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305
305화
그 새끼에서 그 자식이 된 걸 보니 조금 가라앉기는 했나 싶었다. 정언이 피식 웃자 윤이 정색했다.
“웃지 마세요, 진짜예요.”
“드라마 그만 봐야겠네. 김 피디가 상상하는 그런 일은 드라마에서나 일어나는 거 알지?”
장난스럽게 넘기려 했으나 윤은 심각했다.
“현실보다 더한 픽션 보신 적 있고요?”
물론 분명 이상한 상황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자신 쪽에서 선을 그으면 될 문제였다. 정언은 윤을 가만히 보다 대답했다.
“김 피디가 머릿속에서 드라마 안 찍어도 내 인생 충분히 드라마틱해.”
“선배.”
“완벽한 남자 주인공도 있고.”
덧붙인 말에 윤이 입을 다물었다. 공연히 윤을 더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정언은 윤의 뺨을 툭툭 두드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질투하니까 귀여운데, 상상은 거기까지 해. 극본 공모전 참가시키기 전에. 그만하고 집에 가자.”
아무래도 말이 길어지면 안 될 것 같았다. 뭐라고 말하려던 윤이 할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언이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는 사이,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희인가 싶어 정언은 고개도 들지 않고 윤에게 말했다.
“김 피디, 문 좀 열어 줘.”
재희답지 않게 출입증을 두고 갔나 막 생각한 찰나였다. 윤이 문을 열기 무섭게 들려온 목소리에 정언은 저도 모르게 손을 멈췄다.
“서정언 피디님 있어요? 잠깐 인사하러 왔는데요.”
한승주였다. 문 앞에 선 윤을 빤히 바라보던 승주가 어깨 너머로 정언을 발견하고는 아, 하며 손을 흔들었다.
미치고 팔짝 뛰겠다는 관용구의 뜻을 정언은 그 순간 완벽하게 이해했다. 윤을 겨우 달래 놨더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정말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진짜 바빴던 거 맞구나. 핑계인 줄 알았는데.”
잘생겼다며 난리라는 그 얼굴이 씩 웃는 게 결코 반갑지 않았다. 정언은 애써 머릿속을 정리하며 승주를 마주 보았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승주가 빙글거렸다.
“ 사무실은 항상 사람 있다고 해서 지나가다 들렀거든요. 피디님이 진짜 퇴근 안 했어도 시간 늦어서 혼자 있을 줄 알았는데.”
“아, 네. 이쪽은 저희 팀 김윤 피디라고…….”
“이거요.”
정언이 등 뒤의 윤을 가리켰으나, 승주는 바로 그 말을 끊으며 재킷 주머니에서 티켓 두 장을 꺼내 정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정언의 책상 위에 티켓을 밀어 놓은 승주가 고개를 까딱였다.
“아까 말한 시사회 티켓.”
“괜찮다고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부담 갖지 마요. 바쁜 거 아니까. 내가 피디님 팬이라서 주는 거예요.”
당황한 정언은 뭐라고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완전히 굳은 표정으로 이쪽을 뚫어지게 보는 윤을 보자마자 두통이 밀려들었다. 평소의 해사함이 싹 사라진 얼굴에 도는 냉기에 저도 모르게 오한이 들 지경이었다.
“여기 어떻게 올라오셨죠?”
정언의 물음에 승주가 민혜의 책상에 걸터앉더니 옷 안에 걸고 있던 출입증을 꺼내 보였다.
“아래서 촬영하고 있거든요. 아무도 안 막던데, 왜요?”
출입증이 있으면 방송국 안 어디든 돌아다니는 것 자체는 가능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경우는 정말 처음이었다. 예능국이나 드라마국, 라디오국이라면 그러려니 할 테고 교양국까지도 어떻게 커버할 수 있겠지만, 시보국 한복판에서 돌아다니는 연예인이라니, 이건 아무래도 이상한 그림이었다.
“와인 좋아하시나? 다음에 시간 될 때 제가 근사한 데 소개할게요. 여지흔 형 알죠? 그 형이 한남동에서 와인바 하거든요. 루프탑이 진짜 멋있어요.”
남의 속이야 알 바 아닌 듯 승주가 씩 웃었다. 어디서 들어 본 이름 같긴 했지만, 드라마와 연이 없는 정언은 여지흔이 누군지 알지 못했다. 설령 안다 해도 그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생판 모르는 인간이 루프탑 와인바를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싶어 슬슬 짜증이 났다.
“죄송한데 지금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은데요. 그리고 시보국 사무실은 중요한 자료가 많아서 원칙적으로 외부인 출입이 안 되고요. 취재 관련해서 얘기하실 게 있으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시죠.”
최대한 정중한 태도를 유지하며 말하자, 승주가 그제야 윤과 정언을 번갈아 보았다.
“아, 네. 퇴근하시나 보네. 내가 눈치 없었죠?”
앉아 있던 책상에서 내려온 승주가 윤을 지나쳐 나가다 말고 손을 흔들었다.
“다음엔 사람 없을 때 와야겠다. 연락할게요.”
