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307
307화
핸드폰으로 메시지가 들어왔다. 승주가 사적으로 쓴다는 번호로 보낸 것이었다. 주소는 한남동으로 되어 있었다. 피스 오브 케이크(piece of cake). 낯선 상호를 입 안으로 뇌어 본 정언은 재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가자 응, 하며 재희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어, 선배. 사무실 다시 안 들어올 거예요?”
『좀 늦을 것 같은데. 아직 퇴근 안 했어?』
시끌시끌한 소리가 재희의 뒤로 들렸다. 짐작한 대로 술자리에 붙들려 있는 듯했다. 정언은 가방을 챙기며 대답했다.
“보내 준 자료 체크하는 중인데 갑자기 취재 잡혀서 나가야 될 것 같아서. 일단 지금 반쯤 봤는데, 내일 마저 할게요. 선배 혹시 늦게 들어와서 나 찾을까 봐 전화했어요.”
정언의 말에 재희가 놀란 듯 물었다.
『취재? 이 시간에 무슨 취재를 가? 어디를?』
“한승주 추가 취재 약속한 게 있는데, 모레부터 무슨 해외 로케가 잡혔대요. 스케줄이 장기라 오늘 자기 드라마 촬영 끝나고 보면 안 되냐고 매니저한테 전화가 왔더라고.”
『한승주?』
잠깐 침묵하던 재희의 목소리가 갑자기 달라졌다.
『그거 꼭 가야 돼?』
“오늘 아니면 시간이 없다는데 어떡해요.”
『김 피디는?』
“일 있다고 일찍 들어갔어요.”
『다시 나오라고 해. 아니면 대신 보낼 사람 없어?』
정언은 미간을 좁혔다. 재희가 이런 소리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말하는 건 멀쩡한데 설마 취한 건가 싶어, 정언은 어이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이 시간에 어딜 다시 나오라고 해요. 대신 보낼 사람은 또 무슨 소리야? 왜 그래요?”
『아니, 이 시간에 갑자기 보자고 하는 거 이상하잖아. 나 걔 별로 느낌이 안 좋아. 개인적으로 서 피디한테 연락도 자꾸 한다며.』
그 많은 한승주 팬은 우리 사무실에만 없나 보네, 속으로 중얼거린 정언은 이마를 짚었다.
“그건 또 누구한테 들었어요?”
『송 작가.』
안 그러던 사람들이 죄다 왜 이러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기가 차 웃은 정언은 대수롭지 않게 내뱉었다.
“하여튼 팩트만 찾는 주제에 이럴 때만 다들 상상력이 너무 뛰어나. 됐어요, 뭐 별일 있겠어요?”
『이 시간에 어디서 만나자고 그러는데? 일단 장소 보내 줘. 혹시 모르니까.』
“취했어요? 왜 이래?”
정언이 질색했으나 재희의 말투는 평소와 달리 진지했다.
『나 멀쩡해. 농담 아니니까 어디서 만나는지 주소 보내.』
“진짜 왜 이래, 새삼. 알았어요, 알았어.”
정언은 전화를 끊었다. 그냥 평소처럼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전화를 했을 뿐인데, 괜히 재희까지 이러니 더 신경 쓰였다. 잠시 망설이던 정언은 가방을 마저 챙기고는 책상의 스탠드를 껐다.
사무실을 나서며 승주가 보낸 주소를 복사해 재희에게 전송한 정언은 택시를 잡았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으나 운전하기가 피곤했다. 차야 뭐 내일 와서 가져가지, 하고 태평한 생각을 하던 정언은 무심코 받은 주소를 핸드폰으로 검색해 보았다.
포털 사이트의 검색창에 ‘한남동 피스 오브 케이크’를 검색하자 수천 개의 포스팅이 쏟아졌다. 별생각 없이 눌러 본 가장 위의 포스팅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여지흔이라는 이름이었다. 어디서 들었는데, 하고 생각한 순간 지난번에 한승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여지흔 형 알죠? 여지흔 형이 한남동에서 와인바 하거든요. 루프탑이 진짜 멋있어요.」
아니나 다를까, 한승주가 보낸 주소는 바로 그 여지흔이 한다는 한남동 루프탑 와인바였다. 취재 응할 시간도 없어 촬영 끝나고 이 시간에 사람을 불러 대면서, 굳이 이런 데서 만나자고 하는 의도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영 찜찜해진 기분으로 한남동에 도착한 건 이십 분쯤 뒤였다. 늦은 시간인데도 밖에서 보이는 루프탑에는 예쁘게 조명이 들어와 있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한눈에 보기에도 연예인 지망생 같은 종업원이 달려 나왔다.
“혼자 오셨어요?”
아무래도 이런 분위기는 익숙하지 않았다. 정언은 서둘러 명함을 내밀었다.
