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310
310화
어머니는 재희가 이 집에서 혼자 사는 것을 탐탁찮게 여겼다. 연수와의 삶을 준비하던 신혼집인 탓이었다. 발품을 오래 팔아 구한 집이었다. 서로의 취향으로 가구를 맞추고 인테리어를 했다. 소품 하나까지도 연수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건 당연했다.
가족들은 오래 전부터 재희가 방송국 일을 그만두고 미국에서 자리 잡기를 바랐다. 연수가 죽은 뒤로는 더 그랬다.
아버지는 재희가 미국에 들어오기만 한다면 무슨 지원이든 하겠다고까지 말했다. 학교를 다시 다녀도 좋고, 사업을 해도 좋고, 가게를 내도 좋다고 했다. 만나 보라고 들이민 여자만 수십 명이었다. 그러나 재희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재희야.』
“네.”
무슨 말인가를 하려던 듯 잠시 사이를 둔 어머니가 당부했다.
『……뭐 잘 챙겨 먹고, 건강하고.』
“어머니도요.”
재희가 대답하자 그래, 하는 말과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짧은 통화가 끝나자 집 안은 다시 적막하게 가라앉았다. 재희는 소파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멈춰 있던 화면에 눈을 주었으나 더 이상 볼 기분이 나지 않았다.
피곤했다. 몸이 그대로 바닥으로 꺼져 들어가는 것 같았다. 재희는 손을 뻗어 테이블 위를 굴러다니는 수면제 병을 집어 들었다. 처음에는 매일, 그리고 사흘, 나흘, 일주일, 보름, 한 달. 수면제가 필요한 주기는 점차 길어졌지만 여전히 잠이 들기까지의 시간은 괴로웠다.
물도 없이 입 안에 밀어 넣은 작은 알약이 이 사이에서 오독거리며 부서졌다. 마른 혀 위로 아릿하게 쓴맛이 번졌다. 머릿속이 곧 몽롱해졌다. 흐릿해지는 시야 사이로 멈춰 있는 잉그리드 버그만의 얼굴이 서서히 그 또렷한 윤곽을 무너뜨렸다.
「카사블랑카가 무슨 뜻인지 알아?」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갑작스럽게 되살아난 언젠가의 기억 속 파편이었다. 어느 주말 밤이었다. 침실의 열린 문 너머로 거실에서 흘러나오는 의 대사들이 멀게 넘어오던 순간.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맞댄 몸은 따뜻했다. 어두운 침실 안에 아직 남은 열기가 떠돌았다. 잠든 줄 알았던 연수가 문득 그렇게 물었었다. 재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하얀 집. 모로코 카사블랑카엔 옛날부터 하얀 집들이 많았대.」
재희는 대답 대신 부드러운 머리칼을 만졌다. 흰 어깨와 목덜미 위로 입을 맞추고 손끝으로 귓가와 뺨을 덧그리며 열중하는 사이 연수의 단어들은 그대로 흘러갔다. 연수가 짐짓 엄한 얼굴을 했다.
「너 내가 방금 뭐라고 했는지 말해 봐.」
「관대하게 용서해 주시죠. 하나도 안 듣고 있는 거 알았어?」
변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순순히 자백하는 재희에게 연수는 눈을 흘겼다. 재희의 두 뺨을 잡아 늘린 연수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코앞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눈동자가 맑았다. 만져 볼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을 만큼. 연수는 턱을 괴며 재희의 얼굴을 만지다 손을 멈췄다.
「신혼여행은 거기로 갈까?」
「침대만 있으면 아무 데나 상관없어.」
무심하게 대답한 말에 연수는 짐짓 한숨을 쉬었다.
