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300
300화
외전 (1). Baby, it’s cold outside
재희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제도 철야였던 주제에 출근하자마자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그 표정을 본 팀원들은 다들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저게 또 무슨 꿍꿍이지,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재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다들 왜 그래?”
“아침부터 너 실실 웃으면 좋은 일이 하나도 없던데.”
현진이 아무래도 수상하다는 투로 대꾸하자, 재희가 눈을 크게 떴다.
“눈치챘어요?”
“뭔데 그래?”
현진이 불안하게 묻자 재희가 쿡쿡거리며 한참 웃고는 손을 저었다.
“아냐, 진짜 좋은 소식이에요. 우리 부당 인사 건 노조에서 승소했다고.”
“진짜야?”
찬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측에서 항소 포기했고, 해직되거나 무기한 정직된 직원들 계약직하고 프리랜서 포함 전원 즉시 복직시키는 조건 받아들이기로 했대요. 부당 전보된 사람들도 본인 의사 따라 원래 팀으로 돌아가는 걸로.”
“미쳤어, 미쳤어!”
민혜가 발을 동동 구르며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사무실 안에서 환성이 터졌다. 재희가 입가에 손가락을 대며 말을 이었다.
“고광훈하고 원종철 제외한 나머지 바언진 이사들도 오늘 전부 이사직 사임한대.”
결정권을 쥔 이사들이 전부 사임했다면, 회사가 드디어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될 것은 확실했다. 정언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이사들이? 누구 소스예요?”
“이충민 선배한테 연락받았어. 사장님은 내일부터 바로 다시 출근하신다고 그러더라고. 국장님은 지금 남미 여행 중이시라 여행 마치고 다다음주부터 나오신다고 들었어.”
“그럼, 우리 언제부터 다시 나갈 수 있는데요?”
“그건 인사위에서 통보할 거래.”
믿기지가 않았다. 프론트라인에서 방송을 만들면서도, 팀원들은 돌아가며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었다. 공판은 길고 지루했다. 민권당과 민변, 상생변에서도 도움을 주고는 있었으나 공영방송을 절대 뺏기지 않으려는 청와대와 한선당의 의지도 만만치 않았다.
때문에 더 긴 싸움을 예상한 건 사실이었다. 같은 일이 벌어진 KTBC와 IBS도 작년부터 시작된 부당 해고 관련 소송이 아직 진행 중이었다. 사측이 1심에 불복해 항소하는 바람에 YBS에서도 최소한 항소는 기본이고 대법원 상고까지 갈 각오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YBS에서 가장 먼저 백기를 들고 재심조차 포기했다는 건 좋은 신호였다. YBS 판결이 그렇다면, KTBC와 IBS 역시 사측에서 소송을 포기하거나 재심에서 노조가 승소할 확률이 높았다. 이미 바뀐 정권에서 계속 이전 스탠스를 고집하는 건 경영진에게 좋을 것이 없었다.
“이사들은 한꺼번에 그만두기로 얘기가 된 건가?”
석현이 조심스럽게 묻자 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방통위원장 교체되면서 공영방송 감사 빡세게 하겠다고 선포했잖아. 감사 시작되면 걸릴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버텼다가 못 볼 꼴 보기 전에 자진 납세하겠다 그거지.”
호형이 뭔가를 생각하다 턱을 긁적였다.
“고광훈이랑 원종철은 왜 버틴대요? 안 털릴 자신 있나?”
문 앞의 테이블 위에 걸터앉은 재희가 대답했다.
“방통위원장 갈리면서 공영방송 뺏기게 생겼으니까 한선당에서 사임하지 말라고 압박 넣었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여론이 너무 안 좋으니까. 이사들 동문회 이런 데서도 욕 많이 먹었대. 어지간한 사람은 못 버티지.”
“걔들도 결국 관두겠죠?”
“관둘 수밖에 없어. 노조에서 직원들에 대한 인격 모독하고 성희롱 건으로도 건 거 있고, 외부 용역 업체 써서 감사 사칭하고 사무실 턴 것도 걸어 놨잖아. 그것도 곧 결과 나올 거 아냐. 안 관둔대도 나머지 멀쩡한 사람들로 채우면 이사회에서 힘쓰기 어렵지. 시보국 정상화되면 더 그럴 거고.”
재희의 말을 듣고 있던 희림이 기지개를 쭉 켜며 사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드디어 지하실 안녕이네요.”
“근데 좀 시원섭섭하다. 여기도 엄청 정들었는데. 안 해 보던 거 하니까 재미도 있었고. 막상 끝낸다고 하니까 또 그러네.”
예준이 웃자 철진이 예준을 거들었다.
“그치. 댓글 다는 사람들도 대선 끝나고 그러더라. 우리 방송국으로 돌아가는 건 좋은데, 프론트라인 더 못 보게 되는 건 서운하다고.”