“YBS 서정언 피디입니다. 한승주 씨 만나러 왔는데요. 혹시…….”
“아, 네. 이쪽으로 오시죠.”
명함을 확인한 종업원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정언을 안쪽 룸으로 안내했다. 조용한 룸의 문을 열자, 긴 테이블 가운데 앉아 혼자 맥주를 마시던 승주가 어, 하며 반색했다.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복도로 희미하게 넘어오던 음악마저 완전히 끊긴 룸 안이 고요했다.
“피디님 얼굴 보기 진짜 힘드네요.”
턱을 괸 승주가 빙글거렸다. 이미 약간 취한 것 같았다. 촬영 끝나자마자 온 거라면서, 대체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건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정언은 표정을 감추며 승주와 약간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죄송합니다. 저희도 요즘 스케줄이 풀이라서요. 피곤하실 텐데 짧게 하겠습니다.”
“나 지금 메이크업 다 지웠어요. 촬영은 안 하면 안 되나?”
정언이 가방에서 캠을 꺼내려 하는 것을 본 승주가 정언을 막으며 물었다. 그러죠, 하고 대답한 정언은 대신 포켓에 꽂아 둔 펜형 보이스리코더를 켜고는 자료가 든 파일을 꺼내 확인했다. 그사이 승주는 소파에 등을 묻은 채 정언을 응시했다.
“시사회 안 왔던데, 그날도 바빴어요?”
“네.”
정언은 승주를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여전히 반말 같은 존대가 거슬렸다. 최소한 취재하는 동안에는 말투가 얌전했는데, 그때는 매니저가 동석해서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승주가 아이스 바스켓 안에 꽂혀 있던 맥주 한 병을 더 따 홀짝이기 시작했다.
“연락은 왜 그렇게 안 돼요?”
“계속 핸드폰 확인할 수가 없어서요.”
“아니잖아. 내 연락 씹는 거 보면 아는데.”
아무래도 진짜 취한 게 맞는 모양이었다. 이러면서 무슨 인터뷰를 하겠다는 건가 싶어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정언은 애써 승주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일단 저희가 이전 소속사 계약서 내역 검토는 마쳤습니다. 지금 한승주 씨가 이전 회사인 스포트쇼 쪽에 전속계약 효력 부존재 확인 소송하고 별도로 민사도 같이 진행 중이신데, 이 민사 건이 계약서 음원수익 관련 조항에…….”
“뭐가 그렇게 급해요?”
승주가 말을 끊었다. 인터뷰를 할 생각이 아예 없는 거라는 직감이 든 건 그때였다. 씩 웃는 얼굴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느낌이 나쁘다던 민혜와 재희, 윤이 생각난 건 직후였다.
“여기 분위기 괜찮죠?”
“계속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정언이 딱딱하게 되묻자 승주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원래 성격이 그래요?”
물론 아니었다. 원래 성격 같았으면 벌써 욕이 나가고도 남았을 상황이었다. 승주가 다시 맥주를 마시며 씩 웃었다.
“나 여기 작업 걸 때 아니면 안 와요.”
이게 정말 미쳤나 하는 소리가 목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어쨌든 취재원이었다. 화제성이 있으니 섭외한 건데, 이런 일로 깽판을 치고 뒤집어엎을 수는 없었다. 잠시 감정을 누른 정언은 사무적으로 대꾸했다.
“더 진행하실 생각 없으면 추가 취재는 없던 걸로 하죠.”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던 파일을 덮자, 승주가 그 위를 자기 손으로 눌렀다. 정언은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들었다. 승주가 나른한 눈으로 정언을 마주 보았다.
“딱딱한 얘기 하지 말고 다른 얘기 좀 하죠. 내 연락 왜 무시해요?”
“취재원하고 사적으로 연락 안 합니다.”
그때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전화가 걸려온 것 같았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승주가 정언의 재킷 주머니 쪽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정언이 핸드폰을 꺼내자 갑자기 승주가 핸드폰을 확 낚아채더니 자기 앞에 엎어 놓았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돌발 행동에 당황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승주의 손바닥 아래서 핸드폰이 계속 진동했다. 굳이 승주를 더 자극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정언은 서둘러 목에 걸고 있던 블루투스 이어폰의 버튼을 눌렀다. 통화가 연결된 건지, 혹은 전화가 끊어진 건지 진동이 멈췄다.
다행히 핸드폰을 확인할 마음은 없었는지, 승주가 정언을 빤히 보았다.
“내 전화 안 받으면서 다른 사람 전화는 왜 받으려고 그래요?”
장난치는 듯한 말투였으나 눈이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한승주 씨.”
승주를 부르는 말투가 강하게 나갔다. 턱을 괸 승주가 키득거렸다.