「너 이러는 거 남들이 알아야 되는데.」
「너만 알라고 이러는 거야.」
연수가 웃음을 터트렸다. 가는 팔이 허리를 안아 왔다. 품으로 파고드는 몸을 당겨 안자 그 동그란 눈매가 휘었다. 연수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때 분명 무슨 말인가를 했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떠올려 보려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필름이 끊긴 영화처럼 기억의 한 장면은 순식간에 암전됐다. 재희는 팔을 올려 눈가를 가렸다. 의식이 아득하게 잠겨들었다. 잠들기 전이면 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다시 눈을 뜰 수 있을까.
그러나 결론은 언제나 같았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고.
* * *
눈을 뜨자 장식장 위의 디지털시계에 선명한 글자들이 하나씩 읽혔다. S, U, N, AM, 7:02. 일요일. 재희는 기억을 더듬었다. 잠든 건 아마 토요일 오후였을 것이다. 반나절이 그대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은 늘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소파 위에서 그대로 웅크리고 잠들었던 탓인지 목이 아팠다. 감기에 걸리면 안 되는데, 속으로 중얼거린 재희는 몸을 일으켰다. 두통이 있었다. 허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던 핸드폰의 표시등이 소파 아래서 깜빡였다. 몇 통의 부재중 전화는 대부분 중요하지 않았다. 취재 상황과 스케줄을 보고하는 메시지들을 확인한 재희는 긴 숨을 뱉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재희는 냉장고에서 꺼낸 우유 한 팩을 뜯고 시리얼을 부었다. 입 안에 남은 수면제의 흔적이 아직도 썼다. 종이를 씹듯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시리얼 한 그릇을 비운 재희는 욕실로 들어섰다.
샤워부스 안에서 뜨거운 물을 틀자 거울이 흐려졌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편이 좋았다.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서 잠시 머릿속이 가라앉았다. 재희는 벽을 짚은 채 고개를 숙이며 바닥을 보았다.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은 세찬 빗소리를 냈다.
그날은 유독 심하게 비가 내렸다. 공항으로 가는 길은 많이 막혔다. 차체를 두드리는 빗소리와 섞여 마일스 데이비스의 앨범이 내내 차 안에서 돌아갔다. 연수도 좋아하는 앨범이었다. 농담처럼 서로 그건 외울 만큼 들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날 이후 재희는 단 한 번도 그 앨범을 다시 듣지 않았다. 불현듯 ‘Bye bye blackbird’의 멜로디가 쏟아지는 물줄기 사이로 떠도는 환청이 들렸다. 잠시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있던 재희는 급히 수전 레버를 내렸다. 막힌 숨이 터지며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멍하니 서 있던 재희는 고개를 들었다. 흐릿해진 거울 너머로 지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짧은 한숨을 쉰 재희는 서둘러 면도와 양치를 마치고 욕실을 나섰다. 젖은 머리를 털며 옷장 문을 열자 무채색의 옷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동안 눈으로 정갈하게 걸린 옷을 훑어보던 재희는 자주 입는 블랙 진에 하늘색 스트라이프 셔츠를 골랐다. 한동안 이렇게 밝은 옷은 거의 입은 적이 없었다. 공들여 머리를 만지고 향수를 뿌리자 베르가못과 만다린 오렌지, 블랙커런트의 산뜻한 탑노트가 흩어졌다.
커튼을 젖히고 창을 열기 무섭게 아직 차가운 공기가 순식간에 집 안으로 밀려들었다. 재희는 창가에 손을 짚으며 밖을 보았다. 하늘이 파랗게 보였다. 멀리 한강변 너머까지 또렷했다. 드라이브하기엔 더할 나위 없는 날씨였다.
창을 닫은 재희는 옅은 회색 코트를 입었다. 차 키를 집어 들며 집을 나서는 등 뒤로 도어록이 걸리는 소리가 희미했다. 아파트 단지를 나선 재희가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단지 입구의 꽃집이었다.
