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302
302화
“한겨울에 패딩 없이 길거리로 쫓겨나는 나쁜 짓 당하기 싫으면 얌전히 먹기나 해.”
느물거리는 윤의 수작을 가차 없이 자른 정언이 앞에 놓인 파스타를 먹기 시작했다. 짐짓 입을 삐죽거리자 정언이 애써 웃음을 참는 게 눈에 들어왔다. 물론 씨알도 안 먹힐 소리라는 건 알고 했지만, 백 퍼센트 농담은 아니었다.
하여튼 남의 속도 모르고, 하며 속으로 투덜거린 윤은 서둘러 파스타를 먹었다. 언제나처럼 알덴테를 살짝 넘긴 부드러운 면과 신선한 재료, 올리브 오일이 이루는 담백한 하모니는 스스로 평가하기에도 꽤 그럴듯한 것이었다. 소박하지만 여유로운 저녁의 성찬으로는 더할 나위 없었다.
짧은 식사를 마친 정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커피를 내렸다. 산미가 적고 향이 풍부한 커피는 두 사람 모두의 취향이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던 정언은 아직 젖은 머리칼이 거슬렸는지 손끝으로 무심결에 그 끝을 만지작거렸다.
그것을 본 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대 위에 놓여 있던 헤어드라이어를 가져왔다. 정언이 손을 내밀었으나 윤은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할게요.”
이런 기회는 아무 때나 오는 게 아니었다. 윤이 그런 걸 놓칠 리 없었다. 정언이 뭐라고 하기도 전, 윤은 정언의 등 뒤로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았다. 드라이어를 켜자 따뜻한 바람이 쏟아졌다. 윤은 조심스럽게 정언의 머리칼을 말리기 시작했다.
손안에서 부드러운 머리칼에 맺힌 습기가 날아가 흩어졌다. 열기 사이로 희미한 플로랄 향의 입자가 떠돌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흘러내리는 새까만 머리칼의 감각은 매번 낯설었다. 창백한 목덜미 위를 겨우 절반쯤 덮는 짧은 머리칼은 쉽게 말랐다.
손끝이 귓가며 뺨,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서늘한 체온이 닿았다 떨어졌다. 거의 다 마른 머리칼을 모아 올려 찬바람으로 마저 남은 습기를 날리는 동안, 목에서 어깨로 떨어지는 가느다란 선에 시선이 머물렀다.
윤은 쥐고 있던 머리칼을 풀어 주고는 드라이어를 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드라이어 소리가 사라진 집 안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약간 흐트러진 머리칼을 만져 마저 정리해 준 윤은 뒤에서 팔을 뻗어 정언을 안았다. 목덜미에 코끝을 살짝 부비자 정언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들이쉰 숨으로 비누 향 같은 것과 눈의 냄새가 뒤섞였다.
윤은 정언을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정언은 윤을 밀어내지 않았다. 정언의 손가락 끝이 셔츠 소매 위로 윤의 팔을 덧그리듯 천천히 움직였다. 간질간질한 감각이 좋았다. 윤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선배 머리가 더 길었으면 좋겠어요.”
“왜. 긴 머리가 취향이야?”
대수롭지 않게 되묻는 목소리에 웃음이 터졌다. 윤은 정언의 등에 이마를 대며 쿡쿡거렸다.
“아뇨. 단발이니까 너무 금방 마르잖아요. 이러고 있는 거 좋은데.”
윤은 오랫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조용하게 가라앉은 집 안에서 감각들은 예민해졌다. 윤은 나지막하게 엇갈리는 숨소리, 싱크대의 수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닫힌 창밖으로 멀리 지나는 둔탁한 자동차 소리 따위를 차례로 인식했다.
심장 뛰는 소리가 민감한 고막 위를 두드렸다. 아마 보나마나 자신의 것일 게 뻔했다. 얘는 왜 이렇게 제멋대로지, 속으로 생각했으나 이런 순간에 뜻대로 제어가 될 리 없었다.
정언 역시 그런 윤을 눈치챈 듯했다. 한동안 윤을 그대로 내버려 두던 정언이 몸을 돌려 마주 앉았다. 무릎이 닿는 거리에서 윤이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내밀자, 정언이 윤의 어깨를 잡아 멈추게 하고는 손끝으로 이마를 툭 밀었다.
“이제 정리해야 쉬지.”
푹 웃은 윤은 몸을 일으켰다. 그릇에 손을 대려는 정언을 막으며 서둘러 식탁 위와 싱크대를 치운 윤은 후다닥 설거지를 마쳤다. 찬장에 그릇과 조리도구들을 정리해 넣고 문을 닫자, 그새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정언의 모습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침대 가장자리에 앉자 정언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 잠깐 사이 깜빡 졸았던 모양이었다. 윤이 손을 뻗어 정언의 뺨을 만지자, 정언이 희미하게 웃고는 중얼거렸다.
“오늘은 진짜 피곤한데.”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얼굴에 다 적어 놨잖아.”