처음부터 시한부 프로젝트로 시작한 프론트라인 기획이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진 건 사실이었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인터넷을 할 줄 아는 사람 중 프론트라인이 뭔지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실시간으로 반응이 오는 방송은 팀원들에게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유튜브 댓글이나 SNS 팔로워들이 보내는 응원 메시지만도 하루에 적게는 수백 개, 많게는 수천 개씩이 쌓이곤 했다. 간혹 팀원들끼리 여기 익숙해지면 돌아가서 어떡하냐는 말을 농담처럼 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생각 중이야. 에서 좋았던 거 로 가져다가 도입하면 어떨까 그런 생각도 있고. 우리 본방에서도 여기서 하던 것처럼 연출 템포 더 올려서 간다든가, 방송 끝나면 유튜브나 SNS 통해서 취재 뒷얘기 더 풀어 준다든가. 뭐 이런 건 일단 나중에 생각하자고. 국장님이 메일 보내셨는데, 개편 때 분위기 싹 갈아치울 생각 하시는 것 같더라고.”
재희도 그런 부분에 대해 여러 가지로 고민했던 모양이었다. 우선 돌아가게 되면 시사보도국 전체에도, 팀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날 건 분명했다. 사무실 안에 생기가 돌았다.
“그럼 일단 부당 전보되거나 이런 사람들도 다 돌아오겠네.”
석현이 무심코 한 말에 예준이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윤을 휙 돌아보았다.
“어, 그럼 김 피디 다시 가야 되는 거 아냐?”
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윤에게 쏠렸다. 갑자기 자신에게 돌아온 화제에 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찬수가 황급히 손을 휘적거렸다.
“에이, 가긴 왜 가. 서 피디가 있는데.”
정언은 그 말에 즉시 얼굴을 구겼다.
“내가 김 피디 묶어 놨어요?”
“아아니, 뭐 그런 소리가 아니라…….”
찬수가 어물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애초에 윤이 로 오게 된 게 부당 전보 때문이었으니, 다시 돌아가겠다고 하면 막을 방법은 없었다. 내심 붙잡고 싶은 마음이야 다들 마찬가지여도 선뜻 가지 말라는 말을 꺼낼 수 없는 건 당연했다.
“저 내쫓고 싶으세요?”
윤이 묻자, 찬수가 그 말에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지, 아니지. 우리 팀에 지대한 공헌을 하는 김 피디를 어떻게 나가라고 하겠어.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냥 천년만년 우리랑 같이하자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지.”
“그러면 굴뚝에 계속 불 피우시면 될 것 같은데요.”
윤이 씩 웃고는 대답했다. 재희가 짐짓 가슴을 쓸어내리며 예준에게 면박을 주었다.
“주 피디, 말이 씨가 된다고. 그런 말은 하기 전에 잘 생각해.”
예준이 예에, 하고 말끝을 늘였다. 아무래도 조금만 더 내버려 뒀다가는 온갖 쓸데없는 소리들이 나올 것 같아, 정언은 서둘러 말을 돌렸다.
“검찰이 엄대진 구속영장 청구한 건 어떻게 됐어요?”
재희는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고는 별 의심 없이 고개를 까딱였다.
“오전 중으로 결과 나온다고 했으니까 곧.”
“되겠지?”
“공판 제출 자료만 8천 페이지가 넘는다던데. 공소시효 만료된 건 제외하고도 혐의 인정될 건이 많고 증거 인멸 정황도 확실해서 구속될 거야.”
더 볼 것도 없다는 투였다. 서온건설―엄대진 재조사 팀이 구성된 건 대선 직후였다. 모두가 예상한 대로 이정수 검사와 진형은 검사가 팀의 주축이었다. 한선당에서는 당연히 정치 보복이라며 반발했으나, 국민 여론을 꺾을 방법이 없었다.
그간 에서 관련 내용으로 취재한 자료들은 모조리 검찰에 증거로 제출되었다. 나 쪽도 마찬가지였다. 서현국 기자의 유품인 취재 자료의 사본도 전부 넘긴 뒤였다.
민주영 정부는 출범 직후 법무부장관과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검찰총장을 전부 새로 임명하며 강도 높은 검찰 개혁을 예고했다. 이미 검찰 내부 조직에 뿌리 깊게 퍼져 있는 신환석계, 정확히 말하자면 엄대진계 인사들의 제거 작업이 이루어지는 중이었다.
엄대진의 소송을 담당하고 있는 법무법인 평진 내부에서도 전관예우고 뭐고 기대하기 어렵다는 말이 나온다는 판이었다. 게다가 이규완이 한선당 내부 정보를, 채기원이 서온건설과 페이퍼컴퍼니 정보를 싹 넘긴 바람에 발을 빼기도 쉽지 않았다.
엄대진은 아직도 대부분의 혐의를 안영균의 일탈로 주장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미 검찰에서는 정보현과도 접촉을 마친 뒤였다. 정보현은 어게인라이프를 이용한 차명 계좌 관련 내용을 모두 진술했다.
