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ir RAW novel - Chapter 33
33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제 생일이랑 애들 생일, 결혼기념일은 꼭 챙겼는데 리아 생일이랑 결혼기념일에도 출장이라고 돼 있어서요. 그런데 제 기억에 이날도 일찍 퇴근했던 것 같아서…… 당일로 잠깐 본사 나갔다 오고 그런 것도 출장이라고 썼나?”
“혹시 핸드폰으로 따로 일정 관리하신 건 없었나요?”
“글쎄요, 잠깐만요.”
자리에서 일어난 희경이 안방에서 규형의 핸드폰을 가지고 나왔다. 전원을 켠 희경이 윤에게 규형의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별생각 없이 핸드폰을 받아 들었던 윤은 잠금 화면을 한쪽으로 밀었다. 바로 메인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 잠금 안 해놓고 그냥 쓰셨나 봐요?”
“아뇨. 예전에 비밀번호 썼는데…… 수아 생일로 했었거든요. 귀찮아서 풀었나?”
“자주 쓰시면 매번 비밀번호 치기 귀찮아서 그러셨을 수도 있죠.”
지문 인식이나 홍채 인식 같은 기능이 들어가지 않은 구형 핸드폰이었기에,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윤은 앱 화면을 살펴보았다. 따로 설치한 일정 앱은 없었고, 기본으로 제공되는 일정 앱에는 가족 생일과 결혼기념일 외의 다른 것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아마 혹시나 잊어버릴 때를 대비해 알림용으로 설정해 놓은 듯했다.
“혹시 제가 다른 앱 좀 열어 봐도 될까요?”
“그럼요.”
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은 규형이 설치한 앱을 하나하나 훑었다. 스마트폰을 열심히 활용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듯, 기본 설치된 앱 외에 딱히 특이한 점은 없었다. 눈에 띄는 것은 포털 사이트의 블로그 앱 정도였다.
앱을 누르자 로그인된 상태 그대로인 규형의 블로그가 가장 먼저 떴다. 지난번에 왔을 때 받은 주소로 이미 본 블로그였다. 윤은 핸드폰을 이리저리 돌려 보다 입을 열었다.
“핸드폰이 좀 된 기종이네요.”
“네. 한 삼사 년 썼을 거예요. 이 폰이 사진은 잘 나오는데 오래돼서 그런지 블로그 올릴 때 자꾸 느려진다고, 좋은 걸로 바꿔야겠다고는 했었어요. 요새 핸드폰은 사진 다 잘 나오니까 아무거나 써도 된다고 했는데, 워낙 뭐 하나 사기 전에 이것저것 다 따져 보는 사람이라서요.”
“사진 잘 나오는 게 중요하셨군요?”
“핸드폰으로 애들 사진이랑 동영상 찍는 걸 제일 많이 해서요.”
“아, 네.”
하기야 그렇게 부지런히 아이들 이야기로 블로그를 채웠다면 당연한 일일 터였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윤은 불현듯 손을 멈췄다.
갑자기 어딘가에 생각이 미친 윤은 급히 갤러리 앱을 열어 보았다. 수천 장도 넘는 사진과 수백 개는 될 듯한 동영상이 목록에 나타났다. 아래로 목록을 계속 내리자 삼 년 전의 날짜가 눈에 띄었다. 그때부터 계속해서 저장한 자료들이 분명했다.
윤은 즉시 설정 메뉴에서 디바이스 정보를 확인했다. 핸드폰의 저장 용량은 고작 16기가에 불과했다. 이삼 일에 한 번씩은 수십 장씩 사진을 찍어 가며 블로그를 올리고, 아이들의 사진과 동영상으로 핸드폰을 가득 채우는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적은 용량이었다.
윤은 바로 핸드폰의 뒷면 커버를 열어 메모리카드 슬롯을 살폈다. 슬롯은 빈 채였다. 핸드폰에 클라우드 앱 같은 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그가 매번 찍은 사진을 지워 가며 핸드폰을 썼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희경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윤이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혹시 남편분이 원래 메모리카드 같은 건 안 쓰셨나요?”
