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308
308화
그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정언이 김 피디, 하며 윤을 불렀으나, 윤은 그 말이 아예 안 들리는 듯 버둥거리는 승주를 다시 한 번 벽에 콱 밀어붙였다. 체격 차가 있는 데다 취하기까지 한 바람에 승주는 윤에게 상대도 되지 못했다.
“이딴 식으로 사람 만만하게 보고 집적대는 거 아무 데나 통할 줄 알았어?”
윤이 이를 갈며 승주를 다그쳤다. 윤이 이렇게 화를 내는 건 이사회에 불려갔던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분명 자신이 아는 윤이 맞는데 낯선 사람처럼 느껴져, 정언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기침을 하던 승주가 겨우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윤을 보았다.
“뭐?”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승주를 응시하던 윤이 그 눈앞에 자기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통화 녹음 중인 화면이 떠 있는 액정에 정언의 이름이 선명했다. 아까 걸려온 그 전화가 윤의 전화였던 듯했다.
정언은 목에 걸린 블루투스 이어폰을 내려다보았다. 통화 중을 알리는 파란색 LED가 계속 점멸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윤은 전화가 연결됐을 때부터 자신과 승주의 대화를 계속 듣고 있었을 게 당연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윤이 속에서 긁히는 목소리로 승주에게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녹음되고 있는 거 보여? 나 피디야. 너 여기서 지금 지껄인 소리 바로 아침 뉴스 타게 만들어 줄까?”
마른침을 삼킨 승주가 간신히 고개를 저었다. 술이 다 깬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뚫어지게 보던 윤이 멱살을 잡은 손을 놓으며 승주를 밀쳤다.
“한 번만 더 이딴 짓 하면 그땐 진짜 죽여 버릴 줄 알아.”
승주가 몸을 숙이며 한참을 콜록거렸다. 테이블 위에 놓인 정언의 핸드폰을 집어 든 윤이 나가요, 하며 정언의 팔을 잡아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나섰다. 얼결에 끌려 나온 정언은 건물 밖으로 나와서야 윤에게 물었다.
“여기 어떻게 온 거야? 약속 있다고 한 거 아니었…….”
정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윤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한테 먼저 얘기하셨어야죠!”
전에 없이 화가 난 표정이라 저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아직도 숨이 거칠었다. 윤이 내뱉는 숨결마다 찬 공기가 하얗게 응결했다가 흩어졌다. 감정을 누르려는 듯 윤이 입술을 잘근거리며 씹었다.
그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다는 걸 정언은 그제야 깨달았다. 윤이 전화 너머로 상황을 계속 듣고 있었다면 그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를 악물고 있던 윤이 자기 머리칼을 흩어 놓으며 정언을 마주 보았다.
“그 시간에 만나자고 하는 거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하셨어요? 강 피디님이 저한테 연락해서 가 보라고 안 하셨으면 선배 이러고 있는 줄 몰랐을 거 아니에요! 선배한테 무슨 일 생겼으면 전 어떡하라고요! 진짜 저 미치는 꼴 보고 싶어서 이러세요?”
높아지던 윤의 목소리 끝이 떨리며 확 잦아들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손을 올려 잠시 눈가를 덮고 있던 윤이 정언을 외면하며 근처에 세워 둔 자기 차에 시동을 걸었다. 조수석 문을 열며 정언을 밀어 넣은 윤은 바로 차에 탔다.
운전을 하는 내내 윤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정언의 집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운 윤은 시동을 껐다. 굳은 표정으로 앞을 응시하는 윤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들이 스쳤다. 한동안 침묵하던 윤이 입을 열었다.
“취재원 다시 섭외할게요. 한승주 건 하지 마세요. 선배 강 피디님 서포트하는 동안 제가 분량 채워 놓을 테니까.”
“김 피디.”
“고맙다는 말 안 하셔도 돼요. 선배한테 화내려고 왔으니까.”
윤이 정언의 말을 끊었다. 정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윤을 보았다. 흰 얼굴에 귀 끝만 새빨갛게 단 채였다. 내내 밖에 있었던 사람 같았다. 퍼뜩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긴 정적이 내려앉았다.
