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309
309화
“그만 설레도 되지 않나?”
“죽기 전엔 힘들 것 같은데요.”
그 말에 정언이 고개를 들어 윤을 마주 보았다. 아직 잠이 묻은 눈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 도대체.”
“전부 다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즉시 대답하자, 한동안 말이 없던 정언이 물었다.
“첫 데이트에서 롤러코스터 타면 성공 확률이 높은 거 알아?”
이런 분위기에서 하기에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왜요? 놀이기구 타는 거 좋아하세요?”
윤의 물음에 정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이 순간적인 공포심에 심장이 뛰는 거랑 호감을 구분하기 어렵다고.”
“제가 그러고 있다는 얘기죠?”
윤은 웃었다. 정언이 그런 말을 하는 의도가 뭔지 바로 알아차린 까닭이었다. 정언은 간혹 윤에게 그런 말을 할 때가 있었다. 만약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면, 다른 팀에서 만났으면, 더 평범한 경험을 공유했다면 윤이 자신을 좋아하게 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럴 수도 있다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났어도, 세상이 다 멀쩡했어도 전 선배 좋아하게 됐을 거예요.”
운명론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어떻게 확신해?”
정언의 질문에 윤은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처음 선배 차 들이받았을 때부터 심장 터질 뻔했거든요.”
그 말에 정언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푹 웃는 소리를 냈다. 가만히 그 얼굴을 보고 있던 윤은 씩 웃었다.
“가끔 이럴 때 알겠어요. 선배가 저 좋아하신다는 거.”
정언이 무슨 소리냐는 듯 눈썹을 약간 치켜떴다. 윤은 정언의 코끝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일어나지 않을 일 생각하는 취미 없으시잖아요.”
잠깐 멈칫하던 정언이 짧게 웃는 소리를 냈다. 못 이기겠다, 하고 중얼거린 정언이 사이를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김윤.”
정언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심장이 간질거렸다. 울림소리가 많은 이름이 정언의 목소리로 발음될 때면, 윤은 간혹 지금까지 그 이름을 누구도 부른 적 없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었다. 마치 그 이름이 온전히 정언의 것인 양.
“마음의 준비 좀 하게 해 주시면 안 돼요?”
짐짓 가슴 위를 누르며 투덜거리자, 정언이 픽 웃고는 윤의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커튼 닫아 줄래?”
몸을 일으킨 윤은 창가에 섰다. 짙은 회색의 암막커튼이 묵직하게 창가의 양 끝을 가리고 있었다. 윤은 몸을 조금 내밀어 창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바람이 아직 앙상한 가지 사이를 휘돌아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 많이 부네요.”
윤은 정언을 돌아보았다. 이불 속에 파묻힌 정언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도 이제 겨울 거의 다 갔어.”
“진짜 길었던 것 같아요.”
대답하던 윤은 문득 천천히 흩날리는 꽃잎 같은 것을 보았다. 고개를 들어 아직 어둑한 하늘을 보자, 바람을 타고 하얗게 떠도는 입자들이 공기 사이에서 반짝였다.
“어, 눈 오는데요.”
아마 이번 겨울의 마지막 눈일 것 같았다. 떨어지는 눈송이를 보고 있던 윤은 커튼을 잡아당겨 닫았다. 순식간에 집 안이 부드러운 어둠으로 휩싸였다.
“더 잘까요?”
다시 침대로 돌아온 윤은 연신 정언의 머리칼이며 귓가, 뺨과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오늘은 나가지 말아요.”
“자료 볼 거 남았는데…….”
“여기서 저랑 보시면 되죠.”
정언의 말끝이 맥없이 잠겨들었다. 윤은 그새 다시 반쯤 잠든 정언을 완전히 감싸 안았다. 마른 몸이 품 안에 꼭 맞춘 듯 들어왔다.
“밖은 너무 춥잖아요.”
숨소리로 중얼거린 윤은 눈을 감았다. 다시 잠에 빠지기 직전, 겨울이 지나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귓가로 아른거렸다. 닫힌 커튼 너머로 사락거리며 눈이 쌓였다.
봄이 가까웠다. 찾아드는 꿈은 이미 따뜻했다.
외전 (2). An ordinary day
영원히 깨지 않기를 바라는 순간이 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에 눈이 뜨였다. 멍한 시선에 흐릿했던 윤곽들은 곧 또렷해졌다. 익숙한 천장, 벽, 창문, 책장, 스탠드, 오디오, 그리고 침대.
