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304
304화
“뭘?”
의아한 얼굴로 윤을 돌아본 정언이 미간을 찌푸렸다.
“잘생겼단 소리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듣지 않았어?”
“선배한테 듣는 건 다르단 말이에요.”
윤이 조르자 정언이 윤의 이마를 손끝으로 톡톡 밀었다.
“아주 잘생긴 김윤 피디님, 도시락 하나 가지고 이러지 말고 본인 사내 메일로 쏟아지는 팬레터나 어떻게 좀 하시죠.”
그 말에 멈칫한 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900회 방송에 나간 후로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던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주목받는 건 체질에 맞지 않다 보니, 남들의 그런 관심이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방송 때도 다른 피디들에 비해 윤은 출연 빈도가 확연히 적었다.
그러나 아무리 적게 나와도 귀신같이 알아보고 캡처를 올리며 팬레터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부분 의례적으로 감사하다는 짧은 답장을 보내는 게 전부였는데, 정언이 그걸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거 신경 쓰고 계셨어요?”
윤의 놀란 얼굴에 정언이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그렇다고 하면 기분 좋아지겠지?”
“네.”
윤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할 시간 따위는 전혀 필요 없는 질문이었다.
“거짓말은 안 하는 거야, 못 하는 거야?”
“둘 다요.”
“솔직해서 좋네.”
반쯤 포기했다는 투였으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차에서 내린 정언은 문을 닫기 전 윤에게 말했다.
“얼른 들어가. 전화할게.”
손가락으로 전화하자는 제스처를 해 보인 정언이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윤은 곧 핸들 위로 엎드리며 한숨을 참았다. 너무 좋아하는 게 문제일까. 예민해지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날이 서는 신경이 까끌거렸다.
* * *
시동을 끈 정언은 짧게 진동하는 핸드폰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조수석에 던져 놓은 핸드폰 액정에 메시지 미리보기 창이 떠 있었다. 누군가 싶어 핸드폰을 집어 든 정언의 얼굴이 곧 굳어졌다.
― 피디님 오늘이나 내일 시간 괜찮으면 저녁 먹을래요?
한승주.
지난번 도시락 건 이후로 거의 매일 한승주에게 연락이 오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간단한 안부 문자라 그러려니 했는데, 최근 들어 이상하게 스케줄을 묻는다거나 사적인 질문을 하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바빴다거나 메시지를 못 봤다는 핑계로 적당히 답을 피하곤 했으나, 그런 변명을 매번 써먹는 건 불가능했다. 때문에 한승주의 연락에 대처하는 일도 은근히 스트레스가 되고 있었다.
사적으로 만난 사이라면 칼같이 차단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연예인에 취재원이었다. 한승주가 한창 잘나가는 연예인이다 보니 화제성 때문에라도 포기하기 어려웠고, 소개해 준 사람도 끼어 있다 보니 상황이 난처했다.
연락하지 말아 달라고 직접 말하기에는 자의식 과잉 같은 기분이 들어 망설여지는 것도 있었다. 윤이 예민하게 굴며 넘겨짚은 것처럼 한승주가 다른 속셈이 있다고는 쉽게 생각할 수 없기는 했다.
입봉 초반에는 어린 여자다 보니 취재원으로 만난 사람들이 추근대는 경우가 많았고, 그런 일에는 이골이 나 있었지만 이번 상대는 종류가 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제 겨우 스물넷 먹은 연예인이 자기보다 나이도 한참 많은 시사 프로그램 피디에게 집적거릴 만한 이유가 없었다.
얜 애정결핍이야 뭐야,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짧은 한숨을 쉰 정언은 눈썹 위를 문질렀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내내 태도가 사근사근했고, 날카로운 인상에 비해 붙임성이 좋은 느낌이기는 했다. 소문이 안 좋다는 건 나중에 알았지만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원래 성격이 그런 거겠지, 애써 생각하며 정언은 차에서 내려 사무실로 올라갔다.
윤은 취재 때문에 오후 외근이 있어 자리를 비운 채였다. 정언이 자리에 앉자 민혜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정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정언, 얼굴이 왜 그래?”
“얼굴이 왜요?”
“누가 봐도 심란해 보여.”
하여튼 눈치들은 귀신이었다. 정언은 손사래를 치며 민혜의 말을 부정했다.
“아냐, 아냐. 아무 일 없어요. 심란은 무슨.”
“한승주한테 연락 계속 오니?”
어디 CCTV라도 달아 놨나 싶었다. 회의 도중 한승주에게 연락이 오는 걸 몇 번인가 본 까닭에 넘겨짚은 듯했다. 처음에는 귀엽다고 넘기던 민혜도 빈도수가 잦아지니 뭔가 낌새가 이상한 모양이었다. 멈칫한 정언이 민혜를 마주 보자 민혜가 목소리를 낮췄다.