재희는 가게 문을 열었다. 일요일 이른 오전의 손님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커피를 마시던 젊은 아가씨가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난방이 잘 된 작은 가게 안에서 생화의 생생하고 날카로운 향과 희미한 물비린내가 밀려들었다. 안녕하세요, 하고 가벼운 인사를 건네자 아가씨가 물었다.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붙임성 좋은 말투에 재희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꽃다발 하나 하려고 하거든요. 작은 거.”
“여자 친구분한테 선물하시는구나.”
넘겨짚은 말은 그다지 기분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아셨어요?”
농담처럼 되묻자 아가씨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호들갑을 떨었다.
“에이, 딱 봐도 데이트하러 가시는데요. 여자 친구분 좋으시겠다. 무슨 꽃 좋아하세요? 장미로 드릴까요? 너무 흔하면 라넌큘러스도 좋은데. 리시안셔스도 새벽에 들어왔어요. 좀 특이한 거 좋아하시면 델피늄이랑 디디스커스 같이하셔도 예뻐요.”
발음조차 낯선 꽃들의 이름이 쏟아졌다. 재희는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카사블랑카 있나요?”
“카사블랑카요?”
눈을 동그랗게 뜬 아가씨는 곧 웃었다.
“되게 미인이신가 봐요. 카사블랑카 잘 어울리는 분들은 다 예쁘시더라고요.”
몸을 돌린 아가씨가 곧 수많은 꽃들 사이에서 새하얀 카사블랑카 몇 송이를 뽑아냈다. 꽃을 배열하고 포장지를 두르는 손길이 야무졌다. 마지막으로 흰색과 핑크색 리본을 꼼꼼하게 묶은 아가씨가 재희에게 꽃다발을 안겨 주었다.
“데이트 즐겁게 하세요.”
결제하고 돌아서자 등 뒤로 싹싹한 인사가 따라왔다. 네, 하고 대답한 재희는 품에 안긴 꽃다발을 내려다보았다. 찬 공기 사이로 백합 특유의 향이 싸하게 번졌다. 주차장에 세워 둔 차에 시동을 건 재희는 조수석에 꽃다발을 내려두고는 카 오디오의 버튼을 눌렀다. 꽤 오랫동안 듣고 있는 델로니어스 몽크의 앨범이 익숙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일요일 이른 오전의 도로는 한산했다. 40분쯤 달려 도착한 곳은 한적한 공원이었다. 차를 세운 재희는 꽃다발을 들고 내렸다. 이미 자주 왔던 곳이라 길은 익숙했다. 공원을 가로질러 안쪽으로 들어가자 큰 벽처럼 세워진 야외 봉안당이 눈에 들어왔다.
일정한 규격대로 나눠진 칸들이 끝없이 뻗어 있었다. 모두 똑같이 생긴 칸이었으나, 재희의 시선은 정확히 한곳에 머물렀다.
지연수.
이름 세 글자만이 적힌 조그마한 칸 위에 손을 대자 대리석의 싸늘한 감촉이 스몄다. 연수의 어머니는 생전에도 답답한 걸 못 참던 애가 납골당 안에 갇혀 있는 건 싫다며 일부러 야외 봉안당이 있는 곳을 골랐다고 했다. 연수가 있는 자리는 볕이 잘 드는 남향이었다.
“날씨 진짜 좋다.”
들을 사람이 없는 말을 중얼거린 재희는 비어 있는 헌화대 위에 꽃다발을 내려놓으며 곁에 걸터앉았다. 그 작은 칸 안에 연수가 있다는 걸 아직도 실감할 수 없었다.
“그새를 못 참고 그렇게 보고 싶다고 시위를 하냐, 넌.”
짐짓 투정을 부린 재희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차가운 공기 속으로 입김이 하얗게 흩어졌다.
“정말 바빴다니까. 알잖아. 일 끝나고 이번 주에 처음 쉬는 거였는데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그러다 나 진짜 너 보고 싶어서 미치겠다고 확 죽어 버리면 미안해서 내 얼굴 어떻게 볼래?”
