고 내일은 하루 쉬래요.”
정언이 방금 들어온 재희의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핸드폰을 흔들어 보였다. 계산을 하고 길거리로 나서자, 이미 늦은 시간인데도 거리는 흥분으로 들뜬 느낌이었다. 찬수가 패딩 자락을 여미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대선만 몇 번을 보냈는데 기분 이상하네.”
“그러게. 평생 못 잊을 것 같아요.”
철진이 곁에서 말을 보탰다.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공감되는 기분이었다. 수고했다고 인사를 나누고 삼삼오오 흩어지는 팀원들 사이로, 정언은 윤과 나란히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도심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이는 통에 길이 막힐 것 같아 차는 오전에 사무실에 두고 온 뒤였다.
윤이 먼저 발을 멈췄다. 머플러에 얼굴을 반쯤 묻은 정언이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자, 윤이 잠깐 망설이는 듯하더니 정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집에 가실 거예요?”
“왜?”
“그냥요. 광화문 가 보고 싶어서요.”
을지로에서 광화문은 금방이었다. 이런 날 그냥 집에 들어가기 아쉬운 모양이었다. 가면 되지 뭐, 하고 대답한 정언은 광화문 방향을 가리켰다.
방향을 돌려 나란히 걷자 민주영 의원의 얼굴이 그려진 피켓을 든 여학생들이 까르르 웃으며 두 사람을 지나쳤다. 가방에는 파란 리본이 묶여 있었다. 추운 날씨인데도 유모차를 밀고 나온 젊은 부부도 있었고, 플래카드를 든 연인들도 눈에 띄었다.
윤이 가만히 정언의 손을 잡았다. 정언은 멈칫하며 윤을 쳐다보았다. 긴 손가락이 얽히며 차가운 손으로 체온이 스몄다. 매서운 바람이 빌딩 숲 사이를 돌고 지났다. 윤이 정언을 끌어당겨 자기 코트 주머니로 잡은 손을 넣어 주었다.
“춥잖아요.”
당황해서 반사적으로 팔을 빼려 하자 윤이 정언의 손을 더 꼭 쥐며 웃었다. 귀 끝이 뜨거워져, 정언은 머플러 속으로 얼굴을 더 파묻었다. 별것 아닌 행동인데도 그런 일이 처음인 탓인지 공연히 어색했다. 정언은 그 어색함을 떨치기 위해 말을 돌렸다.
“어, YBS네.”
광화문 광장에 설치된 오픈 스튜디오가 눈에 들어왔다. 패딩에 목도리, 장갑으로 중무장한 스탭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스튜디오 한가운데서 겹겹이 껴입은 한 남자가 모니터 앞에 선 채 방송을 진행하는 모습이 보였다. 김양운 앵커였다.
저 자리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그 자리에 멈춰 선 정언은 한동안 YBS의 오픈 스튜디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곁에서 그런 정언을 지켜보던 윤이 주위로 시선을 주었다.
“추운데 사람들 진짜 많아요.”
“우리도 여기 와 있잖아.”
정언은 여상하게 대답했다. 윤이 대답 대신 긴 숨을 뱉었다. 허공에 하얗게 습기가 어리며 반짝였다. 방송용 조명들로 광장 한복판은 대낮처럼 밝았다. 눈이 부신지 윤이 손을 올려 잠시 눈가를 가렸다.
“그렇게 감동적이야?”
혹시 우는 건 아닌가 싶어 툭 던진 말에 윤이 웃었다. 손등이 만드는 그늘 아래로 가려진 눈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말이 없던 윤은 일렬로 선 경찰들과 그 앞을 지나다니며 웃고 떠드는 시민들 사이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제가 게시판에 글 쓰게 만들었던 그 친구가 기제국에서 다큐 찍는데, 걔는 예전부터 자기는 그 일이 너무 좋다는 거예요.”
침묵하던 윤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조금 낮아져 있었다. 코트 주머니 안으로 윤은 다시 정언의 손을 고쳐 쥐었다.
“오태훈 피디?”
정언이 묻자 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전 대기업 다닐 때 매일 그랬거든요. 나는 왜 여기서 보람을 못 느끼지? 남들도 다 그런가? 나중에는 돈 받으려고 하는 거지, 그러면서도 뭔가 허무하더라고요. 그만두고 방송국 들어왔는데도 결국 하는 일이 달라져서 그렇지 다 똑같은가 보다, 다들 그냥 이렇게 사는 거겠지, 그렇게만 생각했어요.”