“걔 소문이 진짜 영 별로더라. 원래 여자 스탭들한테 누나 누나 하면서 잘 살살거리는데 그러다 따로 만나자고 하고, 몇 번 자면 연락 끊고 그런다고. 자기보다 나이 많고 그러면 돈 안 써도 되고 귀찮게 안 굴어서 좋다 그런 소리 대놓고 하고 다닌대. 술버릇 나쁘다는 소문도 많고.”
감이 좋은 민혜가 뒷소문까지 알아봤을 정도라면 어지간히 마음에 걸려서였을 게 분명했다. 모두가 이렇게 자의식 과잉의 길로 가는 건가, 혼자 생각한 정언은 귀찮다는 투로 대꾸했다.
“사생활까지 내가 알 바는 아니죠, 뭐. 취재하려고 만난 거고 얼굴 본 적 두 번밖에 없는데. 걔도 생각이 있으면 설마 나한테 그러겠어?”
“생각이 있는 놈 같으면 자기 취재하러 온 피디한테 그렇게 연락을 안 해. 오늘은 뭐라고 그래? 시간 있냐고? 만나자고 그런 소리는 안 해?”
민혜가 소곤거리며 정언을 다그쳤다. 정언이 됐다며 손을 내젓자 눈을 흘긴 민혜가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속삭였다.
“김 피디한테 얘기했어? 걔가 그런다고?”
“그런 얘길 왜 해요.”
안 그래도 한승주에게 신경과민 수준인 윤이었다. 한승주가 이러고 있는 걸 안다면 어떻게 될지 눈에 선해 머리가 지끈거렸다. 민혜가 옆구리를 찌르며 정언을 나무랐다.
“무슨 일 있을지 모르는데 얘기해 놔. 나 이상하게 걔 영 느낌이 안 좋아.”
“연예인이에요, 연예인. 말 나올 일 안 하게 처신 알아서 하겠지. 신경 안 써도 돼요.”
정언은 민혜의 말을 자르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아이 정말, 하고 투덜거린 민혜도 더 이상 말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았는지 몸을 다시 집어넣었다.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그런 말을 듣고서도 아무렇지 않을 리 없었다. 꺼진 핸드폰 액정 위를 손끝으로 두드리던 정언은 결국 한승주의 메시지에 답하는 걸 포기했다. 그냥 적당히 넘길 생각이었다. 그러나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결국 식사도 거른 채 책상 앞에 앉은 정언은 에서 넘어온 취재 자료를 저녁 내내 읽었다. 엔터계 부당 계약 건 말고도 지금 거의 막바지까지 온 엄대진 공판 관련 건도 계속 팔로우하고 있어야 해서, 아직 방송 전인데도 일이 많았다.
엄대진 공판은 일주일에 서너 번 이상이 진행되는 하드한 스케줄인 데다 내용도 방대했다. 하루라도 밀렸다가는 일이 몇 배였다. 이번 주에는 취재 때문에 외근이 많아 읽지 못한 자료들이 한가득했다.
윤에게 전화가 온 건 밤 열 시가 가까워서였다. 원래 법률 자문을 저녁에 만나기로 했는데, 스케줄이 밀려 지금 취재가 끝났다는 것이었다.
“늦었네. 거기서 그냥 퇴근해.”
정언의 말에 핸드폰 너머에서 윤이 물었다.
『선배는요? 지금 어디신데요?』
“사무실. 이번 주 엄대진 공판 자료 체크하는 중이야. 이거 보고 바로 가려고.”
『내용 많잖아요. 저 사무실 다시 들어갔다 갈게요.』
괜찮다고 말하기도 전, 전화가 끊어졌다. 더 말해 봐야 그냥 퇴근하라고 할 게 뻔하니 아예 안 듣고 끊은 모양이었다. 하여튼 점점 요령만 늘어, 하고 투덜거린 정언은 고개를 잠시 뒤로 젖혔다.
텅 빈 사무실이 고요했다. 재희는 선경과 할 얘기가 있다며 저녁 내내 자리를 비웠고, 나머지 팀원들은 퇴근하거나 출장을 간 뒤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 한 잔을 내린 정언은 창가에 서서 바깥의 풍경에 눈을 주었다. 머릿속이 복잡한 기분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던 건지, 등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깜짝 놀라 돌아보자 막 사무실로 들어온 윤이 눈을 마주치고는 웃었다. 정언은 벽에 걸린 시계로 눈을 주었다. 적어도 삼십 분은 넋을 놓고 있었다는 걸 깨닫자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냐. 좀 피곤해서 커피 한잔한 거야.”
윤의 말에 최대한 감정을 누르며 여상하게 대답한 정언은 자리로 돌아왔다. 윤이 정언의 책상 위에 쌓인 자료를 절반 덜어 자기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저녁 드셨어요?”
“그냥 대충.”
