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31
31화.
“언론 통제 철저했죠. 그리고 솔직히 재개발할 때 어디서나 투기 목적으로 애초에 설계하고 들어온 사람 말고 기존 원주민들한테는 만족할 만큼 보상 이루어지는 경우가 드물어요. 재개발 시 원주민 입주 비율이 5퍼센트 미만인 경우도 흔하고, 보통은 20퍼센트 내외로 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런 케이스라고 생각을 하고 다들 그냥 적당히 다루고 넘어간 거죠. 게다가 누가 변순철 사위 이름을 매스컴 타게 만들겠어요? 장인이 그거 두고 보겠습니까?”
웃고 있었으나 현성의 말투는 신랄했다. 정언은 메모를 하며 말을 이었다.
“그 지역에서 얘기 들어 보니 엄대진이 상당히 재미를 봤다고 하던데요.”
“엄대진이 그렇게 목숨 건 데는 이유가 있었겠죠. 시세 차익 상당히 봤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아마 차명으로 투자했을 겁니다. 재산 공개 때 증거가 안 나왔으니까.”
“서온건설 비리 의혹도 있잖아요.”
정언의 말에 현성이 소리를 내어 웃고는 난처한 표정을 했다.
“서온건설 게이트 말씀하시는 거죠? 근데 솔직히 이건 제가 뭐라고 말을 못 하겠어요. 검찰에서 이미 무혐의가 난 건이고, 그쪽은 뭐 일반인들이 보기엔 아, 이거 백 프로다, 이렇게 생각을 해도 법적으로는 또 문제가 다를 수 있고 하니까요. 그건 제가 여기서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하기가 좀 곤란해요. 서온건설에 엄대진까지 엮이면 아무래도, 아시죠?”
정언은 이해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돌렸다.
“보상 과정 문제는 해결할 방법이 없고요?”
“보상은 한 번 이루어지면 재보상이 되기가 힘들어요. 일단 여러 군데서 감정 평가를 하니까. 보상해 주는 측에서도 손해 볼 짓은 안 하려고 하고요. 100원 주고 사서 90원에 팔면 뭐하겠어요. 10원 주고 사서 100원에 팔고 싶은 게 사람 마음 아닙니까. 재보상이 된다 해도 기존 보상금의 10퍼센트 내외 금액인 게 보통이에요.”
“완전히 보상 금액을 재책정하는 경우도 있나요?”
“아, 그건 진짜 드문 케이스예요. 거의 뭐 불가능하다고 봐야 하고, 특히 이런 상황에서는. 싸우려고 해도 이게 있어야 싸우잖아요.”
현성이 엄지와 검지 끝을 붙여 동그라미 표시를 해 보였다. 정언은 펜 끝을 다이어리 위에 톡톡 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규형은 회사 내부의 사람이었기에 이런 사정들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재희의 말대로 그는 일개 현장 과장에 불과했다. 누군가 그런 평범한 사람을 죽였다면 왜 그래야 했을까. 짙은 안개로 차선조차 보이지 않는 도로 위를 달리는 기분이었다.
현성이 다시 한 번 시계로 눈을 주는 것을 알아차린 정언은 지혁에게 촬영 끊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일단 알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잠깐 뵈려고 오시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시간 더 못 내 드려서 제가 죄송하죠. 자세한 얘기는 메일이나 전화로 마저 하시죠. 그리고 이 건이면 아마 상생변 최유림 변호사한테 들을 얘기가 좀 있을 겁니다.”
현성이 자기 핸드폰을 꺼내 연락처를 뒤적이더니 명함 뒤에 전화번호를 하나 적어 정언에게 건넸다. 상생변은 ‘상생사회를 꿈꾸는 인권변호사 모임’의 준말이었다. 에서도 상생변 소속의 변호사들과 몇 차례 함께 촬영을 한 적이 있었다.
정언은 그 번호를 다이어리로 다시 옮겨 적으며 물었다.
“최유림 변호사님이 이 건하고 관련이 있나요?”
“지금 원주민 시위가 반석교회라는 개척교회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거기 신찬호 목사가 최변하고 잘 아는 사이라 최변이 법적 자문을 하는 걸로 알거든요. 일단 관련 얘기 더 듣고 싶으시면 이쪽으로 한 번 연락해 보세요.”
“감사해요. 또 연락드릴게요.”
“아니에요. 오늘은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에 식사라도 같이하시죠.”
가벼운 악수를 건넨 현성은 바로 미팅룸을 나갔다. 지혁과 함께 촬영 장비를 정리한 정언은 사무실로 다시 올라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우 피디, 지금 이거 바로 인코딩 돌리고 프리뷰 요청 폴더로 올려 줘.”
지혁에게 말한 정언은 자리에 앉았다. 누가 뇌에 추를 몇 개는 매달아 놓은 기분이었다. 그나마 윤의 차에서 잠시 눈이라도 붙인 덕분에 새벽보다는 상태가 조금 낫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정언은 비어 있는 윤의 자리를 흘끔 보았다. 퇴근 시간이다 보니 홍제동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터였다.
저녁이라도 먹이고 보낼 걸 그랬나, 하고 무심코 생각하자 낮의 일이 머릿속을 지났다. 편의점에서 자신이 던진 농담에 당황하던 윤의 얼굴을 떠올린 정언은 혼자 픽 웃었다. 남 당황하게 하는 소리는 잘도 하면서, 본인이 그런 소리를 듣는 데는 면역이 없는 모양이었다.
“정언, 뭐 좋은 일 있어?”
갑자기 귓가에서 속삭이는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정언은 퍼뜩 고개를 돌렸다. 민혜였다. 민혜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정언을 내려다보더니 큭큭거렸다.