앰프와 스피커를 통해 시끄럽게 울리는 음악 소리며 방송 멘트 사이로 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흩어졌다.
“그런데 여기 와서 태훈이 얘기가 뭔지 조금 알겠더라고요. 세상이 이랬나? 지금까지 내가 본 건 뭐였지? 제가 사는 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던 거죠. 여기 와서 처음으로 내가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한다는 생각 들었어요.”
독백 같은 말이었다. 정언이 듣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윤은 앞을 보았다. 정언은 문득 윤이 처음 에 왔을 때를 되짚었다. 시청자 카페와 편람, 기획안을 뒤적이며 몰두하던 그 얼굴. 윤이 여기서 얼마나 버틸지 궁금해지던 순간들.
“그래서 자꾸 선배 더 알고 싶더라고요.”
마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윤이 정언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항상 그냥, 이러시니까.”
어떻게 견디는 거냐고 몇 번이나 묻던 윤이 떠올랐다. 누군가가 해야 하니까, 내가 여기 있으니까. 그냥이라는 두 글자가 윤에게는 충분한 대답이 되지 못했으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선배가 사는 세상은 어떤 덴지 너무 궁금한 거예요.”
시선이 마주쳤다. 선배가 사는 세상. 정언은 그 말을 다시 한 번 곱씹었다. 와 . 절대 마주칠 수 없을 두 가지의 삶이 교차하는 지점을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머릿속에 떠올린 건 한 단어였다.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었는데.”
운명.
― 운명이라는 말 싫어하는데, 솔직히 그런 경험은 다른 말로는 표현이 안 돼.
재희의 말이 뇌리를 지났다. 알고 있는 모든 언어를 동원하더라도 답은 결국 하나였다. 멀리서 날아온 밝은 조명의 입자가 윤의 눈동자 위로 반사되며 작은 빛을 흩뿌렸다.
“가끔 선배는 끝이 어딘지 아실까 궁금했어요.”
누구도 답을 알 수 없을 질문이었다. 매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이정표가 사라진 길 위에서 희망은 늘 막연했다.
“이제 선배가 사는 세상이 뭔지 알겠어요.”
걸음을 멈춘 윤의 눈매가 부드러운 호를 그렸다. 빛의 입자들이 가는 속눈썹 위로 머물렀다.
“여기가 끝인 줄 알았는데 시작인 것도.”
심장이 움직이는 듯한 감각이 생경했다. 정언은 잠시 숨을 멈췄다. 긴 팔이 어깨를 휘감아 끌어당겼다. 파묻힌 품에서는 언제나처럼 햇살 냄새가 희미했다. 꽁꽁 언 귓가로 따뜻한 호흡에 섞인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러니까 계속 선배 옆에 있게 해 주세요.”
정언은 대답 대신 윤의 등을 안았다. 차가운 바람이 속속 스민 회색 코트의 결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끝까지 가 보고 싶어요.”
정언은 고개를 들어 윤을 보았다.
“허무할지도 몰라.”
어쩌면 영직이 말한 대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 모든 일이 그저 헛된 노력일지도 몰랐다. 그런 두려움을 매번 이겨 낼 수 있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그만두고 싶고, 멈추고 싶은 순간은 늘 그렇지 않은 순간보다 더욱 많았다.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어.”
“그래도 좋아요.”
윤이 대답했다.
“가 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망설임 없는 확신에 찬 눈동자가 반짝였다. 누군가가 심장 안에 작은 불을 붙인 듯 옅은 열기가 차올랐다. 문득 사람들의 환호성이 멀게 들렸다. 아마 방금 민주영 의원의 당선이 확실시된 모양이었다.
정언은 윤의 어깨 너머로 넘실대는 불빛들을 보았다. 사람들의 손에 들린 조그만 촛불의 빛이 어둠 위를 수놓았다. 수많은 두려움 속에서 자신을 움직이는 건 오로지 한 가지 믿음이었다.
우리가 마침내 도착하는 곳은 늘 이전보다 나을 거라고.
“일 년을 하고도 정신 못 차렸으면 안 되는데.”
짐짓 눈썹을 찌푸리는 정언의 얼굴에 윤이 웃음을 터트렸다.
“평생 못 차릴 것 같은데요.”
그 눈을 마주 보던 정언은 다시 윤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감은 눈 안으로 빛무리가 일렁였다. 매서운 바람조차 무디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눈을 뜨면 세상은 다시 시작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