윤이 이 끝으로 입술을 말아 눌렀다. 하얗게 질린 입술이 가늘게 떨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정언이 김 피디, 하고 부르자 윤이 자기 얼굴을 감쌌다. 무너지듯 어깨를 웅크린 윤이 입술을 달싹였다.
“가는 내내 머리가 어떻게 되는 줄 알았어요. 전화로 소리는 계속 들리는데…… 나쁜 생각만 들어서 진짜 돌아 버릴 것 같았다고요. 내가 선배 대신 갔으면 그런 일 없었을 텐데, 선배한테 먼저 미안하다고 했으면 되는데, 내가…….”
윤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조금 전 승주에게 그렇게 화를 냈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정언은 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김 피디, 잠깐만. 나 봐.”
“싫어요.”
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감정을 누르는 듯 한참이나 말이 없던 윤이 고개를 숙였다.
“약속 같은 거 없었어요. 선배한테 사과하기 싫어서 오기 부린 거예요.”
“계속 밖에 있었지? 이렇게 추운데?”
정언의 물음에 윤이 네, 하고 조그맣게 대답했다. 이럴 때는 영락없이 소년 같은 얼굴이었다. 사이를 둔 윤이 입을 열었다.
“선배 앞에서 이렇게 굴기 싫어요, 저. 계속 어린애처럼 이러는 거 저도 정말 돌아 버릴 것 같은데…… 그러기 싫은데 마음대로 안 되잖아요. 선배 생각만 하면 아무것도 못 하겠어요.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아무 생각도 안 나요. 생각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요.”
지나칠 정도로 솔직한 단어들에 머릿속의 생각들이 그대로 지워졌다. 윤이 겨우 눈을 들어 정언을 마주 보았다. 주차장의 조도 낮은 조명에 짙은 갈색 눈동자가 비쳤다. 평소보다 훨씬 더 가라앉은 그 눈이 마음에 박혔다. 윤이 시선을 내렸다.
“먼저 미안하다고 말 못 해서 죄송해요.”
잠긴 목소리였다.
“……선배한테 어울리는 남자였으면 좋겠는데 너무 한심해서 짜증나요.”
중얼거린 말에 한숨처럼 웃는 소리가 났다. 매번 자기보고 선배는 스스로를 너무 모른다고 투덜대면서, 정작 윤 자신도 본인이 어떤지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김 피디는 지금보다 더 멋있으면 내가 좀 곤란할 것 같은데.”
정언의 대답에 윤이 멈칫하며 눈을 들었다. 정언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까는 고마웠어. 내가 안일했던 거 인정할게.”
“그 자식이 나쁜 거지 선배 잘못 아니에요. 아까는 제가 화가 나서…….”
윤이 서둘러 정언의 말을 부정했다. 그 얼굴에 푹 웃는 소리가 났다. 가만히 윤을 마주 보던 정언은 작은 숨을 내쉬었다.
“항상 먼저 손 내밀게 해서 미안해.”
방금 발음한 단어들이 낯설었다. 정언은 그런 스스로를 생경하게 느꼈다. 이런 말을 누군가에게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경계 안에 그토록 가까운 타인을 둔다는 게 어떤 일인지 윤을 만나기 전에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도 충분해.”
손을 뻗은 정언은 윤의 머리칼을 가만히 만졌다. 찬 기운이 아직 남아 있는 부드러운 머리칼을 지나 이마와 뺨, 목덜미로 내려가는 손끝의 궤적을 따라 열이 올랐다. 멍하니 정언을 응시하던 윤이 가벼운 기침을 뱉었다. 손을 멈춘 정언은 윤을 불렀다.
“김윤.”
“네?”
윤이 눈을 깜빡였다. 정언은 속삭이듯 윤에게 말했다.
“커피 마시고 가.”
그게 무슨 뜻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선배.”
“감기 들어.”
윤이 그새 새빨개진 얼굴을 숙였다. 아무래도 감기는 이미 걸린 것 같았다.
“뭐해, 춥잖아.”