나지막한 목소리 끝이 잠겼다. 소파에서 잠들었던 탓일 거라고 재희는 애써 생각했다.
“일요일 아침부터 엄청 멋 부리고 왔으니까 좀 용서해 줘.”
재희는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모래처럼 흘러내리는 머리칼 사이로 손목에 뿌린 향수의 향이 옅게 떠돌았다. 오래전 연수가 선물한 것이었다. 이런 거 안 쓴다고 투덜거리자 연수는 깔깔대며 웃었다.
「그러니까 나 만날 때만 뿌려. 다른 여자 좋은 일 시키지 말고.」
재희는 지금까지 그 말을 단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 그 농담 같은 말이 그렇게 되리라고는 생각한 적 없었다. 아마 연수도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오랫동안 침묵하던 재희는 입술을 달싹였다.
“연수야.”
오랜만에 불러 보는 이름은 날이 선 칼처럼 입 안을 굴렀다. 싸늘한 침묵이 고요한 추모공원 안을 지나쳤다.
“연수야, 지연수.”
재희는 거의 숨소리처럼 속삭였다. 듣는 사람이 없는데도 그 이름을 크게 말할 수 없었다. 문득 코트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재희는 핸드폰을 꺼냈다. 액정에 정언의 이름이 선명했다. 잠시 그 이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재희는 전화를 받았다.
『쉬는데 아침부터 미안해요. 스케줄 확인 때문에…….』
전화를 받기 무섭게 용건부터 꺼내던 정언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밖이에요?』
어떻게 알았을까. 가끔 깜짝 놀랄 정도로 눈치가 빠른 정언이었다. 응, 하고 대답하자 정언이 놀란 듯 물었다.
『이 시간에? 어딘데?』
“데이트.”
『데이트?』
되물은 정언은 혀를 찼다.
『또 어떤 여자 인생 망치는 중인데요?』
“그래서 인생 망치기 싫으면 나 그만 좋아하라고 설득하는 중이야.”
핸드폰 너머에서 웃는 소리가 돌아왔다.
『제발 그래야 되는데.』
“내가 너무 매력 있다 보니까 쉽지가 않다. 이따 다시 전화할게.”
그래요, 하고 대답한 정언이 전화를 끊었다. 재희는 끊긴 전화를 한동안 내려다보다 핸드폰을 다시 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발끝으로 무심히 바닥을 두어 번 찬 재희는 고개를 들었다.
“들었지? 너 이제 나 그만 좋아하면 안 되냐?”
대답 없는 물음이었다. 재희는 한동안 침묵했다.
“난 그럴 수가 없으니까, 너라도…….”
긴 사이를 두고 중얼거린 단어들은 허무하게 떨어졌다. 열없이 웃은 재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텅 빈 공원 안에 하얀 햇살이 쏟아지며 눈부시게 부서졌다.
이미 완결된 시간들은 과거에 머물러야 했다. 그러나 재희는 자신의 일부가 그 박제된 시간 안에 갇혀 버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지한 채로 영원히 유지되는 어떤 삶의 순간들. 거기 계속해서 남아 있는 한 흐르지 않는 시간들은 자신을 이대로 서서히 죽여 갈 게 분명했다.
그러나 알면서도 떠난다는 건 불가능했다. 창문도, 문도 없는 성벽을 쌓아올리며 재희는 기꺼이 여기 자신을 가두기를 선택했다. 고통은 늘 지독하고 달콤했다. 벗어날 방법 같은 건 생각해 본 적조차 없었다.
재희는 오랫동안 그대로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언제나와 같은 어느 하루였다.
[완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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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탐사기획 스트레이트』 2회, , 2018.3.4. 외
TBS FM 『김어준의 뉴스공장』
유튜브 채널 마봉춘세탁소,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겨레TV 『김어준의 파파이스』, NewBC 『뉴스신세계』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