재희는 손을 올려 눈을 덮었다.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습기가 차가웠다. 길게 내뱉은 숨이 흩어졌다. 붙잡을 수 없는 기억. 간밤의 꿈은 마치 존재한 적도 없다는 듯 머릿속에서 산산이 부서져 떠돌았다. 원래의 모습조차 잊힌 파편들의 조각은 늘 허무하고 날카로웠다.
오랫동안 그대로 누워 있던 재희는 몸을 일으켰다. 무겁게 내려온 검은색 암막 커튼을 비집고 새어드는 빛에 먼지 입자들이 반짝이며 떠돌았다.
생의 불가항력.
수없이 이런 아침을 반복할 때마다 재희는 그런 것을 생각하곤 했다. 재희는 그날 이후, 자신의 삶 어느 한 부분이 영원히 멈춰 버렸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결코 되돌릴 수 없고 다시는 움직일 수도 없는 시간들.
어느 날은 살아도 될 것 같았고, 또 어느 날은 죽어야 할 것 같았다. 아무나 제발 자신을 죽여 줬으면 싶은 날이 지나간 뒤에는 살려 달라고 누구에게든 매달리고 싶은 날이 찾아왔다. 지나가면 괜찮아질 거라는 위로들을 애써 믿으려 노력할 때도 있었다. 가끔 이제는 조금 살 만하다고, 어떤 괴로움도 차츰 흐려지기 마련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절망에는 늘 발소리가 없었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 등 뒤에 바짝 달라붙어 불현듯 속삭이는 고통에 재희는 쉽게 면역되지 못했다. 그 절망의 전조가 언제나 아름답기에 더욱 그랬다. 간밤의 꿈처럼.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를 스치던 감촉, 뺨을 만질 때 전이되던 체온, 동그랗고 반짝이는 눈동자, 입술이 닿는 순간 스미던 숨결과 귓가에서 맴도는 웃음소리.
그런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이면 반드시 고통이 목을 졸랐다. 그러나 위험한 걸 알면서도 중독되는 약처럼 재희는 그 전조를 절대 거부하지 못했다. 그게 뭐라도 상관없었다. 신이든, 악마든. 눈을 뜨는 순간이면 지금처럼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는 기억이라도 좋았다.
멍하니 앉아 있던 재희는 다시 한 번 눈가를 문질렀다. 그새 다시 물기 없이 말라 버린 눈이 뻑뻑했다. 핸드폰을 집어 들기 위해 침대 옆의 협탁으로 손을 뻗자, 이미 비어 가벼워진 수면제 병이 바닥으로 떨어져 굴렀다. 안에서 알약 한두 알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재희는 굳이 병을 주우려 하지 않았다. 핸드폰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현진의 메시지였다.
― 야 너 요새 진짜 엉망이야 주말에 출근하지 마
진짜 엉망이야, 그 구절을 눈으로 되풀이해 읽은 재희는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의 거울에 비치는 모습이 낯설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은 예민하게 날이 선 채였다.
한동안 거울 속의 자신을 마주하고 있던 재희는 시선을 돌리며 오디오의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My funny valentine’의 멜로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 이런 날 그다지 좋은 선곡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헛웃음을 뱉은 재희는 오디오의 볼륨을 올렸다. 부드럽고 쓸쓸한 쳇 베이커의 목소리가 어둡고 고요한 집 안을 가득 채웠다.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젖히자, 아직 회색으로 물든 겨울의 도시가 창밖에서 쓸쓸했다. 저만치 보이는 한강변 위로 옅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재희는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의 조명을 켰다. 서늘한 공기가 맴돌았다. 재희는 부러 거울을 보지 않았다. 세면대의 수전 레버를 올린 즉시 물이 쏟아졌다. 세면대 아래로 소용돌이치며 흔적 없이 사라지는 물줄기에 시선이 잠시 붙들렸다.
손을 내밀어 받은 물은 차가웠다. 세수를 하는 사이 그나마 남아 있던 간밤의 파편들이 깨끗하게 씻겨 나갔다. 물을 잠그며 얼굴을 숙이자 천천히 떨어지는 물방울이 세면대 위에 투명하게 얼룩졌다.
재희는 눈을 감았다. 무슨 꿈이었는지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연수의 꿈인 건 분명했다. 확신할 수 있었다.
이대로 다시는 눈뜨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건 늘 그때뿐이었기에.
* * *
블라인드를 올리지 않은 거실은 어두웠다. 테이블 위의 커피는 이미 식은 지 오래였다. TV 화면을 채우는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만의 무채색 얼굴은 수십 번쯤은 더 본 것일 텐데도 매번 새로웠다.
.
연수가 좋아하는 영화였다. 드물게도 쉬는 날이 겹치는 주말이면 나란히 앉아 를 보았다. 재희는 이 영화의 결말을 몰랐다. 늘 마지막까지 보지 못하는 탓이었다. DVD 플레이어의 재생 버튼을 누를 때마다 연수는 다짐을 받았다.