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차에서 내린 정언은 윤에게 손을 내밀자, 윤이 그 손을 잡았다. 작게 내쉬는 숨이 선명했다. 나란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두 사람은 어두운 복도를 지났다.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서자, 문이 닫히는 것과 거의 동시에 아직 차가운 윤의 손이 두 뺨을 감싸 왔다. 정언은 눈을 감았다. 맞닿는 입술 사이로 열 오른 숨이 스며들었다. 곧 센서 등이 꺼지며 얇은 눈꺼풀 위로 완전히 어둠이 덮였다. 바람 소리가 멀게 들렸다.
* * *
멍한 머릿속으로 기억들이 분절했다. 현관에서의 긴 키스 사이 몇 번인가 센서 등이 점멸했던 것이 떠올랐다. 부드럽고 서늘한 머리칼, 뺨, 입술. 한 입 베어 문 바닐라 아이스크림 안에서 불현듯 따뜻하게 녹인 초콜릿이 쏟아지듯 스며들던 혀와 숨결.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감각들은 선명했다.
절제 같은 단어들을 모조리 지워 버린 사전처럼 굴었던 간밤은 자신에게도 낯선 것이었다. 가늘고 창백한 손목을 쥐었을 때 정언이 아파하던 얼굴이 뇌리를 지났다. 손목에 남은 한승주의 손자국을 알아차리고 열 오른 머릿속으로 뭔가 욕 같은 걸 몇 마디 내뱉은 것도 같았다.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숨이 많이 섞인 정언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건드렸다. 몸이 닿는 곳마다 제멋대로 구겨지던 시트와 뒤섞인 체온, 호흡, 그리고…… 뒤척이던 윤은 긴 숨을 내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 사방이 푸르스름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사물의 윤곽을 분간하지 못할 만큼은 아니었으나, 잠이 깰 만큼 밝지도 않았다. 흐릿했던 시야가 점차 또렷해지며 이제 익숙한 정언의 방 안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미열이 남은 건지 머릿속이 약간 들뜬 느낌이었다. 어제저녁 내내 몇 시간을 밖에서 돌아다닌 후유증인 듯했다. 품에 안겨 있는 사이 정언이 자신의 목덜미며 뺨을 연신 만져 보다 열이 난다고 걱정하던 것이 꿈인지 아닌지 확실하지가 않았다.
윤은 팔을 올려 잠시 눈가를 가리고 있다가 소리 없이 정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세상모르고 잠든 정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핏기 없는 얼굴이 새벽빛에 물들어 더 창백해 보였다.
베개에 한쪽 얼굴을 파묻은 윤은 어둠에 조금 익숙해진 눈으로 가만히 정언을 마주 보았다. 이제는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는 얼굴이었지만, 이렇게 보고 있으면 늘 새로웠다.
긴 눈매와 가는 속눈썹, 이마에서 코끝으로 떨어지는 날카롭고 서늘한 선과 얇은 입술. 웃지 않을 때면 차가운 인상이었지만 잠들어 있을 때는 또 다르게 느껴졌다.
윤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정언의 머리칼을 갈무리해 넘겨주었다. 정언은 잠버릇이 거의 없어, 잘 때 누운 그대로 아침에 일어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간밤에는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정언이 품 안에서 거의 정신을 잃다시피 잠들었던 걸 떠올리자 조금 미안한 기분이 되었다.
이불이 약간 흘러내려 마른 어깨가 드러난 탓인지 정언이 무의식중에 몸을 조금 더 웅크렸다. 윤이 얼른 목까지 이불을 올려 덮어 주자, 그 기척에 퍼뜩 잠이 깼는지 정언이 눈가를 찌푸렸다.
“……몇 시야?”
눈도 뜨지 못한 채 묻는 목소리가 나른했다.
“아직 일곱 시도 안 됐어요.”
윤이 속삭이듯 대답하자 정언이 낮은 한숨을 쉬고는 베개에 얼굴을 완전히 묻었다. 잠시 그러고 있던 정언이 고개를 돌려 눈을 가늘게 뜨고 윤을 마주 보았다.