여상한 말에 뜨끔해진 건 어쩔 수 없었다. 일생을 포커페이스 따위와는 연 없이 살아온 윤이었다. 그렇게 티가 났나, 부질없이 자문한 윤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모른 척해 주실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알아 달라고 써 붙인 줄 알았는데?”
정언이 팔짱을 끼었다. 침대 위로 올라앉은 윤은 투정부리듯 몸을 앞으로 조금 내밀었다.
“이번 주에 처음 이렇게 둘이 있는 거 아세요? 오늘도 제가 안 쫓아왔으면 못 만났잖아요. 아직 방송 전인데 선배는 뭐가 그렇게 바쁘신데요, 속상하게.”
“김 피디는 놀고 있어, 그럼?”
“그런 건 아니지만 시보국 개편 시작하면 더 바빠지는데…….”
“그때 되면 좋든 싫든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볼 텐데 뭐가 문제야.”
“사무실에서 이러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윤의 말에 정언이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제정신이야?”
“제정신 아닌 거 아시면서.”
대꾸한 윤은 풀썩 옆으로 누웠다. 무릎을 모아 안은 정언이 그 위에 턱을 올려놓고는 모로 누운 윤을 내려다보았다. 윤은 손을 뻗어 정언의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반짝였다.
“자고 가도 돼요?”
“벌써 남의 침대에 누워서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정언이 되물었다. 윤이 여기 왔을 때부터 이미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투였다. 그건 그렇죠, 하고 뻔뻔하게 대답하자 정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윤의 어깨를 툭툭 쳐 일어나게 한 정언은 등을 떠밀었다.
“가서 씻어, 이러다 자지 말고.”
물론 윤은 그 말을 기꺼이 따랐다. 서둘러 씻고 정언의 집에 놓아둔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정언은 그새 침대에 누워 있었다. 거실의 불을 끄자 침대 옆에 켜 둔 조도 낮은 스탠드 빛이 사물의 윤곽을 슬며시 흐렸다.
윤은 비워진 침대 한쪽으로 파고들어 정언을 가만히 보았다. 베개에 오른쪽 얼굴을 파묻은 채 나른하게 자신을 마주 보는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윤은 손끝으로 정언의 뺨과 머리칼을 만지며 속삭이듯 물었다.
“내일도 바쁘세요? 사무실 출근하시려고요?”
정언은 그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내일은 쉬려고.”
말끝이 이미 잠겨들고 있었다. 긴장했다는 소리가 빈말은 아니었던 듯했다. 눈을 깜빡이는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윤은 그 얼굴에 낮게 웃었다.
“선배 벌써 졸린데요?”
“말했잖아, 피곤하다고.”
“조금만 놀아 주시면 안 돼요?”
윤이 한 뼘 더 가까워진 통에 시트가 바스락대는 소리를 냈다. 윤을 빤히 응시하던 정언이 윤의 코끝을 가볍게 쥐고 흔들었다.
“나 빨리 쉬어야 되니까 집에서 저녁 먹자면서?”
그 말에 뜨끔해진 윤이 입을 다물자 정언이 작게 하품을 하고는 눈가를 찡그렸다.
“노는 건 내일 합시다, 김 피디님.”
“여기서는 이름 불러 주기로 하셨잖아요. 선배가 김 피디라고 부를 때마다 무슨 말을 못 하겠어요.”
윤이 투덜거리자 정언이 픽 웃는 소리를 냈다.
“그런 것치고는 하고 싶은 말 다 하잖아. 무슨 말을 더 하고 싶은데.”
“알고 싶으세요?”
“아니.”
잠이 묻은 목소리로도 정언은 단호하게 그 말을 거절했다. 웃음이 터진 윤은 몸을 반쯤 일으켜 정언에게 입을 맞췄다. 연신 쪽쪽대며 귀찮게 굴자, 몇 번 밀어내는 시늉을 하던 정언은 결국 포기한 듯 한숨을 쉬고는 윤을 마주 보았다.
“김윤, 까불래?”
“저 아직 시작도 안 했어요.”
그 말에 정언이 애써 터지려는 웃음을 참는 게 빤한 얼굴로 엄하게 내뱉었다.
“계속 기어오르지?”
“진짜 기어오르는 거 뭔지 보여드려요?”
순식간에 양팔을 짚어 정언을 가두며 위에서 내려다보자, 정언의 창백한 얼굴 위로 어둡게 그늘이 졌다. 그렇지 않아도 희미한 표정들은 쉽게 그림자 속으로 숨겨졌다. 윤은 물끄러미 그 어둠 속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래서 윤을 올려다보던 정언이 곧 낮게 웃었다. 윤이 왜요, 하고 묻자 정언이 대답 대신 윤의 얼굴을 만졌다. 서늘한 손가락이 이마와 눈썹, 눈가와 뺨을 덧그리다 내려와 입술에 머물렀다.
얇고 민감한 피부 위로 스치듯 천천히 움직이는 손끝에, 윤은 더 참지 못하고 정언의 손을 쥐었다. 입술 사이에서 스미는 숨이 달떴다. 정언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하여튼 진짜 쓸데없이 잘생겼어.”
“오늘 무슨 날이에요?”