「오늘은 결말 물어볼 거야.」
재희는 매번 대답 대신 웃었을 뿐이었다.
‘샘, ‘As time goes by’를 연주해 줘요(Play it, Sam. Play ‘As time goes by’).’…… 잉그리드 버그만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허공을 떠돌았다. 흑백 화면 속 물기 어린 그녀의 눈동자가 아득했다.
잠시 눈을 감자 클래식한 재즈 피아노 소리와 둘리 윌슨의 ‘As time goes by’가 울려 퍼졌다. 연수는 이 장면을 좋아했다. 연수가 허밍으로 ‘As time goes by’의 멜로디를 따라 부르며 어깨에 머리를 기댈 때, 재희는 단 한 번도 키스하고 싶다는 충동을 이긴 적이 없었다.
「재희 너 또.」
어깨를 밀어내는 손을 쥐어 깍지를 끼면 연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나쁜 거 아니거든.」
입술을 댄 채 속삭일 때의 감각이 좋았다. 웃는 소리가 터졌다. 연수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여기만 보고.」
「싫은데.」
아랫입술을 장난스럽게 깨물며 대답하면 연수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리고 키스, 다시, 다시 키스. 소파 위에서 몸이 엉키며 체온이 스미고 달뜬 숨소리가 흩어지면 영화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가느다란 목덜미에 코끝을 파묻을 때 흐트러지는 머리칼 사이로 희미한 샴푸 향기가 났다.
얇은 티셔츠 아래의 부드러운 몸, 손바닥 아래서 팔딱이는 작은 심장, 연신 귓가를 간지럽히는 호흡, 달고 옅은 살 냄새와 머리칼 사이를 파고드는 가느다란 손가락 끝.
때로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한 감각들은 불시에 선명하게 되살아나곤 했다. 잊기 싫어 몸부림칠 때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허무하게 사라지던 그 감각들이, 잊어야 한다고 마음먹었을 때면 다시 찾아오는 아이러니는 잔인했다.
재희는 그 불가항력 앞에 항상 순순히 굴복했다. 잊어버리는 건 언제라도 좋았다. 내일일 수도 있었고, 모레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아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무심코 짚은 소파의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서늘한 가죽 커버의 감촉이 그 부재를 증명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재희는 고개를 숙였다. 긴 숨을 내뱉자, 테이블 위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국제전화였다. 잠시 핸드폰에 뜬 번호를 보고 있던 재희는 재생 정지 버튼을 누르며 전화를 받았다.
『쉬는 날이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재희는 머릿속으로 마지막 통화가 언제였는지 되짚었다. 아마 두 달쯤 전. 빈말로라도 살뜰한 아들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네, 어머니.”
『토요일이지? 점심은 먹었고?』
“네.”
뻔한 거짓말이다. 어머니가 모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스튜디오 촬영이 있는 날마다 팀원들이 연예인보다 더 말랐다며 성화였다. 화면으로 보기에도 티가 안 날 리 없었다. 죽으려고 그러는 거면 굶지 말고 차라리 배 터져 죽는 게 낫지 않느냐며 다그치던 정언을 떠올린 재희는 미간을 눌렀다.
『그래. 아들 얼굴 일 년에 한 번 보기도 힘드네.』
웃고는 있지만 서운한 기색이 역력한 말투였다. 그 심정을 모르는 게 아니기에 가슴이 무거워졌다.
“죄송해요.”
달리 답할 말도 없었다. 핸드폰 너머에서 짧은 침묵이 지났다.
『그냥 했어. 어제 꿈에서 너 보니까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제가 먼저 해야 되는데…….”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하더라. 텔레비전에서 너 나오는 거 보면 잘 지내나 보다 해.』
“아버지는요?”
『잘 계시지.』
언제나 반복되는 여상한 대화였다. 어머니가 말했다.
『언제 잠깐 왔다 가. 아버지가 너 보고 싶다 소리를 다 한다.』
“일이 워낙 많아서요. 회사도 시끄럽고요. 좀 안정돼야 휴가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휴가 내면 올해는 한 번 갈게요.”
장담하지 못하는 공수표도 늘 같았다. 그러나 말이 없는 아버지가 자신을 보고 싶다고 한다는 건 뜻밖이었다. 머릿속으로 몇 달 앞까지 이미 꽉 채워진 스케줄을 생각하며 대답하자, 어머니가 웃었다.
『거짓말인 거 알아도 또 속네.』
그 단어들은 표면을 맴돌았다. 어머니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재희는 잘 알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