“왜 이렇게 일찍 깼어.”
“그냥요.”
윤은 손끝으로 정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덧그리며 정언을 응시했다. 어둡기는 했으나 뚫어지게 보는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정언이 윤의 손길에 얼굴을 맡긴 채 입술을 달싹였다.
“왜 그렇게 보는데.”
“예뻐서요.”
정언이 한숨을 섞어 웃는 소리를 냈다.
“자다 깬 게 뭐가 예뻐.”
“그냥 다 예뻐요.”
뭐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정언이 얼굴을 만지는 윤의 손을 잡아 내렸다.
“더 자.”
“선배도요.”
순순히 대답했으나 물론 말뿐이었다. 정언이 다시 얕은 잠에 빠진 사이, 윤은 쥐고 있던 손끝에 입을 맞췄다. 가느다란 손가락 마디 안쪽과 손바닥 위로 내려간 입술이 손목 안쪽을 눌렀다. 빨갛게 남아 있던 손자국은 다행히 이제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간지러운지 정언이 잠결에 손을 말아 쥐었다. 그게 귀여워 쿡쿡거리자, 결국 한쪽 눈가를 찡그린 정언이 잠긴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자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원하는 대로 하세요.”
윤의 말에 정언이 재차 물었다.
“김 피디는 어느 쪽인데?”
윤은 대답 대신 정언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체온이 전이돼 따뜻해진 손이 부드러웠다. 윤이 연신 정언의 손을 가지고 장난치다 눈만 들어 웃자 정언이 이마를 툭 박으며 내뱉었다.
“웃지 마, 정들어.”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윤은 이불 안으로 정언을 완전히 끌어당겨 안았다. 윤의 품에 파묻힌 정언이 윤을 쳐다보고 있다가 한숨을 쉬었다.
“이제 서른 아냐? 앞자리 바뀌면 예전 같지 않아야 되는데.”
“아직 잘 모르겠는데 왜요? 저 어젯밤에 예전 같지 않았어요?”
느물거리며 묻자 대답 대신 정언이 침대 위의 쿠션으로 윤의 입을 틀어막았다. 푹 웃은 윤이 쿠션을 치우자 정언이 팔을 뻗어 윤의 등을 끌어안고는 웅얼거렸다.
“그만하고 더 자.”
이쯤이면 잠이 완전히 깰 법도 한데 도저히 불가능한 듯했다. 윤은 정언의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다시 올려 주었다.
“피곤하세요?”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 양심 없지 않나?”
“좀 그렇죠.”
윤은 기꺼이 정언의 비난을 받아들였다. 작게 하품을 한 정언이 낮은 숨을 내쉬었다.
“개편 시작하면 엄청 바빠질 거라 이럴 시간 없어.”
“그럼 지금 미리 다 할까요?”
“죽을래?”
나른하던 목소리가 까칠해졌다. 아무리 들어도 방금 그 말은 진심이었다. 윤은 서둘러 변명했다.
“농담이에요.”
“방금 그거 하나도 농담 안 같았거든.”
당연히 정언의 말대로 농담이 아니긴 했다. 반쯤 비몽사몽인 채로도 그게 분간이 가는 건 정언이 눈치가 빨라서인지, 자신이 감출 의지가 없어서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티 많이 났어요?”
심각하게 되묻는 윤에게, 정언이 대답 대신 허리를 있는 힘껏 꼬집었다. 보통은 장난인데 지금은 장난이 아니었다. 윤이 반사적으로 악 소리를 내자 정언이 윤의 등을 한 대 찰싹 때려 주었다. 매운 손길이었으나 웃음이 터졌다. 정언이 자라니까, 하고 내뱉으며 품에 얼굴을 묻었다.
“아직 열 있네.”
다시 잠이 든 줄 알았는데, 한참 그러고 있던 정언이 나른하게 웅얼거렸다. 윤은 정언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가 정언에게 속삭였다.
“저 이름 불러 주시면 안 돼요?”
“갑자기 왜.”
“어젯밤에 선배가 저 부르실 때 엄청 설거든요.”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