“에이, 무섭게 왜 그래요. 피디님 스타일 좋고 맘에 들어서 그냥 친해지려고 그런 건데. 그냥 술 같이 마시고, 같이 놀고, 그러면 좋잖아요.”
“제가 여기서 한승주 씨하고 이럴 이유 없는 것 같은데요.”
그러나 승주는 이미 자신의 말을 거의 듣지 않고 있었다. 손에 든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신 승주가 자리를 옮겨 정언의 곁에 앉았다.
“피디님 서른둘이라면서요? 되게 동안이네. 나 연상 취향인 거 알았나?”
“그만하시죠.”
체력에 아무리 자신이 있다고 해도 성인 남자와 밀폐된 공간에서 일대일로 맞서는 건 피하고 싶었다. 입이 말랐다. 핸즈프리 마이크를 쥔 손에 얇게 땀이 배었다.
“여자는 서른 넘어야 재밌더라고요. 한 번 자도 쿨하잖아. 피디님도 그래 보여서 좋던데. 어떤 스타일이에요? 의외로 벗으면 핫하고, 그런 타입 같기도 하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잘도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얼굴에 기가 막혔다. 소문이 안 좋은 이유가 있긴 한 모양이었다. 자신에게도 이럴 정도라면 작가나 계약직 스태프들에게는 어떨지 안 봐도 뻔했다.
당장 한 대 쳐 주고 싶은 것을 참은 정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주가 어, 하며 정언의 손목을 잡아챘다. 생각보다 훨씬 세게 움켜쥐는 손길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짜증나게 왜 이래요, 진짜. 그냥 얘기만 좀 하자고.”
“놓으시죠.”
정언이 그 손을 떼어 내려 했으나 승주는 억지로 정언을 끌어 앉혔다.
“일단 앉아 봐요. 내가 치한이야?”
이미 충분히 그런 것 같은데, 속으로 생각한 정언은 승주의 손을 뿌리쳤다. 그새 손목 위로 새빨갛게 손자국이 남은 채였다. 가방을 들고 나가려 하자 승주가 문 앞을 가로막고 섰다. 정언은 눈썹을 좁히며 승주를 마주 보았다.
“지금 저 위협하시는 겁니까?”
“진짜 웃기네. 내가 무슨 범죄자냐고. 내가 뭐 했어요?”
승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혔다. 승주가 다시 정언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세게 잡혀, 손목을 비틀어 팔을 빼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다친 지 오래인 왼쪽 어깨까지 약간 뻐근하게 아픈 느낌이었다. 가까워진 거리 탓에 알코올 냄새가 확 밀려들었다.
“놓고 얘기하세요.”
우선 그 손을 떼어 내려 했지만 아까보다 더 강하게 잡힌 통에 쉽지 않았다. 승주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정언을 다그쳤다.
“내가 뭐 어쨌냐고. 이 시간에 여기 온 거 뻔하잖아. 뻔한 거 알면서 와 놓고 왜 그래요?”
“비켜 주시죠.”
잘못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격리된 룸 안인 데다 상대가 좋지 않았다.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으나, 승주가 얼굴을 찌푸리더니 정언의 어깨를 밀쳤다.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섰지만 두 걸음도 가기 전 테이블에 몸이 가로막혔다.
승주가 양팔을 쥐며 꼼짝도 못 하게 정언을 붙들었다. 마른 체격이기는 했지만 일단 성인 남자였다. 힘으로 벗어난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소리를 지를까, 미친 척 육탄전을 할까 복잡한 머리로 계산하는 사이 누군가 밖에서 문을 세게 두드렸다.
“씨발, 문 두드리지 마!”
승주가 고함을 쳤으나 밖에서는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거의 문을 부술 기세로 쾅쾅대는 소리에, 승주가 쥐고 있던 정언의 팔을 놓고는 짜증스럽게 문을 열었다.
“어떤 새끼가 자꾸…….”
그러나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선 남자에게 다음 순간 그대로 멱살을 잡혀 벽에 밀어붙여진 탓이었다. 얼마나 세게 떠밀렸는지 퍽 소리가 날 정도였다. 승주보다 더 놀란 쪽은 정언이었다. 승주의 멱살을 움켜쥔 뒷모습이 아무리 봐도 낯이 익어서였다.
“너 제정신이야?”
거친 숨이 섞인 낮은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나,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정언은 눈을 의심했다.
진짜 윤이었다.
윤이 이 시간에, 더구나 여기 있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갑자기 어떻게 나타난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얼어붙은 정언은 크게 뜨인 눈을 깜빡였다. 그사이 윤은 승주의 멱살을 잡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승주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콜록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윤은 거의 승주를 죽일 기세로 윽박질렀다.
“너 제정신이냐고 묻잖아, 이 새끼야!”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