언론에는 정보현이 자택에 남은 증거들을 제공했다는 정도로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녀와 안영균이 신변에 대한 협의를 어느 정도 마친 뒤, 엄대진에 대한 정보를 검찰에 모조리 넘겼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상황은 엄대진에게 사면초가였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엄대진의 구속과 중형 구형을 예상하고 있었다. 게다가 서온건설 게이트와 언론 탄압 공작, 사찰 등도 심각했지만 대중들에게 가십으로 소비되는 건 죽은 변순철 회장과 처형 변은화에 대한 엄대진의 살해 시도였다.
물론 엄대진은 혐의를 부인하고 있었으나, 가 돌아선 데다 대중들이 이미 키워 준 장인 죽이고 처형까지 죽이려던 놈이라며 손가락질하는 마당이었다. 정치적으로 엄대진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내의 엄대진계 의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선당 엄대진계 반응 어때요?”
정언이 묻자 재희가 어깨를 으쓱했다.
“몸 사릴 수밖에 없지. 이규완이 검찰에 엄청나게 협조적이잖아. 엄대진계 내부에서도 경선 때 이규완 엮는 게 아니었다고 엄대진 판단 비난하는 의원들이 많대. 반 엄대진계 쪽에서는 완전 기회지, 뭐. 한선당에서 엄대진계 완전히 쫓아내든지 분당하든지 하는 쪽도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
“이규완도 뇌물 혐의 때문에 의원직 박탈당할 가능성 높은데, 분당하면 양쪽에서 리더 없이 분당하겠네요.”
“콩가루 되는 거지, 뭐. 분당해 봐야 어차피 한 일이 년 버티다 도로 합치겠지만 돌아가는 꼴이 재밌으니까.”
강 건너 불구경하는 사람처럼 내뱉은 재희는 기지개를 켰다. 그때 재희가 옆에 놓아둔 핸드폰에서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핸드폰을 확인한 재희가 고개를 들었다.
“아, 빠르네. 인사위에서 문자 왔어.”
그 말에 다들 자기 핸드폰으로 눈을 돌렸다. 징계 대상이었던 사람들 전원에게 온 메시지였다. 바로 다음 주부터 본래 팀으로 복귀하라는 짧은 메시지를 몇 번이고 읽던 찬수가 눈가를 문질렀다.
“실감이 안 난다. 기분이 진짜 이상해. 당연히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고 온 덴데 막상 정리하려니까…….”
그 모습을 본 예준이 질색을 하며 찬수의 어깨를 쳤다.
“어어, 왜 울려고 그래요? 늙어서 감상만 늘었어, 진짜.”
웃음이 터지자 찬수가 민망한지 공연히 눈을 부라렸다.
“울긴 누가 울어, 이 새끼들이.”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푹 웃은 정언은 아 참, 하며 재희에게 물었다.
“그러면 KTBC랑 IBC는? 프론트라인 팀에서 YBS 팀들만 빠지는 거예요?”
“오늘 우리 판결났으니 그쪽 재심에도 영향 가겠지. 지금 회의 들어가서 어떻게 마무리할지 얘기해 봐야 될 것 같아. 일단 마지막 메시지 올릴 준비하고 있어.”
대선 후부터 방송국 복귀는 시간문제였다. 때문에 마지막 회에 들어갈 메시지를 미리 준비하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물론 당장 다음 주부터 복귀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마음이 바빠졌는지 어떡하지, 하며 벽에 걸린 스케줄 보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누군가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야, 강재희!”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발성이었다. 문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재희가 화들짝 놀라며 움찔했다. 한동이었다.
“깜짝이야. 부장님, 회의실 안 가고 왜…….”
안으로 들어선 한동은 다짜고짜 재희의 말을 싹둑 잘랐다.
“하여튼 내가 이 새끼 믿고 일 저질렀는데 결국 또 이렇게 된다니까.”
씩씩거리는 한동의 얼굴에 재희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팀원들의 시선이 한동에게 쏠렸다. 호사다마라더니,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싶어 덜컥 불안해졌다. 허리에 손을 짚은 한동이 잠시 숨을 고르더니 재희에게 삿대질을 했다.
“올해의 언론인상 서온건설―엄대진 게이트 보도한 팀하고 사회부 TF 공동수상이라고 연락 왔잖아! 야 이 새끼야, 넌 그 상 내 거라고 그렇게 장담을 하더니 기어이 공동수상을 가져가냐?”
심각하게 한동의 말을 듣고 있던 재희의 표정이 점점 환해졌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귀를 기울이던 팀원들이 다시 한 번 환호성을 터트렸다. 다음 순간 앉아 있던 테이블에서 풀쩍 뛰어내린 재희가 부장님, 하고 외치며 한동을 덥석 끌어안았다.
“인마, 떨어져! 징그러워!”
한동이 질색을 하며 재희를 밀어내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한동이 혀를 차고는 재희의 뒷머리를 툭툭 쳤다. 수고 많았다, 하고 툭 뱉은 한동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