그 모습이 사라지기 무섭게 현기증이 났다. 황급히 사무실 불을 끈 정언은 윤을 끌고 서둘러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윤의 얼굴이 영 심상치 않았다. 정언을 자기 차에 태워 데려다주는 내내 한마디도 없던 윤이 정언의 오피스텔 주차장에 차를 세우며 시동을 껐다.
도어록을 풀어 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앞창 너머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얼굴을 흘끔 본 정언은 속으로 한숨이 나오는 걸 눌러 참았다. 잘못한 거 하나 없이 눈치를 보자니 그것도 못 할 짓이었다. 한참 말이 없던 윤이 입을 열었다.
“그 자식 도대체 뭐예요?”
“신경 쓰지 마.”
정언은 미간을 누르며 대답했다. 물론 윤이 이미 신경 쓰기 시작한 지금 상황에서는 부질없는 소리였다. 윤이 재차 물었다.
“말하는 게 이상하잖아요. 아까 연락 와서 뭐라고 했는데요.”
“별 얘기 아니었다고.”
정언의 태도가 방어적이라는 걸 알아차린 듯, 윤이 낮은 한숨을 뱉었다.
“선배 태도에 문제 있다는 말 아니에요. 그렇게까지 하는데 왜 집적거리냐고요.”
“워딩 조심해.”
정언은 바로 윤의 말을 막았다. 생각은 언제나 단어로 표현되는 순간 더 명료해지기 마련이었다. 그런 단어를 쓰는 건 지금 윤에게 도움 될 게 하나도 없었다. 정언은 가능한 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취재 때문에 만난 게 전부고, 내가 개인적인 연락 한 적도 없고, 한승주도 그냥 인사하려고 온 거고. 그게 다야.”
“그게 다라고요?”
윤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물론 방금 한 말에 거짓은 없었다. 안 그래도 피곤했고 늦은 시간이었다. 윤과 이런 일로 실랑이하는 게 정언에게도 즐거울 리 없었다.
“그럼 뭔데?”
“의도가 있잖아요! 선배가 선 긋는데도 시사회 티켓 떠맡기고, 일부러 개인 번호로 연락하고, 사무실에 찾아와서 사람 없을 때 오겠다는 둥 하는데 그게 진짜 아무 생각 없어서 그러는 것 같으세요?”
윤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아까처럼 적당히 넘어가기에는 이미 틀렸다는 걸 직감하자, 정언 역시 이 상황이 짜증스러워졌다.
“무슨 의도? 걔 연예인이야, 난 그냥 시사 프로 피디고. 누가 봐도 말 안 돼. 아무도 오해 안 한다고.”
“말이 되든 안 되든 저 이 상황 기분 나쁘다고요. 말하는 거 못 들으셨어요? 저 없었으면 뭐 어쩌려고 그러는 건데요? 이 시간에 누가 지나가다 시보국 사무실을 들러요?”
윤의 말이 점점 빨라졌다. 한동안 잠잠했던 두통이 밀려들었다. 정언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잠시 숨을 고르던 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선배는 본인이 남자들한테 어떻게 보이는지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 아세요?”
“남자? 미쳤어? 걔 스물넷이야. 나 대학 들어갔을 때 아직 초등학생이었다고.”
입사했을 때부터 선배 알기를 우습게 안다고 욕먹은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몇 살이 많아도 하는 짓이 유치하면 남자는커녕 선배로도 보지 않는 건 천성이었다. 그러니 연하를 연애 상대로 보는 건 윤 이전에는 상상도 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스물넷은 연하라고 치기도 힘들 만큼 까마득한 어린애였다. 윤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유가 뭔가 싶어 슬슬 열이 올랐다. 기가 막힌다는 정언의 태도에 윤이 대꾸했다.
“열네 살도 아니고 뭐가 문젠데요.”
“문제없으면 뭐, 내가 걔 만나야 돼? 연락이라도 해?”
“선배.”
“나 지금 이 상황을 김 피디한테 구구절절 설명해야 된다는 거 자체가 이해 안 가. 뭐가 문제야? 뭐하자는 건데, 이게? 며칠째 걔 때문에 예민해져서 사람 신경 쓰이게 만들더니, 스물네 살짜리 애 가지고 다른 남자 운운하는 게 말이 돼?”
지금 이상으로 뭘 어떻게 더 하라는 건가 싶어 화가 났다. 애초에 여지를 준 적도 없었고, 멋대로 군 건 한승주 쪽이었다. 모르는 번호로 새벽에 전화를 건 것도 모자라 사무실까지 쳐들어올 줄 알았다면 진작 자리를 피했을 터였다.
“문 열어. 피곤해.”
정언이 내뱉은 말에 입술을 깨물고 있던 윤이 도어록 오픈 버튼을 눌렀다. 차 문을 열고 내린 정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입구로 걸어갔다. 채 몇 걸음을 떼기도 전 팔을 잡혀 돌려세워진 건 다음 순간이었다. 눈을 들자 전에 없이 날카로워진 윤의 눈동자가 시선을 맞춰 왔다.