“그런 건 잘 모르겠는데…….”
“경찰에서 받으셨다고 했죠? 그때부터 전혀 손 안 대시고 이대로 두신 건가요?”
“네. 그냥 폰 안 꺼지게 충전만 해 두고 있었어요.”
희경이 영문을 몰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서늘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왜일까. 순간 입이 바짝 말랐다.
부비트랩.
지금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그 순간 뭔가 터질 거라는 직감이 스쳤다. 그것을 알면서도 더 나아가야 하는지, 멈춰야 하는지 결정할 수 없었다. 이 이상한 예감이 어쩐지 두려웠다. 윤은 잠시 갈등했다.
윤의 갈등이 멈춘 것은 이 자리에 자신 대신 정언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했을 때였다. 만약 정언이라면. 윤은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재희 앞에서 팩트를 가져오겠다고 말한 건 자신이었다. 뱉은 말은 책임져야 했다.
이건 예감일 뿐이다. 윤은 스스로에게 뇌었다. 무언가 터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뭐든 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었다. 윤은 숨을 들이쉬며 희경에게 물었다.
“그날 받으신 남편분 물건이 뭐든, 옷이든 가방이든 상관없으니 혹시 살펴보신 적 있습니까?”
“왜 그러시죠?”
윤의 표정이 굳어진 탓인지, 희경이 긴장한 티가 역력한 얼굴로 되물었다. 윤은 자기 핸드폰을 꺼내서는 슬롯에서 메모리카드를 빼 희경에게 보여 주었다.
“메모리카드가 없어진 게 아닌가 싶어서요. 이렇게 생긴 거 보신 적 없습니까?”
“잘 모르겠어요.”
“한 번 찾아봐 주시겠어요?”
“네.”
희경이 후다닥 안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윤은 박스 안의 내용물을 모두 바닥에 쏟아 놓고 하나하나 살폈다. 다이어리 커버 안쪽이며 필통 안, 서류철과 박스 안까지 샅샅이 살폈지만 메모리카드 같은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윤은 지저분한 복사 용지 박스를 다시 한 번 돌려가며 살폈다. 모서리가 구겨지고 발자국이 선명한 박스였다. 누군가 일부러 발로 찬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건 그때였다. 지나치게 깨끗한 비품들에 비해 박스만 이렇게 더러워질 이유가 있었을까.
윤은 박스를 뒤집어 보았다. 아래쪽 면에는 제조일자가 쓰여 있었다. 공장에서 출고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제품이었다. 그렇다면 실제로 규형이 이 박스를 사용한 건 2주도 안 되는 기간일 것이 틀림없었다. 물건을 그렇게 아껴 가며 쓰는 사람이 박스만 험하게 다룬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아무것도 없어요. 혹시 중요한 건가요?”
안방에서 나온 희경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으나 윤은 그 말도 다 듣지 못한 채 텅 빈 박스 안을 들여다보았다. 한참 아무것도 없는 박스를 보고 있던 윤은 옆에 뒤집힌 채 놓여 있던 뚜껑으로 눈을 돌렸다.
두께가 대략 5밀리미터쯤 되는 두꺼운 박스지로 만들어진 평범한 뚜껑이었다. 뚜껑을 들어 보던 윤은 다음 순간 눈을 가늘게 떴다. 뒤집힌 뚜껑의 안쪽 단면에 1.5센티미터나 될까 말까 한 흠집이 난 것을 알아차린 탓이었다.
그 흠집은 약간 벌어져 있었다. 조밀한 박스지의 단면에는 어울리지 않는 흔적이었다. 자세히 보기 전에는 눈에 띄지 않지만, 일부러 칼로 그은 흠집이 분명했다. 윤은 거실 바닥에 있던 볼펜 하나를 집어 들어 그 흠집 사이를 벌려 보았다.