적당히 둘러댄 정언은 서둘러 자료로 눈을 돌렸다. 차라리 이럴 땐 아무 생각 없이 일하는 게 편했다. 산더미같이 쌓였던 자료들을 전부 체크하고 마지막 장을 밀어 놓자, 벌써 새벽 한 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김 피디, 그만하고 가자. 남은 건 내일 보고.”
“잠깐만요. 십 분만 더 있으면 다 볼 것 같아서요.”
윤이 피곤해 보이는 눈가를 누르며 대답했다. 정언이 뭐라고 하려는데,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 전화를 할 만한 사람이 생각나지 않았다. 정언은 뭐지, 하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효명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정언은 앞뒤 잴 것도 없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네, 서정언입니다. 누구…….”
『아직 안 자요?』
말을 채 끝맺기도 전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었다. 정언은 핸드폰을 귀에서 떼며 번호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저장한 적이 없는 번호였다. 전화를 잘못 건 건가 싶어 정언은 미간을 찌푸렸다.
“누구시죠?”
정언의 물음에 건너편에서 아, 하며 웃는 소리가 났다.
『나 한승주예요. 이거 내 개인 폰이라 번호 모르는구나.』
잘못 걸렸다는 생각이 든 건 그때였다. 원래 연락하던 번호로는 계속 답을 피한다는 걸 눈치채고 일부러 모르는 번호로 연락한 게 분명했다. 정언은 아 네, 하고 건성으로 대답하며 이 끝으로 입술 위를 눌렀다. 이 시간의 전화는 확실히 이상했다.
『오후에 연락했었는데 못 받았어요?』
존대를 쓰긴 하는데 묘하게 맞먹는 듯한 말투가 거슬렸다. 취재 때는 깍듯한 태도였기에 더 그랬다. 정언은 최대한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스케줄 때문에 일일이 확인을 못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뇨, 아뇨. 죄송할 건 없고요. 시간 되면 모레 시사회 보러 올래요? 나 영화 개봉하거든요. 피디님 주려고 VIP 시사 티켓 남겨 놨는데.』
성질 같아서는 이 새끼가 언제 날 봤다고, 하고 한마디 내뱉고 싶은 기분이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윤이 고개를 들어 정언을 보았다.
“저희가 취재 스케줄이 풀이라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말씀은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한데 시간이 너무 늦어서요.”
『아, 그쵸?』
“전화 끊겠습니다.”
바로 통화를 종료한 정언은 관자놀이 부근을 눌렀다. 지금까지 온 연락에 대한 답도 늘 사무적이었는데, 눈치가 없는 건지 없는 척을 하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윤이 굳은 얼굴로 정언에게 물었다.
“뭐예요?”
“아무것도 아냐.”
“누군데 그러세요?”
정언이 대답 대신 가벼운 한숨을 쉬자 윤이 재차 정언을 다그쳤다.
“설마 한승주예요?”
눈치 빠른 사람이 너무 많은 것도 피곤했다. 침묵이 긍정이라는 걸 바로 알아차린 윤이 기가 막힌다는 투로 내뱉었다.
“그 새끼 미쳤어요? 뭐래요? 대체 무슨 중요한 용건이 있어서 이 시간에 전화를 해요?”
어지간하면 윤의 입에서 안 나오는 단어들이었다. 윤이 이미 화가 났다는 걸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정언은 서둘러 대답했다.
“별 얘기 아니었어. 자기 영화 개봉한다고 시사회 보러 올 수 있냐고 물어본 거야.”
“그 소리 하려고 전화했다고요? 이 시간에?”
되물은 윤은 잠깐 말이 없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선배 연락처는 어떻게 알았대요?”
“인터뷰 딸 때 명함 줬는데 그거 보고 했겠지.”
정언은 최대한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 잠시 사이를 둔 윤이 정언을 마주 보았다.
“한승주한테 연락 온 거 처음 아니죠?”
정언은 그 말에 멈칫했다. 윤이 신경 쓸 게 눈에 보여 지금까지 숨겼는데, 윤이 그걸 눈치채면 몇 배로 더 화를 낼 게 뻔한 탓이었다. 이미 확신하고 던진 질문인 듯 윤은 정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이유가 뭔데요? 연락해서 대체 뭐라고 해요?”
“별거 아냐. 그냥 안부 문자야. 전화한 건 처음이고.”
어울리지도 않게 변명하는 느낌이라 문득 심장이 서늘해졌다. 윤이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경우는 정말 드물었다. 유독 한승주에게 이렇게 반응하는 건 이상했다. 정언은 의자를 돌려 윤과 마주 앉았다. 시선을 내린 윤의 입매가 고집스럽게 다물린 걸 보니 단단히 마음이 상한 모양이었다.
“원래 피디들한테 영업 잘 하는 스타일 있잖아. 정말 별거 아냐. 왜 그렇게 신경을 써.”
답지 않게 애써 윤을 달래듯 말하자, 한동안 말이 없던 윤이 툭 뱉었다.
“그 자식 기분 나빠요.”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