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3
3화.
어차피 시끄러워 바로 옆 테이블의 얘기도 들리지 않았지만, 태훈은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
“거긴 지금 진짜 엉망진창이야. 데스크 다 갈아 버리라고 했다는 얘기도 돌고. 시보국에 인력 충원 전혀 안 된 지도 몇 달 됐다더라. 사람은 계속 빠지는데 제작비도 승인을 안 내 줘서 자비 써 가면서 취재 다닌대. 지난번 이사회 때도 사장님하고 시보국장님 들어가서 엄청 싸웠다고 하더라고.”
피디 출신의 유동욱 사장과 사회부 기자 출신의 백선경 시보국장은 현재의 시사 강국 YBS를 만든 인물들이었다. 특히 백선경 국장은 기자 시절에도 매년 올해의 언론인 상을 가져가던 전설적인 존재였다. 사장 말도 안 듣는다는 강성으로 유명해, 윤도 이름은 잘 알고 있었다.
이사회에서 싸워야 할 정도라면 상황이 몹시 심각한 건 분명했다. 태훈이 착잡한 표정으로 단숨에 잔을 비웠다. 윤은 다시 병으로 손을 가져가는 태훈을 막으며 얼른 잔을 채워 주었다.
태훈이 고개를 까딱이더니 눈가를 문질렀다.
“시보국 사람들은 워낙 강성 많으니까 버티긴 하는데, 며칠 전부터 위에서 다음 개편 때 폐지하라고 통보했다는 소문 돌더라고.”
눈을 휘둥그렇게 뜬 윤은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이건 누가 들어도 미친 소리였다. 는 17년째 방송을 이어 오고 있는 YBS의 간판 탐사보도 프로그램이었다. 다른 프로그램도 아니고, 매년 언론상이란 언론상을 싹쓸이하는 를 자른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시청자들이 가장 신뢰하는 TV 프로그램, YBS의 자존심, 어떤 권력에도 타협하지 않는 단 하나의 저널리즘, 정부보다 믿을 수 있는 방송. 에 따라다니는 수많은 수식어 중 일부였다.
는 매주 방송만 했다 하면 실시간 검색어 1위를 휩쓸었다. 시보국에서는 유일하게 광고를 완판시키는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인터넷에 수만 명 규모의 시청자 커뮤니티가 생길 정도로 고정적이고 열성적인 시청층도 많았다.
자본과 인력과 운이 갖춰져도 그런 프로그램을 만드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돈 주고 만들기도 힘든 프로그램을 폐지한다니, 정상적인 경영진이라면 누구도 그런 판단을 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게 말이 되냐? 어떤 미친놈들이 그런 짓을 해.”
윤은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손을 휘적거렸다. 지금 당장 인터넷에 가 폐지된다는 소문이 있다는 글 하나만 올려도 항의 전화로 업무가 마비될 게 뻔했다.
윤을 가만히 응시하던 태훈이 잔을 마저 비우며 입술을 달싹였다.
“나 지금 촬영 들어간 다큐 잘렸어.”
말투가 담담한 탓에 그 내용이 바로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촬영이 들어갔는데 잘렸다니, 태훈이 취해서 말을 잘못한 건가 싶었다. 눈을 깜빡이던 윤이 되물었다.
“기획안 캔슬됐다고?”
“아니, 촬영 들어갔는데 잘렸다고.”
윤은 잔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멈췄다. 기획안을 반려당하는 일은 흔했다. 그러나 이미 촬영에 들어간 프로그램을 자르는 일은 결코 흔하지 않았다. 촬영이 시작됐다는 얘기는 곧 일정 확정은 물론이고 예산 배정과 편성까지 끝났다는 것을 뜻했다. 그 상황에서 프로그램을 엎는다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다. 적어도 윤은 그런 경우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잠시 멍하니 태훈을 마주 보던 윤은 의자를 당겨 앉았다. 이 상황이 장난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건 그때였다. 입 안이 말랐다.
“오태훈, 잠깐만. 나 지금 이게 하나도 이해가 안 되거든. 회사가 지금 도대체 뭐 어떻게 돌아간다는 거야? 자세히 좀 설명해 봐.”
윤은 다급하게 태훈을 다그쳤다. 대답 대신 어느새 빈 소주병을 들어 본 태훈은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하고 소리쳤다. 식당 아주머니가 소주 한 병을 내려놓았다. 바로 새 병을 딴 태훈은 잔을 채워 숨도 쉬지 않고 마셨다.
입가를 닦은 태훈이 괴로운 표정으로 얼굴을 감쌌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뭔가 심상치 않았다. 머릿속으로 아침에 봤던 시위대의 모습과, 피켓이며 플래카드의 문구 따위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지금까지 인식조차 한 적 없던 흑백의 세계가 갑자기 색을 입었다.
태훈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거의 손도 대지 않은 닭볶음탕 냄비에서 가장자리가 졸아들어 탄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윤은 그것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한참 그러고 있던 태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지금 신도시 개발 지역 중에 의정부 지나서, 진송신도시라고 있어. 3년 전에 재개발 발표되고 이제 아파트 공사 들어간 데야. 그런데 이 지역 원주민들이 대부분 다 도시 빈민이거든. 입주권 받아도 들어갈 수가 없어. 그러니까 재개발하는 거 좋아하겠냐? 당연히 싫어하지. 주민 투표에서도 반대 의견이 대부분이었다고. 진짜 손바닥만 한 단칸방에 아직도 연탄보일러 쓰는 이런 집들이 태반이야. 겨우 서너 평짜리, 사람 하나 누우면 끝나는 그런 방 팔아 봐야 신도시 아파트 화장실 하나도 못 사.”