“혼자 실실 웃길래 뭐 좋은 일 있나 했지. 녹음 파일 보낸 건 일단 지금 프리뷰하면서 같이 풀어 달라고 맡겼어. 개수가 좀 되던데.”
혼자 실실 웃길래, 하는 민혜의 말을 듣자 괜히 귀 끝이 달았다. 윤에게 뭐 좋은 일 있냐, 왜 맨날 실실 웃냐고 한 소리 한 주제에 자신 역시 그랬다는 게 민망해진 탓이었다. 더구나 다른 것도 아니고 윤을 떠올리다 그러고 있었다는 건 더 그랬다. 정언은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아, 나 거기 있는 부동산 다 돌았잖아요. 내 집 구할 때도 딱 두 군데 보고 결정했는데, 부동산만 한 스무 군데 가본 거 같아. 거기 오피스텔만 서른 개는 본 거 같고.”
“김 피디랑 신혼부부 행세는 실컷 했겠네?”
“어떻게 알았어요? 파일 벌써 들어 봤어요?”
깜짝 놀란 정언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민혜가 배를 잡고 웃었다.
“아니, 지금 그거 들을 시간이 어딨다고. 니들이 뭐라고 하고 돌아다녔겠어, 척하면 척이지. 김 피디 연기 좀 하든?”
“데뷔나 하지 피디는 왜 했나 싶던데요.”
농담처럼 말했지만 반쯤은 진담이었다. 천연덕스럽게 신혼부부 행세를 하던 윤을 떠올리자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피식 웃는 소리가 새었다. 민혜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하며 팔짱을 끼었다.
“어머, 그래? 안 그럴 거 같던데. 사람이 깡이 있어서 그런가? 에선 그런 짓 할 일 없었을 거 아냐. 김 피디 스펙 좋고 비주얼 좋고 피지컬 좋잖아. 왜 피디 지망했을까? 대기업 다니다 왔다며, 심지어. 아나운서 지원했어도 됐을 거 같은데.”
무심히 민혜의 말을 흘려듣던 정언은 문득 돌부리처럼 걸리는 말에 미간을 좁혔다.
“대기업 다니다 왔다고요?”
“몰랐어? 그러니까 이제 겨우 2년 차지. 나라그룹 다녔다던데 어디 계열인지는 모르겠네.”
나라그룹이라면 대한민국 10대 대기업 중 한 곳이었다. 윤이 굳이 잘 다니던 대기업을 때려치우고 방송국 피디로 들어올 타입이라고는 도무지 생각되지가 않았다. 정언은 에이, 하며 의심의 눈초리로 민혜를 보았다.
“진짜로? 그건 어떻게 알았어요?”
“이력서에 다 있잖아.”
“이력서는 언제 봤는데요?”
황당하다는 투로 되묻자 민혜가 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정언 빼고 우리 팀에서 안 본 사람 없을걸?”
다들 남의 일에 왜 그렇게 관심이 많을까. 속으로 생각하기 무섭게 민혜가 마치 머릿속을 읽은 양 정언에게 면박을 주었다.
“관심 좀 가져, 귀한 부사수한테. 김 피디 같은 인재가 어딨다고 그래.”
“인재인 건 어떻게 알고요?”
“이게 인재잖아, 이게.”
민혜가 손으로 자기 얼굴을 두어 번 훑었다. 정언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하자 민혜가 어머머, 하며 손가락질을 했다.
“그럼 아니야?”
머릿속으로 윤의 얼굴이 지나가, 정언은 잠시 머뭇거렸다. 하기야, 곰곰이 생각하니 무슨 흠을 잡고 싶어도 딱히 그럴 만한 데가 없는 얼굴이기는 했다. 팀의 최장신에다 에 어울리지 않게 방글방글 잘도 웃고 다니는 것 역시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본다면 결코 단점이라고 꼽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니, 아니라는 건 아닌데 뭘 또 인재라고까지…….”
다 가지긴 했네, 하고 생각하며 모호하게 말끝을 흐리는 정언의 얼굴에 민혜가 혀를 찼다.
“정언은 강 피디한테 너무 익숙해져서 그래.”
정언이 재희를 좋아했다는 건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때문에 가끔 술자리에서 선배들이 그걸 가지고 정언을 놀릴 때도 있었다. 그러나 정언은 절대 부끄러워하는 법이 없었다. 그게 왜요, 하고 잘도 받아치는 통에 그런 놀림도 곧 시들해졌다.
당사자인 재희 자신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재희는 늘 선을 그었고, 정언도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건 연수의 존재 때문이기도 했지만, 연수가 아니었더라도 정언은 재희가 원하지 않는 이상 더 다가갈 마음은 없었다.
재희는 정언에게 어미오리 같은 존재였다. 정언은 의 모든 것을 재희에게서 배웠다. 민혜의 말처럼 재희는 이제 ‘익숙해진’ 사람이었다.
오래된 감정들은 처음처럼 민감하지 않았다. 어릴 때는 스치기만 해도 상처 입을 만큼 날이 섰던 마음이 어느덧 무뎌져 있었다. 간혹 느끼는 아픔조차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로.
“아니, 선배가 어디가 어때서요?”
정언이 짐짓 발끈하자 민혜가 손가락을 흔들었다.
“강 피디도 뭐 그만하면 괜찮긴 한데, 스마트하고. 근데 사람이 예민한데 안 예민한 척하려는 게 얼굴에서 티가 나잖아. 진짜 남자는 무던한 게 최고라니까. 강 피디처럼 매사에 그렇게 꼬장꼬장하고 그러면 사람이 말라 죽어요, 말라 죽어.”
“송 작가가 나랑 재혼할 거 아니면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거 같은데?”
정언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 등 뒤에서 재희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민혜가 자리에서 메뚜기처럼 펄쩍 뛰더니 뒤를 돌아보고는 성질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