“그게 뭐죠?”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몸을 숙이고 있던 희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순간 볼펜심 끝으로 뭔가 딱딱한 것이 걸렸다. 심장이 덜컥 움직였다. 잠시 손을 멈췄던 윤은 벌어진 틈 사이에 끼워져 있던 물건을 볼펜 끝으로 끄집어냈다.
걸려 나온 것은 스마트폰에 흔히 쓰는 마이크로 SD 카드였다. 겨우 손톱만 한 크기의 작은 메모리카드가 박스 뚜껑의 흠집 사이에 끼워져 있을 이유가 무엇일까. 머릿속이 완전히 새하얘졌다. 윤은 멍하니 그 메모리카드를 들여다보았다.
우연이라고 우기고 싶었다. 이건 말도 안 된다고,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우연은 불가능했다. 이 메모리카드가 저절로 여기 있을 수는 없었다. 분명히 의도된 것이었다. 누군가가, 아마도 규형이, 일부러 누구도 찾지 못할 만한 곳에 급하게 숨기기 위해 이랬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때 박스의 발자국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그 발자국이 갑자기 새롭게 보였다. 누군가가, 이걸 찾고 있었던 건 아닐까. 텅 빈 사무실에서 검은 그림자가 박스를 걷어차 열고 안을 뒤지는 모습이 마치 본 것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났다.
“제가…… 잠깐 좀 봐도 될까요?”
윤이 겨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고, 희경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못하고 그를 빤히 응시했다. 윤은 서둘러 자기 핸드폰의 슬롯에 메모리카드를 넣었다.
외장 메모리로 들어가자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진과 동영상, 그리고 알 수 없는 파일 여러 개가 목록에 나타났다. 문서 파일도 있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성 파일도 수십 개는 되어 보였다.
“그이 건가요?”
윤은 희경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목록 가장 위쪽의 음성 파일을 눌렀다. 볼륨을 올린 윤은 마른침을 삼키며 재생 플레이어가 실행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낯선 목소리가 핸드폰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저도 더는 힘들어서 못 하겠습니다. 저 집에 애가 둘입니다. 아내하고 애 둘 키우겠다고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술에 취한 듯 발음이 약간 뭉개지는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희경이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애기 아빠예요. 우리 애기 아빠예요.”
손이 부들거렸다. 통화 녹음 파일이 분명했다. 손끝이 차가워져 윤은 중지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짧은 정적 후 다른 목소리가 돌아왔다.
『박 과장, 지금 사무실이야? 다음 승진에서는 절대 안 밀리게 해 준다잖아.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야.』
『처음에는 한 번만, 그다음에는 또 한 번만, 한 달만, 삼 개월만 더, 그렇게 일 년을 했습니다! 이건 사람 사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승진해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지금 와서 발 빼는 건 더 위험해. 이런 일인 줄 모르고 시작했어?』
『몰랐습니다. 아시잖아요. 저 진짜 몰랐습니다.』
『박 과장, 지금 취한 것 같네. 내일 얘기하자고.』
짧은 통화는 그것이 끝이었다. 윤은 다른 파일을 눌러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화면을 가득 채운 파일 목록이 아득했다. 뭔가 잘못됐다는 직감이 들었다. 누군가 찬물을 머리 위에서부터 쏟아부은 것처럼 온몸이 얼어붙었다.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윤은 숨을 들이쉬었다.
“제가…… 제가 이 메모리카드 저희 팀으로 가져가야 할 것 같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반드시 돌려드리겠습니다. 자료는 절대로, 하나도 손실 없이 돌려드릴 겁니다. 부탁드립니다.”
목소리 끝이 가닥가닥 갈라졌다. 크게 뜨인 희경의 눈이 두려움으로 흔들렸다. 방문이 조금 열리며 두 아이가 머리를 내밀었다. 리아가 엄마, 하고 희경을 불렀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앉아 있던 희경은 리아가 다시 한 번 엄마, 하고 불렀을 때에야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방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두 아이에게 달려갔다. 한참이나 수아와 리아를 꽉 안고 있던 희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게 있으면 방송해 주실 수 있나요?”