안 하던 소리를 오늘따라 자주 하는 걸 보니 내 생일이었나, 하고 머릿속을 되짚어 보았으나 생일까지는 아직도 한참이었다. 그 말에 기어이 정언에게서 웃음이 터졌다. 휘어지는 눈가에, 그새 빨개진 귀 끝에, 다시 입술 위에 가벼운 키스를 건넨 윤은 입술을 댄 채 속삭였다.
“선배는 선배가 예쁘다는 거 왜 모르시는지 가끔 진짜 궁금하던데.”
“본인 눈에나 그렇다는 건 알고?”
숨소리로 돌아온 질문에 윤은 정언의 목덜미로 얼굴을 파묻으며 대답했다.
“진짜 제 눈에만 그러면 좋겠는데 아니라서 미치겠다니까요.”
정언의 손끝이 뒷머리를 감싸 왔다.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귓가에서 흩어졌다. 윤은 손을 뻗어 스탠드를 마저 껐다. 미처 커튼을 치지 못한 창밖에서 도시의 불빛이 흘러들었다. 충분히 밝은 것 같았고, 또 충분히 어두운 것처럼도 느껴졌다. 어느 쪽이든 좋았다.
* * *
“이따 점심엔 뭐 먹지? 어우, 누가 아침마다 점심, 저녁 메뉴 좀 정해 줬으면 좋겠어.”
예준이 기지개를 켜며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그 말에 호형이 그러니까요, 하고 맞장구를 쳤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서류를 보고 있던 재희가 고개를 들며 대꾸했다.
“그러라고 구내식당 있는 거 아냐.”
“아, 그래도요. 가끔 나가서 먹고 싶은데 그때마다…….”
항변하는 호형은 아랑곳 않고 재희가 안경을 고쳐 쓰더니 문 쪽을 가리키며 말을 끊었다.
“지금 누가 계속 앞에서 기웃거리지 않아? 문 좀 열어 줘 봐.”
그 말에 윤은 무심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재희의 말대로 누가 사무실 앞에서 연신 서성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호형이 쪼르르 뛰어가 문을 열었다. 처음 보는 남자 두 사람이 양손에 뭔가를 잔뜩 들고 서 있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어, 하며 얼른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시죠?”
당황한 호형이 앞을 막자, 대답 대신 한 남자가 되물었다.
“서정언 피디님 안에 계십니까?”
뜬금없이 정언을 찾는 통에 멈칫한 윤은 몸을 젖혀 그쪽을 보았다. 기억을 더듬어 봐도 누구인지 영 생각이 나지 않았다. 호형이 약간 경계하는 얼굴로 남자들을 훑어보았다.
“지금 외근 나갔는데요. 누구시죠?”
“아, 저희 배우 한승주 씨 매니저인데요.”
남자가 황급히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명함을 받아 든 호형이 한승주, 하고 중얼거리더니 곧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한승주라면 요즘 한창 잘나가는 젊은 배우였다. 무명 아이돌 그룹의 멤버였던 한승주는 재작년 오디션으로 한 드라마의 조연에 캐스팅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두 작품 만에 주연으로 올라와, 요즘은 가장 핫한 남자 배우 반열에 늘 이름을 올리는 편이었다.
에서 개편 방향이 결정된 이후 가장 먼저 다루기로 한 아이템은 사내 미술센터 비정규직들의 실태였다. 900회 방송을 진행하면서 스튜디오 세트를 설치할 때 재희가 센터장과 이 부분에 대해 방송에 내보내 주기로 약속을 한 까닭이었다.
회사가 정상화되어 가고는 있었으나 아직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다른 방송국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최근 한 케이블 방송사에서 스탭이 무리한 스케줄에 세트를 서둘러 설치하다 큰 사고가 발생한 적도 있어, 한 번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고 얘기가 된 터였다.
이 아이템에 대해 회의를 하던 도중 방송계 전반에 걸친 부당 계약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고, 정언이 그 아이템을 맡기로 해서 취재 중이었다. 오늘 오전 외근도 그 때문이었다.
한승주는 정언의 취재원 중 하나였다. 아이돌 활동 당시 계약한 회사가 블랙기업이라, 부당 계약 사례에 대해 수소문하던 중 한 예능국 피디가 소개해 준 것이었다.
서브인 윤도 당연히 취재 내용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윤이 알기로는 정언이 한승주를 취재로 만난 건 두 번뿐이었다. 정언의 성격상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거나 했을 리도 없었다. 때문에 굳이 왜 사무실까지 매니저들이 정언을 찾아왔는지는 모를 노릇이었다.
매니저들이 사무실 안에 들고 온 물건들을 내려놓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승주 씨가 서정언 피디님 팀에 이것 좀 갖다드리라고 해서요. 이번에 저희 촬영팀에 돌린 건데, 저번에 감사했다고 이 팀에도 꼭 좀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 네.”
호형이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하자 매니저들은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다시 한 번 인사를 하며 사라졌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팀원들이 몰려들었다.
“이게 뭐야?”
철진이 기웃거리며 묻자 그새 쭈그리고 앉아 쇼핑백을 뒤적이던 성옥이 고개를 들었다.
“도시락인데요.”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