이게 뭔가 생각하기도 전 몸이 그대로 떠밀렸다. 윤의 차 뒷문에 등이 가볍게 부딪쳤다. 아프지는 않았으나 돌발적인 행동에 당황해 얼굴이 찌푸려졌다.
김 피디, 하고 입을 열었으나 정언은 그 말도 끝까지 하지 못했다. 윤이 갑자기 입을 맞춰 온 탓이었다.
놀란 정언은 윤을 밀어내려 했으나, 양 뺨을 감싼 윤의 손은 완강했다. 뭐라고 할 틈도 없이 단번에 호흡을 빼앗은 윤이 입 안을 헤집었다. 물러날 곳도 없이 붙들고 밀어붙이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군 적이 없는 윤이었다. 숨이 막혀 윤의 어깨를 치자 윤이 그제야 간신히 정언을 놓아주었다. 정언은 멍한 머릿속으로 눈가를 찡그리며 윤을 쳐다보았다.
“김 피디, 지금 이게…….”
평소와 너무 다른 태도에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윤이 자동차 루프 부근으로 손을 짚어 정언을 가두며 숨을 몰아쉬었다. 하얀 얼굴이 상기된 채였다. 이 끝으로 입술을 눌러 물고 잘근거리던 윤이 입을 열었다.
“……걔가 스물넷 아니었으면 상관없어요?”
“뭐?”
“선배한테 남자로 보이는 나이였으면 괜찮은 거냐고요.”
“무슨 생각하는 거야, 도대체?”
기가 차서 묻자 윤이 진심으로 화가 난 표정을 했다.
“저도 미치겠어요, 진짜!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어요? 다른 남자가 선배한테 이러는 거 제가 그냥 보고 있어야 돼요? 이딴 식으로 눈에 뻔히 보이는 수작 거는데도 신경 쓰지 말라고요? 죄송하지만 저 그렇게 관대한 남자 아니거든요.”
늘 생글거리던 윤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아버지 일을 숨긴 걸 알았을 때조차 화를 내지 않았던 윤이었다. 하다못해 자신이 그렇게 오래 좋아한 재희에게도 이런 식으로 군 적이 없었다. 유독 한승주에게만 이렇게 예민한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소문이 안 좋다고 신신당부하던 민혜가 퍼뜩 떠올랐다. 설마 윤이 그 얘기를 알아서 더 이렇게 구는 건가 싶었으나, 그렇다고 자기 입으로 그래서냐고 묻는 건 위험했다. 정말 그래서라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윤이 만약 몰랐다면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꼴일 게 뻔해서였다.
머릿속이 아무렇게나 휘감아 던진 철사 뭉치처럼 복잡하게 뒤엉켰다. 두 사람 모두 잠시 말이 없었다. 사이로 정적이 지났다. 새벽의 주차장은 고요했다. 실은 몇 분쯤이겠지만 몇십 분처럼 느껴지는 침묵을 먼저 깬 쪽은 윤이었다.
“제가 선배 더 좋아하니까 저 이해 못 하시는 거 알아요.”
광량이 부족한 주차장의 조명 아래서 경계를 흐리는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 눈썹 위를 두어 번 문지른 정언은 한숨처럼 내뱉었다.
“정말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신경 쓸 일 아니라고 했잖아. 이게 지금 이럴 일이야? 내 성격 몰라? 김 피디 안 좋아했으면 애초에 끊었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고. 내가 덜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아? 물어본 적은 있고?”
“물어봤으면 제가 원하는 대답 들을 수는 있어요?”
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멈칫한 정언은 윤을 빤히 보았다. 루프 부근을 짚은 윤의 손끝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선배 어떤 사람인지 알고 좋아했고, 선배 바꾸려는 생각 없어요. 어떻게 해 달라는 거 아니에요. 그냥 화가 나서 미치겠는데…… 그 자식이 선배 몇 번이나 봤다고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도 짜증나고, 저 지금 이렇게 유치하게 구는 것도 짜증나요. 그런데 진짜 짜증나는 게 뭔지 아세요? 제가 그 자식 무시 못 하고 선배 앞에서 이따위로 굴고 있는 거예요.”
한쪽 손으로 눈가를 덮은 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절반만 드러난 얼굴로는 그 표정을 알 수 없었다. 정언은 멍하니 그런 윤을 보았다. 한참 그러고 있던 윤이 정언을 외면하며 정언을 가두고 있던 손을 뗐다.
“……죄송해요. 그만 들어가세요. 저 선배랑 더 있으면 진짜 한심한 꼴 보일 것 같아요.”
정언은 김 피디, 하고 부르며 윤의 팔을 잡았다. 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을 맞추지 않는 윤을 보니 오늘은 아무래도 안 될 듯싶었다.
“얼른 들어가서 자. 나중에 다시 얘기해.”
화를 낼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굴어 놓고 자기가 더 불안해하는 얼굴을 보자 맥이 풀렸다. 나지막하게 말하자 네, 하고 조그맣게 대답한 윤이 다시 차를 탔다. 주저하던 윤이 겨우 시동을 걸었다. 정언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손을 올려 이마를 짚었다. 잠은 이미 싹 달아난 뒤였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