발음이 약간 어슷하게 뭉개지는 태훈의 목소리는 낮았다. 윤은 그저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태훈이 다시 술을 한 잔 마셨다.
“우리 팀에서 거기 직접 가서 봤다고.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나이 일흔, 여든 먹고 혼자 사는 노인들, 미혼모 혼자서 애 키우는 집, 그나마 부모라도 있으면 다행이야. 부모 도망간 집에서 중학생 혼자 아르바이트해서 초등학생 동생 먹여 살리는 집도 있어. 하루 벌어 하루 먹기도 힘든 사람들이거든. 이런 사람들이 아파트 건설현장 앞에서, 이 추운 날씨에 벌벌 떨면서 매일 재개발 반대 시위에 나와.”
태훈이 헛웃음을 뱉었다. 머릿속으로 그 광경은 잘 그려지지 않았다. 뉴스 화면 속에서나 나올 법한 사람들을 직접 보는 건 어떤 기분일까. 윤은 마르는 입술을 축이기 위해 잔을 비웠다. 싸한 맛이 목을 넘어갔다. 열기가 머리까지 타고 올라왔다. 술 탓인지, 분노 탓인지 알 수 없었다.
“정부가 건설사하고 결탁해서 주민 대표라는 사람하고 짠 거야. 이 사람들은 그걸 알지도 못하고, 알아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돈이 없잖아. 변호사 만나고 그런 건 꿈도 못 꿔. 그런데 그럼 이 사람들은 어떻게 되냐? 그냥 쫓겨나면 또 어디로 가?”
윤이 앞에 있다는 것도 잊은 것처럼, 태훈은 자문했다. 헛웃음을 뱉은 태훈이 긴 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우리 팀에서 다큐로 찍어 보자, 그 얘기가 나왔어. 3부작 기획해서. 신도시 뒤편의 삶이란 게 뭘까. 작년 말에 국장님 컨펌까지 다 끝났다고. 근데 그때 국장님이 우리 팀장 있잖아, 박지영 선배. 박 선배한테 그렇게 얘기를 했었대. 노골적으로 재개발 비난하는 내용은 넣지 마라. 감성적인 부분에만 초점을 맞춰라. 그래서 알겠다고 했거든.”
태훈의 말끝이 떨렸다. 태훈은 서둘러 다시 잔을 채우고는 숨도 쉬지 않고 술을 들이켰다.
“저번 달에 편성 받았어. 봄에 방송하는 걸로. 거기 재개발 반대 시위 도와주는 사람들 섭외도 다 됐고. 우리가 촬영 시작한 지 딱 보름 됐다고. 그런데 이번 주 초에 국장님이 박 선배 호출해서 그랬대. 이거 편성 취소됐으니까 당장 촬영 중단하라고. 이해가 안 되잖아. 벌써 찍고 있는데. 무기한 연기다, 그렇게 얘기하더래. 선배가 왜 그러냐고 따지니까 뭐라는지 아냐?”
태훈은 돌연 웃기 시작했다. 거구를 숙이며 쿡쿡거리는 통에 아귀가 맞지 않는 오래된 탁자가 흔들거렸다. 한참 웃던 태훈이 거의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이사님들이 이 기획 아주 불편하게 생각한대. 이사님들이. 씨발, 그 새끼들이 뭔데 지들이 불편하고 말고 하냐고. 개새끼들, 그게 왜 불편한데. 대체 뭐가 그렇게 불편한데.”
태훈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장난으로라도 그런 소리를 하는 법이 없던 태훈이었기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노조에는? 노조에 얘기했어?”
윤이 묻자 태훈이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떻게 될지 몰라. 기제국에서는 이게 처음인데, 시보국에서는 벌써 이런 일 여러 번 있었다고 하더라고. 그나마 는 위에서 데스크에 손을 못 대고, 는 거의 사장님 직속이라 중간에서 장난 못 쳐서 아직…… 근데 그러니까 위에서 다루기 힘들어서 아예 폐지하려고 한다잖아. 나도 모르겠다. 이게 뭐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할 말을 잃은 윤은 그저 태훈을 마주 볼 뿐이었다. 불편하다…… 고작 그 한 단어가 함축한 의미에 소름이 돋았다. 의도를 감출 생각조차 없는 그 단어. 그들에게 뭐가 불편하다는 건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태훈의 말대로 정부와 건설사의 결탁이 사실이라면, 아주 조금이라도 그런 부분이 드러날 만한 요소는 모두 제거하고 싶을 게 당연했다. 더구나 그게 눈엣가시 같은 YBS의 방송이라면 더더욱.
YBS는 시청자들에게 신뢰도가 높은 방송국이었다. 별것 아닌 방송 하나가 그렇지 않아도 점점 떨어지는 정부 지지율에 도화선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걸 이해하는 것과 이 상황을 수용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같은 건물 안에서 이런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빨리 마신 술 때문인지 머릿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